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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살고 땅 2만평 가진 老기업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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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살고 땅 2만평 가진 老기업인 이야기

[CEO 단상] 누가 감히 이 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누가 감히 이 분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그 분은 올해 63세다.
그 분은 강남의 그 유명한 압구정동 H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 분은 사업으로 성공하여 남 부럽지 않은 재산도 있다.
그 분은 충청도 어딘가에 2만평이나 되는 넓은 땅도 있다.

그 분은 고급차를 타며 골프장 멤버십도 갖고 있다.
그 분은 매일 새벽 헬스클럽에 나가서 운동을 한다.

그 분 집에는 일주일에 몇 번씩 파출부가 온다.
그 분은 작년에 아들과 딸이 있는 영국과 미국엘 다녀왔다.

나는 그 분을 존경한다.

***1. 드라마보다 더 감동적인 그 분의 인생스토리**

그 분은 강원도와 인접한 충청도 심심산골 화전민(火田民)의
12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1940년대의 화전민 생활이란 원시생활과 진배 없었다.
호랑이와 늑대가 자주 나타나는 깊은 산 속 숲에 불을 지른
후 바위와 자갈을 들어내면 생기는 손바닥만한 밭을 일구어
감자와 옥수수를 길러 먹고 사는 것이 화전민생활이었다.

한 곳에 오래 있지 못 하고 2-3년이 지나면 또 다시 몇 개
의 산을 넘고 넘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 그곳의 산에 다시
불을 지르고 밭을 일구어 살아가는 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나뭇가지를 꺾어 얼기설기 엮어 흙을 발라 하늘만 가리면
그것이 바로 집이었는데 그런 움막집에서 그의 12남매가
태어났다.

왜정시대를 거쳐 6.25가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해
봄에는 불을 놓아 밭을 일구던 중 전쟁 때 떨어진 불발탄
이 터져 12남매 중 두 동생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하나
뿐인 여동생은 그 몇 년 후 지뢰가 폭발해 죽었다.

가끔 장날이면 60리(24km)를 걸어 장에 다녀오시는 아버지
를 뺀 다른 가족들은 1년이 가도 가족 외 다른 사람 얼굴
한 번 보지 못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가 13살 때였다. 장에 가시는 아버님을 졸라 그는 난생
처음으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읍내 장에 가보게 되었다.

그 날 밤 그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모든 형제들이 한 방에
뒤엉켜 자고 있는 방을 빠져 나와 그는 바위에 앉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면서 읍내 장터를 생각했다.

자기 가족 외 그렇게 많은 사람을 본 일도 처음이었지만,
읍내 장터의 그 번잡함과 생전 처음 본 플라스틱 바가지와
나이론양말과 자동차와 학교는 그에게 신기함 이상의 엄청
난 충격이었다.

눈처럼 꽃이 핀 하얀 메밀 밭에 이유도 없이 돌을 던지며
그는 읍내 장터의 그림을 머리 속에서 지우려고 했다.
그러나 읍내 장터의 부산함은 더욱 선명하게 그에게 다가
왔다.

그 날 밤 그는 40-50개의 돌을 던졌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지난 어느 겨울, 허리까지 빠지게
눈이 많이 내린 날 새벽. 그는 어머님께만 말을 하고 집을
나왔다. "10년 후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걸어서 서울로 올라왔다. 묻고 물어 열흘이나 걸렸다.
말 그대로 무작정 상경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글을 몰라 간판이나 도로 표지판도 읽을 수 없었다.

6개월 정도 서울역에서 지냈다. 잠도 그곳에서 잤다.
옷이라고는 집 떠날 때 입었던 무명 옷이 전부였다.
그러나 서울 역 노숙자 생활은 화전민생활에 비해서 너무
편하고 좋았다.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가까운 서대문구 어느 신문보급
소장의 배려로 그곳에서 자고 먹고 하면서 새벽이면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는 구두딱이와 넝마주이를 했다. 2년 후엔
엿장수도 했다.

넝마주이와 구두딲이를 할 때는 동네 깡패들에게 1박 2일간
맞기도 했는데 그 때 입은 상처가 지금도 어깨와 허벅지에
큰 상처로 남아 있다.

그런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그는 2년이 지난 16살 때 어느
자선단체가 운영하는 야간 공민학교에 다니면서 한글을 깨우
치고 공부를 했는데 그것이 그의 학력의 전부다.

그는 19살에 군에 입대했다. 돈을 주지 않아도 밥을 먹을 수
있어 군대는 그에게 천국이었다. 옷도 주었다. 구두도 주었다.

그는 도로를 만들고 다리를 건설하고 막사를 짓는 공병부대
에 근무했는데 불도저, 페이로더, 엑스카베이터 등 건설장비
운전을 그곳에서 배웠다.

그는 그런 기계들이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 건설장비 운전이
너무너무 재미 있었다. 운전대를 한 번 잡으면 해가 지고 깜
깜할 때까지 내려 오기가 싫었다. 그는 다른 동료들의 일도
도맡아서 했다.

그는 3년간 휴가도 한 번 가지 않았다. 갈 곳도 없었다.

제대할 때쯤 그는 어떤 건설중장비도 자유자제로 운전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그런 장비의 정비에도 대단한 경험과 실력을 갖고 있었다.

제대하기 며칠 전 마침 같은 달에 제대하는 선임하사가 평소
그의 성실성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을 눈여겨보았던지 갈 곳
이 없으면 자기 집에 같이 있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 변두리에 있는 그 선임하사 집으로 들어
갔다. 그는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면서 선임하사가 하는 건설
중장비 운전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

당시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전체에는 도로공사, 다리공사,
터널공사, 학교공사, 건물공사 등 건설공사가 참 많았는데
건설중장비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부족했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군대의 건설중장비가 민간건설회사의
장비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을 뿐 아니라, 군대서 운전해본
경험을 높이 사주는 시기였다.

그는 당시로는 최첨단 건설중장비 운전을 군대에서 완전히
마스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 할 곳은 천지였다. 그는
선임하사와 함께 전국 각지의 수 많은 건설현장으로 불려
다니면서 일을 했다.

그는 하루에 한끼만 먹고 돈을 모았다.
일요일도 없이 일을 했다.
밤에도 일을 했다.
그는 자기 수입의 90% 이상을 선임하사 부인한테 맡겼다.

제대한지 2년이 되었을 때 그는 그때까지 모은 돈을 모두
찾았다.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는 군대용 다블빽 하나를
구해서 그 안에 돈을 넣었다.
정말이지 다블빽 하나 가득히 돈을 모았던 것이었다.

그는 그 돈을 갖고 집 떠난 후 처음으로 고향을 찾았다.
여러 사람에게 묻고 물어 집을 찾을 수 있었다.
화전민생활은 여전했다.
50세 중반인 부모님은 70세 노인 이상으로 늙어 있었다.

그런데 막내 동생만 있고 다른 형제들은 집에 없었다.
나머지 형제들은 고아원이나 남의 집 머슴으로 가 있었다.
그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는 3일에 걸쳐 형제들이 있는 곳을 수소문해서 모든 형제
들을 집으로 오게 했다. 그는 그가 매고 온 다블빽을 열었다.
돈 다발이 방 안에 펼쳐졌다. 모두들 놀랐다.
아버님은 어디 강도질이라도 한 것 아니냐는 눈치였다.

그는 이 돈으로 읍 내로 내려가는 산기슭의 논과 밭을 사서
형님과 동생들이 부모님 모시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으면
어떨까 하는 말을 했다.

(이때 그가 산 땅이 2만평 정도 되는데 지금은 바로 인근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 서고 시외버스 터미널이 생기는
등 요지가 되어 있다고 한다.)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더욱 열심히 일을 했다.
1년이 지났을 때쯤 그는 장기 월부로 불도저를 한 대 구입
하여 자기 사업으로서 건설중장비 운전을 하기 시작했다.

10개월 정도 열심히 일하면 월부금 내고도 불도저를 한 대
더 살 수 있을 정도로 돈이 잘 벌렸다. 그는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는 워낙 눈설미가 좋아 중장비 운전뿐 아니라, 어지간한
도로공사나 건물기초공사, 부지정지공사는 자기가 직접 할
수 있을 정도로 토목공사에 대한 경험과 지식을 갖게 되었
다. 그래서 몇 년 후에는 토목공사업 면허를 냈다.

그렇게 그가 열심히 살고 있었던 어느 날 저녁, 선임하사
와 그 사모님이 모처럼 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선임하사는 자기 딸과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결혼을 했다.
선임하사가 장인이 된 것이었다.

결혼 후에도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수 많은 건설현장에서 일을 했다.
10년이 지나자 중장비가 20여대로 불어 났으며, 그의 회사는
꽤 유명한 토목전문회사가 되었다.

현대건설 같은 대형건설회사에서 하청공사를 받기도 했으며,
왠간한 토목공사는 원청회사가 되어 직접 수주를 받기도 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 하고 근면하여 큰 회사 사장이 된 50대
후반까지도 현장작업자들과 함께 불도저, 엑스카베이트, 페이
로더 같은 중장비를 운전했다.

그는 요사이도 자주 운전대를 잡는다.
눈을 감고 엔진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 정도다.

회사 사무실에는 여직원 한 두명만 두었다. 회사에 아예 그의
자리는 없었다. 중장비를 갖고 일을 하는 건설현장의 콘센트
임시건물이 그의 사무실이었다.

그의 회사는 어떤 회사와 입찰경쟁을 하더라도 원가측면에서
유리했다. 자기장비에, 자기도 직접 운전을 하니 어떤 업체도
그의 회사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1976년까지 서울 변두리 전셋집에서 살았다. 그는 그때
벌써 제법 많은 돈을 벌었지만, 돈이 모이면 중장비를 사거나
아니면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이나 형제들 도와주고 조카들
공부시키는 데 돈을 보냈다.

그는 아들과 딸을 하나씩 두었는데 큰 아들이 중학교 2학년
이던 1979년 압구정동 H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이 커가자 공부방이 없어 이사를 한 것이었다.

남편 성격을 잘 아는 그의 부인은 싼 곳만 찾아다녔다.
강북에 있는 아파트는 비쌌다. 여의도는 너무 비싸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분양미달로 근 1년이나 비어있던 압구정동
H아파트 하나를 분양가에서 20% 할인한 가격으로 구입했다.

당시 압구정동은 도로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변두리지역
이었다. 그래서 비만 오면 도로는 진흙탕으로 뒤덮혔으며,
아이들은 장화를 신고 다녔다. 학교 시설은 서울 변두리학교
보다 더 못 했다.

그는 지금까지 이 H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의 부인은 시갓집과 남편을 지극히 섬기고 자식에게는 끝
없이 헌신적인 전형적인 조선의 아내이자 어머니였다. 전국
각지의 건설현장을 누비고 다니며 어떤 때는 3-4개월에 한
번 집에 오는 그에게 부인은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배우지 못 한 아버지의 한을 풀려는지 두 아이 다 최고 명문
대학에 들어 갔는데, 아들은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딸은 장학
생으로 들어갔다.

법대를 졸업한 아들은 3학년 때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XXX에
근무하다 지금은 정부에서 보내주는 케이스로 영국 유학 중에
있는데 결혼 한 그의 가족도 함께 갔다.

의대와 대학원을 나온 그의 딸은 미국 유명대학에서 장학금을
받고 유학을 떠나 재활치료에 관련된 박사과정에 있는데 그의
남편은 작년에 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지금 미국의
대학병원에 의사로 있다.

그는 평소 며느리와 함께 등산도 가고 영화도 같이 보러 갈
정도로 친하게(?) 지내며, 사위 역시 동네 구멍가게나 포장
마차에서 소주잔을 함께 기울일 정도로 자식처럼 친구처럼
지내는 멋진 면을 갖고 있다.

그 분의 부인은 작년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 부인이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그
분은 모든 일을 제쳐두고 부인을 살리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는 평생을 코란도 같은 짚차를 자신이 직접 몰고 다녔으나
부인을 싣고 병원에 가는 데 불편해서 처음으로 그랜저 승용
차를 구입했다.

병원에서는 6개월 정도 살 것 같다는 것이었지만, 그는 전국
각지의 유명한 양의사와 한의사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좋다는 약은 다 구해서 썼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에 하느님이
감복했는지 그의 부인은 5년간을 더 살다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는 지금 H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미국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 딸과 사위, 그리고 손자 손녀
들이 자주 전화를 걸어 온다. 그도 자주 아들 딸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손자 손녀들과 전화를 한다.

정말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최고의 시아버님을 혼자 두고
이국에 멀리 떨어져 있다는 부담감으로 몸둘 바를 모르는
며느리에게 그 분은 이렇게 말하는 분이다.

"애야, 그곳에서 너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돌아간 너희
시어머니한테 잘 하는 것이란다. 며느리 너가 시어머니 아플
때 얼마나 고생했느냐. 이왕 남편 따라 영국에 갔으면 너도
뭔가 공부를 하라고 그 사람도 말하지 않았느냐.

나는 너희들이 같이 있으면 귀찮단다.
나는 평생을 객지생활을 해서 그런지 지금이 더 편하단다.
내년에 돌아오더라도 가까이서는 살되 너희들끼리 잘 살면
되는 거야."

그 분의 아파트에는 일주일에 세번씩 파출부가 와서 빨래와
청소 그리고 반찬과 밥을 해 놓는다.

그는 체질적으로 그런지 산골 출신이라 그런지 너무 건강하다.
지금도 웃통을 벗으면 소위 말하는 몸짱 이상으로 울퉁불퉁
발달한 근육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팔굽혀펴기를 단숨에
100번을 할 정도다.

그는 서울변두리에 살 때부터 마라톤과 등산모임에 열심인데
전국 각지 안 가본 산이 없을 뿐 아니라, 어느 계곡 어느 산
등성이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느 코스는 어디에서 출발하면
몇 시간 걸린다는 것까지 훤 하게 알고 있다.

몇 년 전 그는 우이동 4.19묘지에서 출발해서 불광동 진관사
까지 가는 북한산 종주 산악마라톤에서 그 나이에 3등을 할
정도로 산을 좋아하며 또한 그 정도로 건강한 청년(?)이다.

그는 20여년전부터 그가 태어난 충청도 산골에 있는 양로원
을 1년에 두번씩 방문해오고 있다.

해마다 양로원을 방문할 때면 그는 쌀 다섯 가마니로 떡을
하고 불고기 50근과 함께 겨울이면 외투와 양말, 여름이면
모시적삼을 노인 분 숫자대로 사서 그의 부인과 두 아이들과
함께 간다.

그 분은 부인이 돌아가신 후 좀 변했다.
60이 넘은 금년초부터 골프를 배우기 시작하여 얼마 전에는
골프장 회원권을 하나 사서 가끔 골프 치러 가는 것이 변한
것이며, 동네 헬스클럽에 등록해서 매일 새벽운동을 한다는
것이 변한 것이다.

그 분은 오늘 새벽에도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는 의정부
에 있는 공사현장으로 떠났다. 그는 그 곳에 있는 콘센트
가설 건물의 함바식당에서 작업자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 그렇게 좋다는 것이다.

***2. 나의 생각**

지금 13억의 모든 중국 사람들은 이 분처럼 입지전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을 존경하고 자기도 그렇게 되기 위하여 눈썹
(?)을 휘날리면서 뛰고 있는 것 같다.

나도 열심히 일해서 저 사람처럼 성공해야지, 나도 밤 잠 안
자고 사업해서 저 사람만큼 돈 많이 벌어야지, 나도 저 사람
같은 좋은 집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지금 어떤 고생을 하더
라도 열심히 해야지 하면서 13억 모든 중국인들의 눈이 반짝
이고 피가 끓고 있는 것이다.

남을 탓하거나 성공한 사람을 비방하고 욕하는 분위기는 전혀
없다. 13억이나 되는 엄청난 중국인들이 지금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에는 이런 분위기가 다소 좀 약해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분들을 존경하고 대우해주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좀 있었으면 좋겠다.

성공한 사람, 돈 번 사람을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내몰기보다는
그런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일해서 더 성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어 자기도 잘 살고 국가와 민족에 봉사도 하고 베푸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그리고 국가적으로도
더 좋지 않을까?

감히 누가 이런 분께 돌을 던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 분을 존경한다.

***필자 소개**

천주욱 대표는 74년 삼성그룹에 입사해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삼성생명, 삼성비서실 및 국내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해 보았고 특히 삼성물산에 재직 중이던 1980년대 후반에는 국내 최초로 사내 벤쳐사업에도 관계해 보았으며, 97년부터는 씨제이코퍼레이션에서 인터넷사업도 펼쳐 보았던, 온라인-오프라인 양쪽 경험을 했던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그러던 중 2000년 8월 제일제당그룹내 종합상사인 (주)씨제이코퍼레이션 대표이사직을 사임한 뒤 스탠다드텍을 창업, 활동중이다. 천 대표의 보다 많은 글은 www.myinote.com에 들어가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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