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공간인가? 강남은 우리 사회의 모든 욕망들이 집적된 공간이다. 많은 성형외과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하고 부동산투기가 판을 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욕망이 들끓는 곳이다. 이러한 강남, 그 중심인 강남역사거리 철탑에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한 노동자가 올라가 있다.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진실, 욕망에 가려진 진실이 하늘에 우뚝 기념비처럼 솟아 있다.
철탑에 오른 김용희 씨와 그 철탑 아래서 함께 공조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삼성중공업해고노동자 이재용 씨는 삼성 안에서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다가 자본과 국가로부터 온갖 폭력을 당하고 24년 넘게 삼성과 정부와 싸우고 있다. 그 투쟁이 철탑에 오르는 순간 우리 사회에 전면적으로 드러난 불편한 진실들은 무엇일까?
한국인권신문이 주관하는 대한민국 인권대상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선정되어 논란이 일어났다. 이재용 부회장이 인권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10만 명이 넘는 임직원을 고용하여 일자리 창출에 기여하였고 최근 삼성 계열사로는 최초로 삼성전자 노동조합 결성을 뒷받침한 점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한국인권신문 측이 이재용 부회장의 인권대상을 취소하긴 하였으나 후보에 올랐다는 점 자체가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삼성 반도체 백혈병 문제만 해도 11년의 투쟁 끝에 작년에 겨우 보상 문제가 봉합되었으며 삼성 미래전략실 임원들이 노조와해 혐의로 실형을 받았고 강남역의 두 해고노동자도 200일 넘게 고공농성 중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대상을 둘러싼 이 문제를 코미디로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는 인권을 좋은 개념으로만 이해한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을 비판한다면 그는 차별주의자로 치부된다. 여러 운동단체들도 인권의 개념을 빌려 운동을 전개한다. 노동운동 진영은 노동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노동자들의 권익 실현에 힘쓴다. 이렇게 본다면 인권은 굉장히 진보적인 개념으로 느껴질 것이다. 모두가 태어나면서 존엄하고 평등한 권리를 타고난다는 것은 차별과 억압이 난무하는 이 사회에서 가슴을 흔드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에서 인권의 이중성에 대해서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먼저 시민사회와 국가를 구분하여 말하였다. 시민사회는 인간의 사회경제적 삶의 터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작동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는 시민사회의 기반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권리는 다름 아닌 사적 소유의 권리라고 말한다. 그는 1793년 프랑스 헌법 제16조를 언급하며 이 권리는 “타인과의 관계는 일체 단절한 가운데 사회와도 무관하게 자신이 재산을 마음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즉 자기만의 이용 권리”라고 말하였다. 반면에 국가는 정치사회이며 국민들이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즉 국민은 정치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며 권력을 공유하는 공동존재이다. 이 둘이 만나면 어느 쪽이 우세할까? 마르크스는 결국 이기적인 시민사회가 현실을 지배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보편적인 인권이란 자본가의 인권일 뿐이라고 마르크스는 비판한다.
이 오래된 텍스트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의미는 아직도 유효하다.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다. 하지만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의 해고노동자 김용희·이재용 씨는 과연 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가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이재용 부회장은 많은 부와 그 부를 만들어내는 생산수단을 거머쥐고 있고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이재용 씨는 자신의 생존조차 위협받는 노동자이다. 그렇기에 이재용 부회장은 마음만 먹으면 그 두 노동자의 인권을 제한하고 통제할 수 있다. 헌법에 보장된 노조할 권리를 삼성이 무참히 짓밟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사회는 겉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인권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헌법에 이를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사적 소유에 기반한 착취관계이며 이를 통해 부를 쌓은 자본가 계급이 민중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강남역사거리 두 노동자의 농성은 우리 사회가 은폐하고 있는 이와 같은 기만성을 우뚝 솟은 철탑 위로 드러내고 있다.
이는 또한 우리 사회에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2019년에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넘은 우리 사회에 계급투쟁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콧방귀를 뀔 것이다. 더군다나 강남이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계급투쟁을 만나기란 힘들다. 그렇기에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지우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힘든 이유와 그 해결책을 계급에서 찾지 않고 다른 곳에서 찾는다. 누구는 세대에서 찾기도 하고, 누구는 개인에게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이 더 이상 계급이란 없다며 한 물 간 개념으로 취급하지만 김용희·이재용 씨의 24년이 넘는 끊임없는 삼성과의 싸움은 계급을 말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노조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해고와 구속을 당했으며 성폭행 조작에 간첩혐의, 납치, 테러, 가정파괴까지 당했다. 삼성은 왜 이렇게까지 노조활동을 방해하고 금지하는가? 무엇이 두렵기에 노동조합을 거부하는가? 단지 이병철 회장의 유훈 때문인가?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노동자가 어떤 식으로 착취를 당하는지, 그리고 자본가가 어떻게 잉여가치를 가져가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착취는 노동에 대한 등가교환이라는 것으로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받는 임금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노동력에 대한 대가임을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분석하였다. 노동력에 대한 대가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재생산하는 비용을 의미한다. 즉 노동자가 내일 다시 일을 하러 나올 수 있도록 하는 비용을 자본가가 지불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자본가는 이 비용을 노동자가 생존할 수 있을 정도만 준다. 그것이 임금의 본래적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가 만들어낸 가치 중에서 임금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잉여가치를 자본가는 아무 것도 기여한 바가 없음에도 가져가버린다. 이러한 상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은폐되어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삶이 피폐해지고 힘들어짐에 따라 자생적으로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자본가와 맞서게 되고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 노동조합이 임금투쟁을 해서 임금이 오르게 되면 자본가가 가져가는 잉여가치의 몫이 줄어들게 된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는 자연스럽게 대립하게 된다. 이러한 대립이 계급적 대립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임금노동자들은 임금을 더 높이기 위해서 더욱 단결하여 자본가에 맞설 것이다. 반대로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지키기 위해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분쇄하고 파괴하려고 들 것이다. 삼성에 대한 김용희·이재용 씨의 투쟁도 이러한 지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고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삼성이라는 기업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질 경우에 자본가 자신들은 이윤추구를 극도로 넓히기에 한계가 발생한다. 그렇기에 김용희·이재용 씨를 인격적으로까지 말살하면서 노조와해에 앞장섰던 것이다. 사람들은 삼성에 노조가 없는 이유를 노동자들에게 그만큼 대가를 충분히 지불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용희·이재용 씨가 24년 넘게 싸워오고 있고 현재 강남역사거리 철탑에 올라 있다는 것은 이 같은 계급적 대립, 계급투쟁이 은폐되어 있을 뿐 우리 주변에 그리고 사람들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는 삼성이라는 기업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사태를 그냥 지켜만 보는 문재인 정부는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김용희 씨는 2018년 2월 26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을 올렸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청와대는 답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철탑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아마도 문재인 대통령과 많은 관료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인지하고 있을 것이며 보고까지 받을 것이다. 하지만 김용희 씨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김용희 씨가 말라 죽어가거나 스스로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국가는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며 정의를 실현하는 중립적인 기구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일례로 사람들은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이게 나라냐?’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사람들은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제대로 된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부를 구성하면 정의로운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러한 열망을 잘 잡아낸 민주당은 선거에서 ‘정의로운 대한민국’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국가를 중립적인 기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계급지배와 함께 국가가 탄생하였고 국가란 계급지배의 수단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노동자 계급의 힘이 세다면 국가는 노동자들의 입장에 서는 모양새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정으로 노동자들의 편에서 자본을 통제하진 않는다. 촛불이라는 민중의 항쟁을 거친 후라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도 노동자들의 눈치를 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최저임금 1만원이나 ILO 협약 비준, 전교조 합법화 같은 공약을 내걸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광장에서 흩어지자 이러한 공약들은 모두 무효가 되었다. 최저임금 1만 원은 아직도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전교조도 아직 법외노조에 놓여있다. 마찬가지로 ILO 협약 비준을 노동개악의 트로이목마로 활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삼성이라는 거대재벌과 김용희·이재용이라는 노동자와의 싸움에서 문재인 정부가 삼성의 편을 드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 이는 곧 침묵으로 나타났다. 25년간의 싸움에서는 오히려 국가가 폭력을 저질렀다. 아직도 문재인 정부는 강남역사거리의 두 노동자를 향해 이에 대한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있다.
한때, 조국사태로 강남좌파라는 말이 다시 급부상한 적이 있다. 이들은 586운동권에 속하기에 여러 정치적 사안에서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강남이라는 좋은 동네에 사는 엘리트집단을 의미한다. 조국사태가 터졌을 때 이들 강남좌파들 대다수는 조국을 옹호하는 집회에 참가하거나 문재인정부를 지지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이들 눈에는 문재인정부가 집권해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보다 정의로워졌으며 보다 밝은 미래가 펼쳐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들이 생활의 공간인 강남이라는 동네에서, 직장에 출근하고 여러 볼일을 보면서 지나쳤을 강남역사거리 철탑에 대해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기만적이다. 이는 계급 그리고 국가의 문제에 대해 잘못된 인식에서 기인한다. 국가를 중립적으로 보는 사람은 보다 정의로운 사람이 집권하게 되면 정의로운 국가가 될 거라고 착각할 것이다. 하지만 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이 집권한 문재인정부가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 영남대의료원 고공농성, 그리고 강남역사거리 철탑고공농성 등을 외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박근혜 정부보다 더 정의로운지는 의문이다.
2011년 한진중공업에서 홀로 크레인 위에 올라 고공농성을 펼친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지도위원은 영남대의료원에서 지금도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박문진 지도위원을 만나기 위해 얼마 전 부산에서 대구까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한 장면처럼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늘 높은 곳에서 다시 만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다른 무엇보다도 아픈 몸을 이끌고 운동을 만들어내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우리도 김용희 씨, 그리고 그 철탑 바로 아래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재용 씨를 더 이상 외면해서는 안 된다. 강남역사거리 철탑이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불편한 진실은 더욱 말해져야 하고 드러나야 하고 폭로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더 이상 눈감지 말고 직시하고 말해야 한다. 한 번도 만나서 이야기해보지 못했지만 김용희 씨와 이재용 씨가 바라는 것은 단순한 동정심에서 우러나온 관심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삼성과 같은 독점재벌을 굴복시키며 국가가 더 이상 이들을 기만하지 못하도록 노동자들이 함께 투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할 때 희망버스를 타고 온 김여진 씨가 남긴 쪽지를 바탕으로 한 유명한 구호로 글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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