***'왕자병론'의 외피를 쓰고 재생된 '종양론'이라는 유령
-박승옥씨 글에 대한 짧은 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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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90년 초 공안정국과 전노협 건설의 와중에 '노동운동위기 논쟁'이 있었다. 학계에서는 고려대 최장집교수가 '한국노동운동은 왜 정치세력화에 실패했는가'라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그리고 그 외부에서는 지금 '왕자병 걸린 노동운동, 이대로 가면 죽는다'를 쓴 박승옥씨가 <창작과 비평> 지면을 통해 '종양론'으로 상징되는 위기론으로 그 중심에서 전도사로 활약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 박승옥씨가 또 그 전면에 나타났다. 그리고 역시 상황은 다소 상이하지만, 동아일보 등이 박스기사로 그것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지니는 정치적 효과에 대해 말하고 싶지는 않다. 90년 초 위기논쟁이 그랬듯이 그것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박승옥씨가 즐겨쓰듯이 한국의 노동운동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지금도 위기라면 위기이다. 그런데 박승옥씨가 말하는 위기의 근거를 보니, 10여년 전 그가 주장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낮은 노조 조직율, 전투적 조합주의, '계급주의', 성장주의로 요약되는 생산력주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점이 발견되는데, 박승옥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노동운동을 비판하기 위해 노동운동의 위상과 영향력을 사실보다 업그레이드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은 최장집교수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예로 90년대 초 위기논쟁에서 노동운동이 급진적 정치세력의 헤게모니 아래 있는 것처럼 해 놓고 그들 때문에 노동운동이 위기에 처했다고 비판하는 방식이 그것인데, 이러한 비판은 그 전제가 옳지 않음이 입증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지배담론에 불과한 것임은 물론이다. 80년대 급진노동운동과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이 서로 무관하지는 않았지만, 급진노동운동이 전체 노동운동, 특히 대중적인 노동조합운동에 헤게모니를 지니고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만일 사실이 그랬다면 지금 노동운동이 이처럼 힘겨워하고 있을까.
90년대 초 '위기론 논쟁' 당시 위기론자들이 주장하고픈 것을 굳이 유추해 보면, 그 위기는 '급진노동운동의 위기'였을 텐데, 이들은 그것을 확장시켜 전체 노동운동의 위기라는 식으로 담론을 펼쳐갔던 것이다. 이것은 보수주의자들이 항상 즐겨 사용하는 수법인데, 그들은 객관적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특정상황에서 사회정치적 국면전환용으로 이러한 논쟁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90년 초 박승옥씨가 위기에 처했다고 했던 그 노동운동은 혈혈단신 공안정국과 싸우면서 전노협을 건설하고 그리고 지금 민주노총에 이르렀는데, 애석하게도 10 여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 박승옥씨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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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90년 초 제기된 박승옥씨의 주장이 그의 인정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는 점을 환기시키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지금 그가 다시 노동운동에 대해 가하는 이런저런 '비판'에 대해 일일이 대꾸할 필요성 또한 느끼지 않는다. 박승옥씨가 말하는 민주노총 등의 미비한 조직율, 성장주의에 근거한 운동패러다임, '전투적 조합주의' 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 활동가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제기하는 비판과 그것의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발상 사이에는 많은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개괄적으로 몇가지 '반론'을 제기하고자 한다.
박승옥씨가 위기의 근거로 지적하는 양상들이 진정 노동운동 위기의 원인인가. 우선 모두에서 언급해두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노동운동이 '위기'라고 한다면, 그 가장 큰 원인은 여전히 이 땅의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세계관과 강력한 정치적 무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는 기존 노동조합의 조합주의, 노동운동의 생산력주의, 그리고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등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가 제기한 비판들은 상이한 양태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것들은 글로벌 신자유주의 문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박승옥씨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그 핵심원인인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대해 그의 글 어디에서도 날카로운 비판과 그것의 극복방안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다. 항상 외곽을 때리는 그의 글쓰기는 과거 90년대 초 위기론을 이야기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험에 근거한 현상을 나열하고 설명할 뿐, 그 현상의 뿌리에 자리잡은, 원인을 밝혀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의 감각에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첫째, 그의 조합주의 비판은 대기업 남성, 조직노동자의 조합주의적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에 집중된다. 여기에서 조합주의는 그람시적 의미로 '계급이기주의'를 의미한다. 분명 이 지적은 제도화되어 가는 노동운동을 볼 때, 음미할 필요가 있다. 특히 50%를 넘어선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의 삶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이러한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며 지금 노동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언술이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기존 조직노동운동의 반성을 통한 주의설적 다짐과 결의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주체적 수준에서의 반성, 결의는 운동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그와 더불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대규모의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나아가 '신빈곤층'이 양산되는 구조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다. 자본주의가 존재한 이래 실업자,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들은 계속 존재해 왔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지금 이 문제들이 핵심사안으로 대두되었는가? 거기에 글로벌 신자유주의가 버티고 있는 현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지적에 대해 '또 자기변명적인 구조적 요인을 들먹이고 있네'라며 비판할 것인가. 지식인이라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없음을 솔직히 고백하거나, 아니면 더 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옹호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박승옥씨가 역설하고 있듯이 그의 눈에는 이미 노자간의 모순은 보이지 않으며, '계급주의적 운동'은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
박승옥씨는 기존 노동운동의 조합주의를 생디칼리즘을 매개로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라틴계 노동운동의 역사와 쇄락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말할 것이 있다. 라틴계의 나라에서 왜 생디칼리즘이 번성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국가와 자본의 엄청난 탄압이 중요 원인이었지만, 더욱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거기에 혁명적 지식인들이 그 '무식한 노동자'들을 이용하고 배신했던 역사가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다. 빠리꼬뮨이후 프랑스 노동운동의 상황을 박승옥씨는 알고 있는가. 노동자대중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했던 혁명적 지식인 노동운동가들이, 활동가들이 보였던 그 변신과 훼절을 박승옥씨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지금 박승옥씨를 포함하여 과거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 중 노동자들을 자신의 몸으로 생각하며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몇이나 되는가. 그들은 노동운동의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노동자들의 삶과는 거리가 먼 정치세력들, 사회세력들과 혹 '정치적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존 노동조합 위원장들이 벌이는 그 메스꺼운 싸구려 술판을 비판하기 이전에, 그 장면을 가지고 노동운동 전체를 비판하기 이전에, 자신들이 그들과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성찰적으로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오히려 박승옥씨의 논지 자체가 생디칼리즘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정치운동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며 이제 첫걸음을 띤 민주노동당을 격려하기보다 '정확하지 않은 선험적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민주노동당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가 새로운 노동자정치운동을 그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박승옥씨 스스로 부지불식 중에 노동조합운동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바라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그가 인정하든 안하든 박승옥씨가 비판한 생디칼리즘의 덫에 스스로를 묶어두는 결과를 의미한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그가 자율적 생태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 그는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정도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노조는 만능열쇠처럼 보인다. 노조가 비정규직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고통, 생태 문제에 관심을 갖고 발상의 대전환을 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그의 비판은 노동운동의 생산력주의로 이어진다. 그는 현재의 노동조합운동이 생산력주의에 빠져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자본의 이윤논리와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생태주의를 제시한다. 이른바 성장제일주의로 표현되는 생산력주의는 분명 운동을, 나아가 인간의 삶과 사회관계를 질곡에 빠뜨리는 주원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노동운동, 아니 사회운동의 향방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이라면, 활동가라면 누구나 지적하고 있다. 박승옥씨가 꿈꾸는 생태세상은 그 어느 누구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박승옥씨를 포함하여 이런저런 꼬뮨에 대한 희망 또한 결코 소멸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희망하는 그러한 사회관계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커다란 장애는 무엇인가.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탐욕의 물질주의 때문인가.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자기성찰을 통한 수도에 정진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핵심적인 원인이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대중의 투쟁과 고통으로 얻어진 모든 성과와 '발전된 사회관계'를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한 수단으로 분절, 변형시키고자 하는, 따라서 가장 극단적 수탈구조로서의 글로벌 신자유주의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그것의 극복을 위한 구체적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박승옥씨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마치 수도승처럼, 그는 단지 당위론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셋째,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박승옥씨는 90년대 초 있었던 위기논쟁에서도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한 바 있다. 이른바 87년 이후 형성된 '자유주의적 정치협약'에서 제도적으로 배제된 노동운동이 유일하게 쓸 수 있었던 수단은 무엇이었는가. 박승옥씨가 그렇게 비판하였던 그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의 시민권이 부정된 공안정국 시기에 노동운동의 유일한 투쟁의 무기였다는 사실을 박승옥씨는 그 당시 정말 몰랐는가. 몰랐었다면, 지금이라도 그것을 알려줌으로써 문제는 해소되겠지만, 그가 알면서도 애써 이 사실에 눈감아 버렸다면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주장은 하나의 이데올로기 이상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노동운동은 어떠한가. 물론 생산적 비판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 때에 비해 오히려 상황은 호전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신자유주의시대 '두 개의 국민프로젝트'가 의미하는 것, 즉 한 국가 내에 부자와 가난한 자, 그 속에서 온갖 권리를 누리는 자와 그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기름과 물처럼 존재하는 이 사회에서 진정 '전투적 노동조합주의'의 노정하는 한계가 무엇인지 그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그야말로 너무 전투적이어서 문제인가. 아니다. 그것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과거 전노협 건설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활동가들이 수많은 논쟁을 통해 확인해주었듯이,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고백하였듯이, 치열한 투쟁은 하였으되 자기운동의 전망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바로 그 점에 있다.
그런데 박승옥씨는 이러한 운동의 역사와 논의의 성과에도 미치지 못하는 주장, 즉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을 매개로 기존의 노동운동세력을 민주주의와 평화세력이 아닌 무책임한 '싸움꾼'으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습의 저항집단으로 내몰고 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지만 박승옥씨의 판단과는 달리, 지금 노동운동은 시위장소에서 치고받는 노동자와 전경의 문제를 화두로 잡고 '전투적 노동조합주의'를 반성해야 할 만큼 저열한 수준에 있지 않다.
***3.**
지금 왜 박승옥씨는 다시 노동운동을 꾸짖고 있는가. 왜 과거의 발상을 새로운 언술로 재포장하여 기존 노동운동의 성과와 그 내부에서의 변화노력을 무화시키는가. 그는 써클적 수준에 머물렀던 과거와 대중적인 수준으로 발전한 현재 노동운동의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10년 전 당시 '고립무원에 처한 노동운동'이 최장집교수와 박승옥씨의 '위기론'에 좌지우지되었을지는 몰라도, 그 역경을 헤치고 나온 지금의 노동운동은 동일한 담론에 휘둘릴만큼 나약하지 않다. 물론 박승옥씨가 제기한 문제들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가 제기하는 원인과 해결방안 사이에 구체적 매개물이 없다면 그것은 황광우씨가 지적하듯 무소유의 삶을 지향하는 스님에게나 필요한 처방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의 주장은 그의 인식, 혹은 인정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말한 '가진 자들'의 이해를 옹호하는 사회정치적 지배담론으로서의 효과만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이제 박승옥씨가 언급한 전태일열사에 대한 생각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는 전태일열사에게로 돌아가자고 외친다. 전태일열사가 시대의 가장 아픈 부분을 안고 살다 갔다는 점에 주목할 때, 지금 전태일열사가 살아 있다면 그는 진정 어떻게 행동했을까. 당연히 그는 비정규직노동자와 이주노동자의 삶을 중심에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식인 친구를 많이 갖게 됐을 그는 그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계급의 고통스런 현실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옆에서 훈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조직하기 위해 노동현장으로, 그것을 도와줄 수 있는 더 많은 지식인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의 삶을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글로벌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을 우회한 채, 박승옥씨처럼 자족적인 생태주의를, 하루 연명하기조차 힘든 비정규직노동자, 이주노동자들을 옹호하는 논지를 펴면서 '보다 적은 소비'를 그렇게 과감히 주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너무 비약이 많으며 그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이 직면한 '지상의 고통'을 더 은폐한다.
박승옥씨에게 현재의 노동운동은 과거와 변함없는 그의 논지에 근거해 볼 때, 그가 주장했던 바 여전히 90년대 초와 같은 '종양'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
***필자**
이광일: <정치비평> 편집위원,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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