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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70만 힘'을 이끌지 못하는 무능력을 고민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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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70만 힘'을 이끌지 못하는 무능력을 고민할 때"

[박승옥씨 주장에 대한 현 노동운동가의 반론]

***박승옥씨의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에 대한 반론**

진짜 노동운동이 왕자병에 걸린 것인가? 설령 노동운동이 왕자병이 아닌 황제병에 걸렸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우리는 그 비판에 귀 기울여한다.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은 엄혹할수록 좋은 것. 우리 사회에서 가장 왼편에 서 있는 노동운동이 스스로조차 비판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오류를 정정하지 못한다면, 그 노동운동으로 사회의 무엇을 바꾸겠는가? 지난 10여년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실로 험한 길을 걸어왔다. 정부와 자본의 폭압에 맞서 여기까지 노동운동을 이끌어온 여러 노동조합 간부들께 적어도 우리가 양심적 지식인이라면 먼저 인간의 예의를 갖추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전투적 조합주의의 한 길을 따라 성장해온 지금의 노동조합운동은 그 시야의 협애함과 계획의 근시안, 오만과 자폐 등 여러 측면에서 부정적 양상을 노정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박승옥씨의 비판에서 우리가 받아들여야할 지적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폭력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촉구한 점이다. 폭력 집단과 싸우다 보니 폭력 집단을 닮아갔다는 지적에 대해 그것이 아무리 사태를 과장 왜곡한 비판일지라도 우리는 자성할 필요가 있다. 과연 전투경찰과 대치하면서 휘두르는 몽둥이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폭력은 필요악인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거부해야할 지배자들의 악행인지, 도덕적 차원과 현실적 차원 등 여러 면에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전투적 조합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무지하고 거친 폭력 집단과 상대하려면 필사즉생의 투지가 필수적이었다. 어찌 보면 전투적 조합주의는 한국적 노사관계의 반영일 수 있다. 하지만 총파업을 투쟁의 목표로 생각하는 무지한 상디칼리즘이 민주노총 간부들의 무의식 깊이 내장되어 있음을 보아야 한다. 투쟁의 수단을 투쟁의 목표로 전도시킨 상디칼리즘의 단순, 무식은 노동운동의 미래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셋째, 한국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야할 것인지, 미래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촉구한 점이다. 자본의 성장주의를 따라 노동운동도 성장주의의 공범자가 된 것은 아닌지 돌아다 볼 것을 지적한 것은 모든 노동조합 간부들이 고민해 보아야 할 의미있는 지적이다.

만일 박승옥씨의 글이 오늘날 노동조합 간부들이 보이고 있는 부정적 양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報告)하면서 노동조합 운동에 경종을 울렸다면, 노동운동에 애정을 갖는 이들의 존경을 받는 글이 되었을 것이다. <왕자병에 걸린 노동운동>이라. 이게 뭔가? 나는 한참 동안 당혹하였다. 박승옥씨가, 노동운동을 고립시키지 못하여 안달하는 노무현 정권의 나팔수라도 된 것인가? 지난 13년 전 <죽음의 굿판을 집어 치워라>며 후배들의 분신 항거를 <또 다른 파쇼>로 비난하였던 김지하 선배가 그러하였듯이, 자신의 글이, 그 진정성을 떠나, 누구의 노리개감이 되는지 글 쓰는 이들은 조심하여야 한다. 나는 위 타이틀이 박승옥씨의 진심이 아니라 믿고 싶다. 그런 류의 타이틀은 평소 진보진영에 냉소적이고, 특히나 노동운동을 씹어 먹지 못하여 분해하는 조중동의 언어이다. 황제병이나 왕자병은 노무현이나 유시민의 행태 분석에 적합한 언어가 아닌가?

민주노총에 대해 뭐 좀 안다고 하는 분들이 걸핏하면 내뱉는 소리가 조직률이다. 박승옥씨 역시 “오늘날 조직노동자는 1989년 이래 꾸준히 감소해 전체 노동자의 12%도 안 된다”며 또 조직률 타령으로 비판의 포문을 연다. “노동운동의 이런 낮은 대표성이 나아질 전망조차 별로 없다”며 노동조합 운동의 음울한 미래를 걱정한다. 한심한 일이다. 그러면 전경련은 국민의 몇 %를 조직하고 있는 단체인가 물어 보라. 국민의 0.1%도 조직하지 못하는 전경련더러 그런 낮은 대표성으로 뭣 하려 하는가, 왜 저들에겐 따끔한 충고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민주노총의 너무 적은 조직률을 보고 우울해 할 때가 아니다. 70만명이나(!) 되는 이 거대한 힘을 정당하게 이끌어가고 있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을 고민해야 할 때이다.

민주노조운동이 봄 날 흐드러지게 피었다 허무하게 지는 목련꽃이란 말인가. 민주노조운동의 “때 늦은 개화, 때 이른 조락”을 예고하는 박승옥의 진단은 자신의 관념으로 세계를 대체하다가, 세계가 자신의 관념대로 움직여지지 않으면, 곧바로 우울증에 빠져드는 낭만적 지식인의 병적 심리 이외 아무 것도 아니다. 1987년 민주 대항쟁으로 한국은 마침내 민주주의의 본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지는 87, 88년 대파업 속에서 향후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노동자부대가 탄생하였다. 민주노동조합운동은 이제 17살 먹은 사춘의 소년이다. 향후 20년 한국 사회를 합리적으로 바꾸어 나갈 운동으로 노동운동말고 무엇이 있는가?

시계가 2000년을 가리키면서 한국 사회에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정부 재정의 공룡화>이다. 2000년을 넘어가면서 한국 정부는 100여조원의 예산을 집행하였다. 나는 100조원이 넘는 거대한 부를 가져간 정부가 서민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지식인이라는 분들이 왜 이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지, 정말 답답하다. 2004년 이제 정부 예산은 200조원을 넘어섰다. 노동운동은 정부로 하여금 서민들의 생활비를 책임질 것을 요구해야 한다. 생활비 인하 투쟁에 앞장 서는 노동운동에 전 국민은 환영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40대의 대기업 노동자들이 받는 연봉 3-4000천만원이 많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 보면 4인 가구가 한 달 살기 팍팍한 돈이다. 왜냐? 너무 많은 돈을 뜯기기 때문이다. 자동차 기름값 이거 너무 과도하다. 6만원어치 기름에 세금이 4만원. 정부가 그렇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가면서 서민들의 지하철 요금, 버스비 하나 책임지지 않는 것은 그 정부가 불량한 정부이기 때문이다. 지하철 요금, 버스비,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모두들 핸드폰을 소지한다. 한 가족의 통신비, 20만원이 훌쩍 넘는다. 에스케이와 한국통신은 지금 과도한 독점 이윤을 빨아 먹고 있다. 통신비, 내려야 한다. 연 700만원이 넘는 사립대의 학비, 서민들의 등이 휘고 있다. 대기업 직원이나 공무원의 경우 아이들의 학비를 지원받는다. 일반 서민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냐. 정부는 대학생 학비의 50%라도 책임져야 한다.

박승옥씨는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 하였다.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은, 해 보았자, 다시 생활비 상승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된다는 것이다. 옳은 지적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밑 빠진 독>을 <밑 안 새는 독>으로 교체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밑 안 새는 독>을 만들어 나가야 할 판에 박승옥씨가 내놓는 독은 <밑 없는 독>이다. 생태적 대안의 독은, 안 먹고 안 쓰는 <밑 없는 독> 아닌가? 그것은 무소유로 살아가는 법정 스님에게나 어울리는, 아직은 우리 서민에게 어울리지 않는 <꿈속의 독>일 따름이다.

박승옥씨의 글을 보면서 우리는 당혹한다. 생태적 대안을 모색하는 분이 이렇게 사고가 단순할 수 있을까? “이제 노동운동은 경제발전, 성장의 모델을 폐기해야 한다. 더 많은 임금, 더 많은 여가, 더 많은 권력을 지향하는 노동운동은 결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대안이 될 수도 없다.” 한심한 일이다. 도대체 오늘의 노동운동이 얼마나 많은 임금, 얼마나 많은 여가, 얼마나 많은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말인가? 생태주의적 각성을 촉구하는 것은 좋으나, 생태주의를 위하여 노동 운동을 성장주의 운동이라 낙인찍는 것, 그것은 또 하나의 흑백논리이다.

박승옥씨는 생태주의적 대안 모델을 찾길 호소하였다. 나는 생태주의자가 아니기에 생태적 담론을 목청껏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자동차를 소유하지 않고, 핸드폰을 피하는 것으로 소박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이다. 가끔씩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을 외운다. “만일 사람들이 쏙독새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나, 밤의 연못가에서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인생에 남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21세기의 역사 속에서 사회주의자가 어떤 사상을 갖고 어떤 실천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진지한 탐색이 필요한 때이다. 21세기의 사회주의자가 놓쳐서는 안 될 원리는 <다양성의 원리>이다. 생명은 다양하다. 유일한 진리는 없다. 사회주의자는 다른 여러 사상, 여러 견해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견해를 갖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실천해야 한다. 박승옥씨도 열린 마음으로 사회주의자의 고뇌를 공유해주길 바란다.

***필자**

황광우/ 민주노동당 전 중앙연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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