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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기침=신종 코로나'라는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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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기침=신종 코로나'라는 혐오

[사회 책임 혁명] 중국에서 선교 활동 중인 어느 한인 선교사의 기도

지난 일요일, 어느 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 목사님은 중국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자신의 친구가 기도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내왔다고 말했다. 교회에서는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기도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중보기도(仲保祈禱)'라고 한다. 중국에 선교사로 나가 있는 목사님의 친구가 요청한 것이 바로 중보기도이다.

요청한 중보기도의 내용을 전해 듣고 나는 적잖게 감동을 받았다. 그 선교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게 해 달라, 건강을 잃지 않게 해 달라 같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의 기도를 요청하지 않았다. 한국인과 중국인이 서로 미워하지 않게 해 달라. 이것이 그 선교사가 요청한 중보기도 제목이었다. 그 선교사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남아 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 중인 손흥민 선수는 2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토트넘 홋스퍼 구장에서 열린 2019~2020시즌 프리미어리그 25라운드 맨체스터 시티와 경기에 출전하여, 1대 0으로 앞선 후반 26분 쐐기 골로 시즌 13호 골을 기록하며 팀의 2대 0 승리를 이끌었다. 당연히 경기 직후에 언론은 손흥민 선수를 인터뷰했다. 그런데 인터뷰 도중 손흥민이 마른기침을 했다. 이 영상이 나가자 외국 축구 팬들이 댓글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

"손흥민이 방금 기침한 건가?"
"토트넘 선수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

손흥민의 기침과 신종 코로나를 연결 지은 것이다. 인터뷰 당시 손흥민 옆에 있던 동료 선수 베르흐베인을 언급하며 "(그의) 명복을 빈다"는 댓글도 올라왔다.

이런 댓글은 유머라고 해야 할까, 혐오라고 해야 할까. 분명 유머 수준은 넘어 보인다. 유럽이나 미주에서는 두말할 필요 없이 혐오라고 할 만한 반응이 연이어 보도되고 있다. 중국인이나, 그들이 보기엔 비슷해 보이는 한국인을 향해 "바이러스"라고 말하며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중국을 방문한 적 없는 자국 거주자이거나 국민임에도 동양인이란 이유로 수업 등의 참석을 막는 등의 과도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감염은 피부색이나 얼굴 모양이 아니라 동선과 관련이 있음을 안다. 즉, 바이러스는 인종이나 국적을 따지지 않고 옮겨갈 만한 조건이나 상황이 구비되었을 때 옮겨갈 뿐이다. 이러한 상식에 반하여, 경로나 조건과 무관하게 단지 최초 발병지 주민의 피부색과 얼굴 모양을 닮았다는 이유로 격리하려 들고 행패를 부리는 것은 명백한 인종차별이자 혐오이다. 내가 보기에 혐오가 바이러스보다 더 파괴적이다. 모르긴 몰라도 역사에서 바이러스가 죽인 인간보다 혐오가 죽인 인간이 더 많지 않을까.

유럽 등지에서 봉변을 당하는 우리이지만 우리 또한 중국인이나 조선족에 대해 유럽인이 우리에게 행한 태도를 반복하고 있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언론 보도를 보면 지방의 어느 지역에서 조선족 부모를 둔 아이가 학교나 동네에서 따돌림을 당한다고 한다. 기사의 예시로 등장한, 한국에 정착한 이 조선족 가족은 중국을 떠난 지 15년이 넘었고 고향을 방문한 지도 10년이 넘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동네 주민들은 그들을 바이러스 취급한다는 것이 보도의 요지이다. 이 보도가 정확하게 사실을 전달했다면, 그 동네 주민들은 유럽 등지에서 한국인이 "바이러스"로 불리며 봉변을 당한 것을 당연하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받은 혐오에는 분개하지만 우리가 타자에게 주는 혐오엔 무감각하다면, 과연 상식이 있는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포는 그러나 쉽사리 혐오와 연대한다. 혐오의 대상이 타자일 때는 간단히 자기 합리화 기제를 작동시키는 반면 혐오의 대상이 내부에 있을 땐 그 기제를 작동시키는 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린다. 바이러스와 동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히틀러 치하 독일인은 처음에 나치정권이 유대인을 잡아가자 찬동 또는 방임하다가 나중에 독일인 가운데 이른바 취약한 사람들을 잡아가도 무기력하게 바라보기만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공포가 더 커졌거나,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일말의 존엄이 서서히 사그라졌거나. 중국에서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막는다며 비(非)우한인이 우한인을 차별하고 핍박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목격할 수 있다. 우한이 완전히 봉쇄되기 전에는 우한인을 찾아내기 위해 신고자에게 현상금을 지급하는 지방정부까지 있었다.

임박하고 압도적인 공포 앞에 사람들이 야만으로 회귀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하다. 그러나 임박하고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도 야만으로 회귀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나타낸다. 나는 우리의 시대가 인간의 존엄이 존중되고 권장되는 시대라고 알고 있다.

임박하고 압도적인 공포가 아닌데도 공포의 현상에 편승하여 이미 고통받는 이들을 추가로 괴롭히는 행위는 혐오의 한 양태이다. 그것은 야만과 반대이지만 분명 문명화의 독버섯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 이종격투기 선수 중국의 장웨이리가 대전 상대인 폴란드 요아나 옌드레이칙에게 한 말은 새겨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요아나 옌드레이칙은 자신은 방독면을 쓰고 장웨이리는 아무것도 쓰지 않은 이종격투기 시합 포스터를 SNS에 올렸다. 네티즌이 손흥민을 겨냥하여 올린 댓글과 같은 맥락이다. 장웨이리는 "비극을 조롱하는 건 그 사람의 진정한 인격 표시"라고 말했다. 정확한 번역은 아마도 "비극을 조롱하는 건 그 사람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는 표시"정도일 것이다.

이번 전염병 사태를 보며 나 또한 어쩔 수 없이 약간은 걱정하게 되고 자녀와 노모의 안위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답답하지만 마스크를 쓴 채 전철을 타고, 가능한 한 자주 손을 씻으려고 노력한다. 아직까지는 누군가 악수를 청해도 피하지는 않는다. 이번 사태에서 인간사의 다양한 맥락과 벌거벗은 현상을 목격하며 세상살이의 이치 같은 걸 느끼기도 한다. 대부분 서글프거나 불편한 것들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이런저런 뉴스를 보게 된 것 또한 이번 사태로 인한 내 삶의 변화이다. 그동안 본 뉴스 중에 가장 내 눈길을 끈 것은 고립된 우한 시민들이 밤에 창문 불빛으로 서로를 격려하며 "우한 만세"라고 소리를 지르는 장면의 방송 리포트였다. 여러 가지 소회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때 눈시울이 잠시 뜨거워졌다는 말만 남기고자 한다.

그제 들은 중국 선교사 이야기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관련된 이야기 중에서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다. 생존이 아닌 사랑을 부탁한 그 선교사에게, 이런 흉흉한 이야기만 가득 찬 세상에서 조금 다른 측면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한 마음이다. 사실 바이러스보다 강한 인간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인 것은 잠시 바이러스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이길 결심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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