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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침략 유적지에서 '좀비들의 침략'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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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침략 유적지에서 '좀비들의 침략'을 생각하다

[손호철의 포르투갈 여행기] 13. 파로 : 무어의 흔적을 찾아서

파로(Faro)로 향하기 전, 들를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알부페이라의 근교에 있는 파데르네(Paderne) 성을 돌아보기로 했다. 산 위에 세워진 이 성은 이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로마군이 로마로 가는 길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을 아랍이 이 지역을 점령하며 대폭 강화하여 강력한 방어시설로 구축했다. 12세기 포르투갈이 무어를 몰아낼 당시에도 이 성은 다른 지역과 달리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1189년 포르투갈 군이 영국 기독교 용병들의 도움을 받아 연이은 야간 공격으로 성을 함락했지만, 2년 뒤 아랍이 반격을 해 다시 이를 차지했다. 1248년 알폰소 3세의 군이 이 성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특히 이 성은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기가 걸린 최초의 성이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그때 알폰소 군은 성안에 사는 무어들을 모두 학살했고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 자리에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 무어의 군사 요충지였던 알부페이라 근교의 페데르네성. ⓒ 손호철

성으로 가는 길은 장난이 아니었다. 비포장도로로 길이 엉망이었다. 차가 4륜구동이 아니라 갈 수 있나 걱정이 앞섰다. 근 40도 정도의 가파른 내리막길에 여기저기 땅이 파여 차의 밑바닥이 흙 위에 걸려 운행이 어려울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운전을 한 최풍만 동지의 탁월한 운전 실력으로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산 위에 성벽들이 보였다. 헌데 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잠겨 있었다. 오지라 사람들이 오지 않으니 아예 폐쇄한 것인지, 사방을 둘러봤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떻게 고생을 하고 온 곳인데, 들어갈 수가 없다니!

어디서 덜덜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 우리가 왔던 길을 사륜구동 오프 트랙 자동차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헬멧을 쓴 운전자들이 우리를 보고, 차를 한번 보고는, "저런 차를 타고 여기를 왔느냐"고 놀라워했다. 오프 트랙 자동차나 다닐만한 길을 우리가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온 길이 엄청나게 경사진 길이라 내려는 왔지만 올라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돌아가기로 했다. 길은 경사는 별로 없었지만 너무 파여서 장난이 아니었다. 결국 내려서 걷고 차가 못 가는 곳은 밀고해서 한 시간 동안 생고생을 하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평생 자동차로 간 길 중 가장 난감한 길이었다.

▲ 페데르네성 앞에 나타난 오프트랙 자동차 동호회 ⓒ 손호철

▲ 비포장에 엉망인 도로를 간단히 빠져나왔다. ⓒ 손호철

"나 알폰소는 포르투갈 하느님왕의 영광으로 너희 파로 민중들에게 교역허가증을 부여하며 리스본시의 사용과 소비를 선물한다. -왕 알폰소 3세의 연보에서- 1266년"

"알폰소 3세가 무어인들에게 교역허가증을 주다. 1269년"

남포르투갈의 또 다른 대도시인 파로에 도착해 역사지구에 들어서자 나를 맞은 것은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했던 무어의 흔적이다. 포르투갈도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아랍, 즉 무어인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알람브라궁전처럼 아랍의 유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이 없다. 포르투갈의 구석구석을 보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 곳은 신트라의 무어의 성, 그리고 이곳 파로이다.

▲ 무어가 건설했던 파로의 성곽. ⓒ 손호철

파로가 아랍의 거점이었던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를 바로 마주 보고 있으니 그럴 만하다. 파로 역사지구에서 제일 먼저 나를 맞이한 것은 푸른 바다에 접하여 세워진 긴 성벽이다. 나중에 개보수를 했지만 무어가 건설한 성이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작은 아치형 문이 나온다. 무어인들이 드나들던 문이라는 해설이 붙어있다.

그 앞에 커다란 타일이 보인다. 받침대는 오래된 돌로 '요새의 허가, 1266년'이라고 검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하얀 타일에 푸른색으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왕좌에 앉은 왕이 무장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는 그림이다. 그림 안에 설명이 쓰여 있어 읽어보니, "나 알폰소는 포르투갈 하느님왕의 영광으로 너희 파로 민중들에게 교역허가증을 부여하며 리스본시의 사용과 소비를 선물한다. - 왕 알폰소 3세의 연보에서 1266년"이라는 내용이었다.

다른 하나는 돌에 '무어인에게 교역허가증, 1229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똑같이 하얀 타일에 "알폰소 3세가 무어족에게 교역허가증을 주다"라고 쓰여 있고 교역을 하기 위한 많은 물건들이 양쪽에 쌓여있는 가운데 포르투갈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무어인에게 허가증을 전달하는 그림이 푸른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 1248년 알폰소 3세가 파로를 탈환한 뒤 무어와의 교역을 허가한 것을 형상화한 기념물 ⓒ 손호철

무어인들의 지배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무어인들을 쫓아낸 뒤 알폰소 3세가 무어들에게 교역, 거주 등 일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을 그려놓은 것이다. 우리는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에서 이베리아반도를 지배한 아랍과 무어에 대해 내심 우호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알람브라의 궁전과 같은 그들이 남겨놓은 문화유산에 열광하고 이후 이를 파괴한 포르투갈이나 스페인의 백인들에 대해 분개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랍과 무어의 이베리아 반도 지배는 서구 제국주의와 다름없는 다른 나라, 다른 민족에 대한 침략 행위였다. 따라서 이를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모든 침략은 비판받아야 한다.

성안으로 들어가자 동상이 나타났다. 이곳을 아랍으로부터 탈환한 알폰소 3세가 끝에 십자가가 달린 막대기를 들고 있는 동상이다. 그 옆에는 흰 벽에 석회로 큰 십자가를 만들어 놓고 그 밑에 긴 벤치가 양쪽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림이 좋을 것 같아 같이 간 두 일행에게 "한쪽에 한 명 씩 앉아 달라"고 부탁해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종교전쟁의 흔적들이라 기분이 착잡했다.

▲ 파로 등 이 지역을 무어로부터 탈활한 알폰소 3세의 동상 ⓒ 손호철

▲ 알폰소 3세의 파로 탈환을 기념한 벤치. 두 동행자가 모델역을 해줬다. ⓒ 손호철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식사이니만큼 잘 먹고 싶었다. 헌데 찾아간 맛집이 내부 수리 중이었다. 할 수 없이 성안을 돌아다니다가 중심부 광장의 한 식당에 들어갔다. 야외 식당에 앉아 메뉴를 놓고 연구를 하다가 거금을 낼 각오를 하고 비싼 해산물 모듬 찜을 시켰다. 시원한 화이트와인을 즐기고 있는데 종업원이 음식을 가지고 나왔다. 새우 바지락 등 해산물이 가득한 커다란 뚝배기는 시각적으로 보는 이를 압도했다. 새우, 바지락, 감자 등을 덜어내자 커다란 문어가 나타났다. 주머니의 지출은 조금 있었지만 남포르투갈의 바다에 어울리는 기가 막힌 식사였다. 맛집이 문을 닫은 것이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았다.

▲ 포르투갈에서의 마지막 식사는 멋진 야외식당에서 해물종합요리로 즐겼다. ⓒ 손호철

식사 후 파로 박물관을 찾았다. 특별히 볼 것은 마땅치 않았다. 헌데 기가 막힌 것이 옥상이었다. 옥상에 올라가자 오른쪽으로 파로 시내의 하얀 집들이 이어지고 왼쪽으로는 북아프리카 바다가 펼쳐지고 있다. 가까이에는 붉은 지붕의 흰 집들이 있고 가까운 바다에는 많은 보트들이 정박되어 있었다, 특히 옥상의 풍경에서 눈에 뜨이는 것은 성당의 종이었다. 종은 위아래로 두 개를 매달았는데 멋진 나무 장식까지 더해져 그 사이로 보는 시내의 모습이 너무 좋아 내려오기가 싫었다.

▲ 파로 성당 ⓒ 손호철

▲ 성당 옥상에서 내려다본 파로 ⓒ 손호철

▲ 종각을 통해서 본 파로의 풍경 ⓒ 손호철

포르투갈은 유럽의 주변부인데다가 남부 포르투갈은 포르투갈 내에서도 발전하지 않은 곳이라 부동산 가격이 상대적으로 싸다. 따라서 독일, 미국 등의 부호들의 새로운 투자처나 별장으로 남부포르투갈이 급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만큼 사방에는 아파트, 빌라, 별장 등 부동산 분양 안내판이 넘쳐난다. 로스앤젤레스에 한인 상공인으로 크게 성공한 아저씨뻘 되는 친척이 있다. 지난해 쿠바 혁명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을 같이할 정도로 진보적인 '강남 좌파', 아니 정확히 이야기해 로스앤젤레스의 부자 동네인 비버리힐스의 자유주의자인 '비버리힐스 리버럴'인데, 남부 포르투갈을 간다고 하니까, 그가 대번에 보인 반응은 "거기 땅 좀 사놔야 하는데" 하는 것이었다.

리스본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포르투갈 유일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눈먼 자들의 도시>의 저자인 주제 사라마구는 1990년대 이후 지구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보여 왔다. 그의 우려대로, 지구화는 '자본의 지구화'로 미국과 독일의 자본이 유럽의 '주변부의 주변부'인 남부 포르투갈을 집어삼키고 있는 것이다. 문득 경제 위기로 국가 부도에 처했던 그리스를 갔을 때, 아름다운 그리스의 휴양지들을 사들이던 독일의 자본과 부자들 생각이 났다. 유럽연합과 유로화는 독일 자본의 유럽 지배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리스본에 쓰여 있던 한 주민의 분노처럼 남부 포르투갈에도 관광객이라는 '좀비들의 침공'만 빈번해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남포르투갈 해변의 아파트 분양광고. 지구화와 포르투갈의 유럽연합 가입에 따라 유럽의 주변부인 포르투갈에서도 주변부인 남포르투갈은 미국과 독일 부호들의 부동산 투자지가 되고 있다. ⓒ 손호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차를 달리고 있자니, 갑자기 다리가 나타나고 그 앞에 고속도로 안내판이 보였다. 왼쪽에는 '리스보아', 즉 리스본이라고 쓰여 있고 오른쪽은 '스페인'이라 쓰여 있었다. 다리로 올라가 다리를 건너면, 스페인의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이다. 이제 피카소의 고향인 말라가로 향해야 한다. 오른쪽 길로 들어서 다리로 올라가며 나는 포르투갈과 작별 인사를 했다. 포르투갈어로 '안녕'이 뭐지? 아 '차오(Tchau)'지.

"차오! 포르투갈"

▲ 차오! 포르투갈. 이 다리를 건너면 스페인이다. ⓒ 손호철

후기

이번 여행은 포르투갈, 그리고 피카소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그의 흔적을 찾아 스페인과 프랑스를 도는 한 달간의 일정이었다.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여행 벗인 최풍만 동지는 전 일정을 같이 했고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돌 때 뛰어난 실력으로 차를 운전해줬다.

심지연 경남대 명예교수도 포르투갈과 (바르셀로나를 뺀) 스페인 일정을 같이 했다. 그는 대학교 2년 선배이자 운동권 선배로,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을 때 대형조직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작은' 사건과 연루된 내 이름을 분 죄로 지금까지 나에게 '시달리고(?)' 있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 이 자리를 빌려 같이한 여정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 무어인들이 드나들던 성문 ⓒ 손호철

▲ 여기에도 WASP 낙서가 눈에 띈다. ⓒ 손호철

▲ 멋진 벽화 ⓒ 손호철

▲ 벽도 예술이 될 수 있다. ⓒ 손호철

▲ 한 식당앞에는 멋진 프랑스식 호객꾼이 그려져 있다. ⓒ 손호철

▲ 무어가 쌓았던 돌벽 위에 북아프리카에서 날아왔을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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