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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가득,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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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봄 가득,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서 만나요

2020년 5월 고을학교는 <양평고을>

*코로나19 상황이 진정되고 있으나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니므로 4월 제75강은 부득이 휴강하고 5월로 연기합니다. 다음달에 꼭 뵙기를 기대합니다.

*코로나19 관련,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거나 본인 또는 가족이 14일 이내 국내외 감염지역 방문을 한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2020년 5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75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하며 조선말 의병항쟁과 위정척사의 사상적 기반이 된 화서학파의 종장 이항로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양평고을>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평군


고을학교 제75강은 2020년 5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8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75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양서면(두물머리/정창손묘역/이덕형묘역/몽양여운형생가 및 기념관)-옥천면(양근향교/강맹경묘역/함왕혈/사나사/함씨각/원증국사석종/원증국사석종비)-용문면(운계서원/봉황정/택승정/양응함, 양헌수신도비)-지평면(지평양조장/지평의병기념관/
지평향교/구둔역)-개군면(수곡서원)-서울의 순입니다.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답사 코스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양평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75강 답사지인 <양평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두물머리,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곳
양평의 산줄기는 용문산을 중심으로 유명산, 백운봉, 도일봉, 봉미산, 성지봉, 화야산, 양자산, 갈기산 등이 솟아 있고 물줄기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북부와 남부를 흘러 양서면 양수리에서 합쳐져 한강 본류를 이룹니다. 수입천(水入川), 문호천(汶湖川)이 북한강으로, 흑천(黑川)이 남한강으로 각각 유입되며, 남한강 유역에 좁은 평지가 발달하였고 양수리 부근에는 범람원이 펼쳐져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북한강을 경계로 남양주와 인접하고 북쪽으로는 고동산, 화야산, 통방산, 중미산, 유명산, 어비산, 봉미산, 소리산, 갈기산이 이어져 가평, 홍천과의 경계를 이루며 동쪽으로는 금룡산, 금왕산이 횡성, 원주와의 경계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양자산, 고래산이 여주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두물머리는 금강산에서 흘러내린 북한강과 강원도 금대봉 기슭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 두 물이 합쳐지는 곳으로 한강의 시작되는 곳입니다. 두물머리 나루는 두머리 나루라고도 하는데,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이 머리를 맞댔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양수리 두물머리 마을에서 광주시 남종면 귀여리 귀실마을로 건너가던 나루터이자 남한강 수운의 하항(河港)이었습니다.

마을에 40가구 정도 거주하던 시절에 배가 30척 넘게 있었다고 하며, 주변의 산판에서 생산된 땔감과 마을에서 직접 생산한 무 등도 운반했습니다. 두물머리 나루는 바로 옆의 여울로 인해 물살이 세서 뗏목을 댈 수 없었으며 위치상으로도 그 여울만 지나면 팔당이었기 때문에 하항으로서 그리 유리한 입지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서너 채의 주막과 마방(馬房)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두물머리 일대가 남한강의 기항지인 동시에 육로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나루는 1990년대까지 운영되다가 현재는 완전히 중단되었습니다.

두물머리에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높이 26m의 도당나무로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자리를 지켜왔습니다. 원래는 두 그루의 나무가 나란히 서 있었으나 1972년 팔당댐이 완공되면서 나무 한 그루는 수몰되었습니다. 느티나무는 강이 잘 보이는 언덕에 그늘을 만들어 쉴 곳을 마련해주고 떼몰이 꾼이나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는 이들에게 표지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 아래서 배를 타는 이들의 안녕과 마을의 안정을 바라는 제사도 지냈는데 이를 도당제, 도당굿, 고창굿 등으로 불렀습니다. 도당제는 ‘제’와 ‘굿’이 함께 나타나는 유교식 제례와 무속신앙이 한데 어우러진 ‘마을 대동제’로 과거에는 2년에 한 번씩 무당과 화랭이들이 도당굿을 벌였으나 을축대홍수(1925년)로 마을이 크게 훼손되자 이후로는 굿은 사라지고 제만 유지되어 왔다고 합니다.

양평은 3국의 세력이 충돌할 무렵인 5세기 말엽부터 고구려의 영토로 양근현(楊根縣)이라 하다가 551년(진흥왕 12)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삼국통일 뒤 경덕왕 때 빈양현(濱陽縣)이 되었고 고려 때인 940년(태조 23) 양근현으로 이름이 환원되었습니다. 1269년(원종 10) 익화현(益和縣), 1356년(공민왕 5) 양근군이 되었고, 지평현(砥平縣)에는 1391년(공양왕 3) 채철장(採鐵場)을 설치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별다른 변동은 없었으나 1908년에 양근군과 지평군을 합쳐 양평군이라 하였고 1963년 여주군 개군면이 편입되었으며, 1973년에도 일부의 행정구역이 조정되었고 1979년에 양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조선 중종 때에 창건된 양근향교Ⓒ양평군


양근과 지평에 읍치구역
양평은 양근과 지평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양근군은 고구려 때 항양군, 신라 때 빈양, 고려 때 양근, 익화, 영화로 그 이름이 바뀌다가 고려 공민왕 5년에 군으로 부활되면서 양근군으로 1356년에 개칭되었습니다. 지평군은 고구려 때 지현현, 신라 때 지평, 조선 때 지제, 1895년에 지평군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양근향교는 중종 때에 창건되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 등이 있습니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2현, 동국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가을에 석전만 봉행하고 있습니다.

지평향교는 1773년(영조 49)에 창건되었으며 그 밖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등이며, 대성전에는 5성, 송조2현, 동국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 가을에 석전만 봉행하고 있습니다.

양평에는 운계서원과 수곡서원이 남아 있습니다.

운계서원은 1594년(선조 27)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욱과 조성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54년(효종 5)에 건립하였으며, 1713년(숙종 39)에 ‘雲谿’라고 사액되었습니다. 1714년에 신변, 조형생, 조문형을 추가 배향하였고,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서원 터에 매안(埋安)하고 향사만 지낸 뒤 1932년에 복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조욱은 19세 때 생진 양과에 급제하여 순릉, 영릉 등의 참봉을 지냈고 후반에는 벼슬을 버리고 용문산에 은거하면서 경지를 가르쳐 많은 학자가 모여 들어 용문선생이라 칭하였다 합니다. 재실과 묘우뿐이며 없어져버린 담장은 최근에 복원하였습니다. 유물로는 재실에 ‘雲溪書院院重建事實記’라는 현판이 보관되어 있는데, 말미에는 ‘壬午陽月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곡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화를 당한 대사헌 권경우와 현감을 지낸 권경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1874년(고종 11) 건립하였습니다. 1922년부터 1930년에 걸쳐 공사를 하였고, 의친왕 이강이 친필 현판을 내렸습니다. 경내 건물은 사우, 신문, 동서협문, 강당 등이 있고, 향교건물의 배치와 같게 전학후묘형으로 건물을 세웠습니다. 사우에서는 매년 중정일(中丁日)에 권씨 문중이 주관해 제향을 올립니다. 서원에 딸린 재산은 전답 3천 평과 임야 15정보가 있습니다.


▲택승정은 조선초기 학자이며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양성지가 창건했다.Ⓒ양평군


남원 양씨들의 정자
양평에는 남원 양씨들의 정자가 남아 있습니다.

택승정은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양성지가 창건한 후 그의 후예인 남원 양씨들이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양성한 곳이라고 하여 ‘사정(射亭)’이라고도 부릅니다. 지금의 정자는 1830년(순조 30) 양씨 선조들이 본래 있던 활터에다 다시 지은 정자로서 1840년(헌종 6) 양주태가 현액 하였는데 택승(澤升)은 ‘못가에서 활을 익히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며 예절을 지켜 정자를 오르내리는 것은 군자의 도리’라는 뜻입니다. 정자 앞에는 양응함과 양헌수의 신도비가 있습니다.

봉황정은 1624년(인조 2) 남원 양씨 양응청과 그의 사촌인 양응함이 건립했으며 1791년(정조 14)에 후손들이 중건하였으나 1850년(철종 1) 소실된 후 1967년에 남원 양씨 종중에서 옛 규모대로 복원하였습니다. 달리 구성대, 남휘정이라고도 부르는데 ‘구성(九成)’이란 태평성대를 아홉 번 이루니 봉황이 와서 춤추는 형상을 말하고 ‘남휘(覽輝)’란 봉황이 천리 길을 날아가다 덕이 빛나는 것을 보고 내려 앉았다는 뜻입니다.

신원리산성과 함공성
한강유역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산성들 중에서 비교적 성곽이 잘 보존된 것은 정선의 송계리산성과 고성산성, 영월의 정양산성, 단양의 온달산성과 적성산성, 제천의 망월산성, 충주의 충주산성과 장미산성, 여주의 파사성, 양평의 함공성과 신원리산성(부용산성) 등입니다.

신원리산성은 퇴뫼식 석축산성으로 성벽은 외벽만 쌓고 내벽은 흙으로 채웠습니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됐으며 노출된 성벽 높이를 볼 때 대략 4m 전후로 보입니다. 성벽 아래는 큰 장대석을 깔고 다듬은 돌로 정연하게 쌓은 반면 윗부분은 자연석으로 허술하게 쌓았습니다. 성벽 전체둘레는 약 550m로 동서가 긴 타원형을 이뤘고 산성내부는 동쪽이 서쪽보다 높습니다. 특이한 것은 서쪽으로 30m 정도의 내성 같은 성벽이 구축돼 있는데 건물축대로 추정됩니다. 서쪽에도 문지의 흔적이 있으며, 축조법이나 유물을 볼 때 신라 때 쌓은 것으로 보입니다. 산성 끝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양수리 두물머리가 한눈에 조망되는데 이 산성이 수로를 이용해 접근하는 세력을 한눈에 감시하는 군사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함공성은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양근성, 함왕산성, 함씨대왕성이라 달리 부르기도 하는데 ‘함공’ 또는 ‘함왕’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서 오래 세거한 양근 함씨와 관련이 깊습니다. <증동국여지승람>에 양근의 토착 성씨 중 ‘함’씨가 기록되어 있고 사나사에 함씨각이 있으며 사나사 입구에 함왕 주악이 탄생했다는 함왕혈이 있습니다. 산성은 1,031m의 봉우리에서 사나사가 있는 계곡을 포곡식으로 쌓았으며 석축의 성벽은 거의 무너졌으나 성안에서 장군 지휘소인 장대지를 비롯해 문지, 치성, 건물지, 우물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고려시대 기와도 상당수 출토되었습니다. 고려 후기 몽고군의 침입 때 부근의 주민들이 이곳에 피난하였으나 1253년(고종 40)에 포위공격을 당하자 방호별감 윤춘이 나와서 항복하였고 1291년(충렬왕 17) 합단(哈丹)에게 함락된 사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선말 의병항쟁과 위정척사의 사상적 기반이 된 화서학파를 이끈 이항로 생가Ⓒ양평군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닦은 이항로
양평에는 화서 이항로, 몽양 여운형의 역사적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화서 이항로는 양평에서 유학자들을 양성하면서 화서학파를 형성하여 한말 위정척사론과 의병항쟁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았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여말선초의 벽불론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정도전은 <불씨잡변>에서 불교를 배척하면서 불교를 ‘사(邪)’로 유교를 ‘정(正)’으로 보았으며, 퇴계는 <전습록논변>에서 양명학을 비판하면서 주자학을 ‘정’으로, 양명학을 ‘사’로 보았고 송시열이 윤휴를 배척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척화론도 청나라를 ‘사’로, 명나라를 ‘정’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18세기 천주교의 전래와 서양문물의 유입에 대한 정주학자들이 배척한 태도 역시 중화를 ‘정’으로, 서양을 ‘사’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정척사운동은 19세기 서양열강이 강압적으로 통상과 개국을 요구하자 유교적 전통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광범하게 전개되었으며 급기야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게 되었고, 병인양요와 병자수호조약을 지나면서 경향각지의 유학자들의 상소를 통하여 애국애족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항로의 문인으로는 김평묵, 유중교, 양헌수, 최익현, 유인석, 홍재학 등이 있고, 다시 이들의 문인으로는 경현수, 곽한일, 김경달, 박은식, 김구, 김덕윤, 남규진, 노응규, 박장호, 백삼규, 서상규, 서상렬, 신지수, 안승우, 안중근, 원용팔, 이강년, 이범직, 주용규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구국대열에 참여하여 순국하였거나 춘추대의를 지킨 사람들입니다.

이항로 생가는 그의 부친이 200여 년 전에 지은 집으로 정남향에 안채 15칸과 사랑채가 딸려 있으며, 안채에 ‘盧山精舍’라 쓰인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안채는 ㄱ자형의 평면이며, 중앙에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우측에 건넌방의 앞으로 반 칸 퇴로 연결하였고 건넌방의 우측에 헛간 1칸이 있으며 다시 그 우측에 1칸 반의 마루방이 있고 대청의 좌측에는 안방이 있습니다. 사랑채에 앉아보면 바로 앞에 용문산 북쪽에서 발원해 북한강으로 유입되는 수입천이 가로질러 흐르는데 이항로는 이 수입천 계곡의 승경지 9곳을 ‘벽계구곡’(蘗溪九曲)으로 불렀습니다. 벽계구곡은 외수입, 내수입, 정지터, 용소, 별소, 분설담, 석문, 속사천, 일주암입니다.

이항로는 서재 동쪽으로 뻗어 내린 편편한 석대를 넓혀 ‘薺月臺’라 새기고 그 동편에 명옥정을 세워 노천강당을 마련하여 여숙강규(閭塾講規)의 강학을 실시합니다. 바로 이 무렵 위정척사운동의 중심인물로 외래사조의 유입을 끝내 거부하고 대마도에서 순국한 의병장 최익현, 의병운동에 생애를 바친 김평묵과 유중교, 13도 의병대장 유인석과 춘천지방 의병장 유홍석, 외세 배척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려 처형당한 홍재학, 병인양요 때 강화 삼랑성에서 프랑스군을 섬멸시킨 양헌수 등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는데 그의 강학실은 곧 우국충절의 인물을 배출하는 진원지였습니다.

이항로의 생가 뒤에 묘소가 있고 묘소 앞에 사당인 노산사(盧山祠)가 있습니다. 노산사는 1954년에 지역유림들이 지은 선생의 사당으로, 사당 뒤 언덕에 오르면 이항로 생가와 벽계마을 그리고 벽계천 등이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신도비는 노산사 뒤에 있으며 이항로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문인이었던 최익현이 세웠고 비문 역시 최익현이 지었습니다.

이항로는 스승 없이 독학으로 학문의 경지를 이룬 인물로 자는 이술, 호는 화서, 시호는 문경입니다. 세 살 때 <천자문>을 떼고, 여섯 살 때 <십구사략>을 읽고 <천황지황변>을 떼었으며, 열두 살 때 신기령에게 <서전>을 배웠으니 그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발현되었습니다. 1808년(순조 8) 반시에 합격했으나 당시 권력층의 고관이 과거급제를 구실삼아 자기 아들과 가까이 지낼 것을 종용하자 이에 격분하여 다시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습니다. 30세에 이르자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는 젊은이들이 찾아들었으나, 그는 오히려 세속을 피하여 쌍계사, 고달사 등으로 옮겨 다니며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등 성리학 연구에 매진하였습니다.

그의 학덕이 조정에 알려져 1840년(헌종 6) 휘경원 참봉, 지방수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양평으로 낙향하여 학문을 연마하였습니다. 1864년(고종 1) 조두순의 천거로 장원서 별제, 이어 전라도사, 지평, 장령 등에 임명되었으나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로 모두 거절하다가,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동부승지의 벼슬을 받고 분연히 서울로 올라옵니다.

서울로 온 뒤 자신의 수의를 머리맡에 놓아두고 입궐하여 대원군에게 화친론을 배격하고 기필코 싸워 도성을 지킬 것을 강력히 상소합니다. 대원군은 이항로의 주전론을 국론으로 채택하고 이항로는 며칠 뒤 공조참판과 경연관에 임명됐으나, “나라의 정세가 혼란한 만큼 무리한 경복궁 중수공사를 중단하고, 백성의 재물 모으는 일을 금하라”는 등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만동묘의 재건을 건의합니다. 이항로는 결국 이 두 번의 상소로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서 관직을 박탈당하고 낙향합니다. 저서로는 <화서집>, <화동역사합편강목> 60권, <주자대전차의집보>, <벽계아언> 12권 등이 있습니다.

▲몽양 여운형 생가가 2011년 복원되었다.Ⓒ양평군


몽양 여운형의 삶과 정신을 담은 여운형생가기념관
여운형생가기념관은 몽양 여운형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고자 2011년 생가를 복원, 전시관과 함께 개관하였습니다. 함양 여씨가 양평에 입향한 1715년(숙종 41) 지어진 생가는 여운형이 출생한 곳으로, 부친 탈상 후 서울로 이사한 1908년까지 살았으며, 해방 전후에도 종종 내려와 지낸 곳입니다. 1930년대 이후 여운형이 살았던 서울 계동 집에 있던 가구들을 후손이 기증하여 복원된 생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유품 및 관련 자료 250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으며 특히 여운형이 피격당할 당시 입고 있던 옷을 위탁 보관하고 있습니다.

여운형은 양평 출신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입니다.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에서 수학하였습니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의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1907년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였고 개신교에 입교하여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에 평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당시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를 다녔습니다. 1917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해고려민친목회와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주도하였고 1919년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하였습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였습니다. 1925년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출옥하였습니다.

1944년 8월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고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를 결성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소되고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의 부주석이 되어 김구, 이승만, 안재홍, 송진우 등과 만나 국가건설 방안 등을 협의하였습니다. 11월에 건국동맹을 모태로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여 당수직을 맡았으며, 미군정 장관의 고문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19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과 김일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고 좌파 세력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고, 9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11월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남조선노동당과 연합을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은퇴를 선언하였습니다.

1947년 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하여 5월에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을 맡아 김규식, 김창숙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여 차례 테러를 당했습니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습니다.

이덕형, 정창손, 강맹경의 묘역
양평에는 이덕형, 정창손, 강맹경의 묘역이 있습니다.

한음 이덕형의 묘는 부인 한산 이씨와 합장묘로 화강암 석재를 이용하여 봉분 아랫부분에 둘레석을 둘렀고 묘 앞에는 묘비, 상석, 향로석과 좌우에는 망주석이 있으며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동자상과 문인석이 1쌍씩 있습니다. 신도비는 묘역 아래에 있는데, 1653년(효종 4)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조경이 찬했으며, 글씨는 오시수가 쓰고, 전자는 정규상이 썼습니다.

이덕형의 자는 명보, 호는 한음, 시호는 문익공입니다. 1580년(선조 13)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문학에 통달하여 어린 나이로 봉래 양사언과 막역한 사이였습니다. 1592년(선조 25) 예조참판과 대제학을 겸임하며,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패수까지 쳐 올라와 화의를 청하니 선생은 단독으로 적진에 들어가 대의로써 그들을 공박하였고, 정유재란 시 좌찬성에 올랐고 좌의정, 도체찰사, 영의정이 되었으며, 호성선무공신호를 받았습니다. 한때 영중추부사로 한직에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반대하다 사직, 양근에 내려와 국사의 그릇됨을 상소하며 세월을 보내다 53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창손의 묘역은 처음 광주 방제동에 있었는데 그가 죽은 후 1504년(연산군 10) 폐비 윤씨사건에 연루되어 묘지와 신도비, 석물 등이 모두 파손되었다가 1506년(중종 원년) 죄가 풀려 묘역을 개장하고 석물을 다시 세웠으며 신도비는 1623년(인조 원년)에 다시 세웠습니다. 원래는 부인의 묘역과 따로 떨어져 있었으나 1970년 도시계획으로 이장하면서 합장해 놓았습니다. 묘비는 1506년(중종 원년)에 제작한 것이고 부인의 묘비는 1456년(세조 2)∼1487년(성종 17)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측됩니다. 원래 이 신도비는 1489년(성종 19) 서거정이 글을 지어 세웠으나 후에 파손되어 한준겸이 글을 덧붙여 다시 비문을 써서 복원하였습니다.

정창손은 1426년(세종 8) 문과에 급제하여, 세조 때부터 성종에 이르는 15년간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고 좌익공신, 익재공신, 좌리공신 등 여러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중종 때에는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고려사>, <세종실록> 등 각종 편찬사업에 참여하였습니다.

강맹경의 묘역은 아들 강윤범의 묘와 위 아래로 위치하고 있으며 장대석으로 상, 하 2단의 계절을 쌓았으며, 계절에는 봉분과 묘비, 상석을 두고 배계절의 중앙에 장명등, 좌우에 문인석을 배열하였습니다. 오른쪽 문인석 바로 뒤에는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신숙주가 글을 짓고 강희안이 글씨와 전액을 써서 1462년(세조 8)에 건립된 것입니다.

강맹경의 자는 자장으로, 1429년(세종 11)에 문과에 급제하여 황희 아래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문종 연간에 도승지, 단종 때에 이조참판을 거쳐 계유정난에서 세조의 집권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 2등에 올라 진산부원군에 봉해진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459년 영의정에 이르렀습니다.

▲중앙선의 간이역이었다가 2012년 폐역된 구둔역Ⓒ양평군


지평양조장과 구둔역
양평에는 지평양조장, 구둔역 등 근대문화유산도 남아 있습니다.

지평양조장은 1925년 설립되어, 현재까지 3대째 전통기법으로 막걸리를 제조하고 있습니다. 진천 덕산양조장보다 앞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입니다. 양조장은 2층 목조건축물로서 2층에는 환기를 위한 높은 창을 내고, 보온을 위해 왕겨를 채워 넣은 구조로 현재까지 운영자의 원형 보존 노력으로 건물의 역사성을 이어오고 있는 우리나라의 소중한 역사문화자원입니다. 또한 1951년 2월 지평리에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3일 동안 방어한 지평리 전투 당시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UN군 프랑스대대 지휘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구둔역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역사(驛舍)로, 대합실 부분과 사무실의 구내 쪽 돌출부는 박공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구내 쪽으로는 개찰구와 사무실 출입문 부분에 차양지붕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건물 내부의 주요 구조재는 건축 당시의 것 그대로 남아있으며, 근대기의 역사와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1940년 4월 1일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한 중앙선의 간이역으로 청량리-원주간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기존 노선이 변경되어 2012년 8월 16일 폐역 되었습니다.

용문산 주봉 백운봉 기슭에 자리잡은 사나사
사나사는 용문산의 주봉인 백운봉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923년(태조 6) 고려 태조의 국정을 자문한 대경국사 여엄이 제자 융천과 함께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봉은사본말사지>에 의하면 창건 당시 비로자나불상과 오층석탑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1367년(공민왕 16) 태고보우가 140여 칸 규모로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고 1698년 덕조가 다시 지었으며, 1907년 의병과 관군의 싸움으로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대적광전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원증국사석종, 원증국사석종비가 있고, 오른쪽에는 석조미륵여래입상이 있으며 절에 들어오는 길목에는 수도산 봉은사의 일주문이 옮겨 세워져 있습니다.

▲용문산 기슭에 자리잡은 고려초 사찰 사나사Ⓒ양평군


양근군 대원리서 태어나 왕사와 국사를 지낸 원증국사 태고보우의 석종부도는 표면엔 아무 조각도 없이 평이하고 부도 정상에만 화염문을 조각한 낮은 보주가 얹혀 있습니다. 비문은 뒷날 <불씨잡변>을 지어 불교를 비판했던 정도전이 글을 짓고 의문(誼聞)이 글씨를 써 1386년(우왕 12)에 세웠습니다. 태고보우는 13세에 양주 회암사 광지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삼각산 중흥사 동쪽에 태고사를 짓고 수도하였으며, 1346년(충목왕 2) 원나라에 들어가 청공(淸珙)의 법을 받고 임제종의 제19대 법손이 되었습니다. 2년 뒤 귀국하여 용문산 북쪽 기슭 소설암에 머물면서 국사, 왕사가 됐고, 1382년 이곳에서 입적하였습니다.

사찰 아래에 함왕혈이 있고, 사찰에는 함씨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나사는 아마도 함규 장군의 원찰이 아니었을까 봅니다. 게다가 함규 장군이 고려의 개국공신이었고, 사나사가 개국 초기인 923년(태조 6)에 창건됐으니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호족세력인 함규 장군은 견훤과 궁예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경계지역인 함왕성의 성주였는데, 실리와 때를 기다려 왕건에게 귀의합니다. 바로 이들 함씨 세력이 웅거하던 곳이 함공성, 또는 함씨대왕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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