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1일 오후 2시, 살아 있는 자의 식사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각.
한 줄도 안 되는 전화를 받았다. 인터넷에선 벌써부터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법정은 1975년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지내다 '무소유' 출판 이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1992년 출가 본사인 송광사를 떠나 강원도 화전민의 폐가에서 지냈다. 2007년부터는 폐암으로 투병 중이었으며 서귀포 법환리에서 올해 겨울을 나고 있었으나 병세가 악화돼 서울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그의 행적은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입적하기 하루 전에는 상좌 스님들에게 '강원도 수류삼방 토굴에 가고 싶다.'고 말했지만 폭설로 접근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고 스님들이 '길상사로 가시겠습니까.' 라고 묻자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11일 오전 병원을 나와 길상사에 도착, 상좌들이 '절입니다.' 라고 하자 법정은 고개를 끄덕였다고 전해진다. 그리고는 오후 1시 51분 조용히 눈을 감았다.
ⓒ 최항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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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는 법정이 시주받아 창건한 사찰이지만 스님은 단 하루도 길상사에서 지낸 적이 없었다. 법회를 마친 후에도 항상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온몸으로 무소유를 실천한 셈이었다. 물론 그 길이 쉽지 않았고 법정은 입적을 통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길상사에서 하룻밤을 쉴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길상사는 우리 내 일상의 골목길 풍경과 다름없었다. 한 사람도 지나가기 힘들었을 그 좁은 길로, 사람들은 법정과 함께 송광사로 향했다.
처음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는 법정의 책 한 대목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송광사에 도착한 법구는 다시 하루를 보낸 후, 때론 물에 비추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가 되기도 하면서 경내를 한 바퀴 돌아 다비식이 진행되는 산속을 오르고 또 올랐다.
유언에서 다비식을 하지 말고 나무를 베지 말며 강원도 오두막에 남아 있는 땔감으로 화장 해달라고 했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의 유언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 가는 길인데 높이 쌓이지 않은 장작더미를, 그리고 변변한 만장 하나 없음을 못내 아쉬워하는 이들도 많았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
법정과 나누는 마지막 대화. 그 짧은 말을 끝으로 거화가 시작됐고.
법정과 함께 시절을 보냈던 상좌 스님들이 먼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불이 들어가자 모두 눈물바다가 됐다고 뉴스는 전하고 있지만,
마음이 아니라 적어도 눈물은 그런 것이다.
같은 자리에 모두가 한마음이라도
눈물은 같이 있었던 사람만이 흘릴 수 있는 것이라 다시 한 번 생각했다.
ⓒ 최항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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