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7일 5시 47분.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 도착했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에 대한 수정안이 본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제적 295인 중 167인이 재석했고, 찬성 156인, 반대 10인, 기권 1인이었다. 정치개혁을 위해 연대한 4+1 협의체와 시민사회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반발과 저항도 거세었고, 협상 과정도 지난했다. 정말로 어렵게 얻어 낸 역사적 성취였다. 하지만 마냥 기쁠 수 없었다.
본회의 협상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개혁 취지가 많이 퇴색되었기 때문이고, 개혁안이라고 보기에 한참을 부족한 법안을 두고, 국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제1야당의 행태가 소스라치게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진정 개혁안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의 개혁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어려운 길을 가야만 한다는 말인가 싶어서 마음이 무거웠다. 구체적으로 짚어보겠지만, 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온갖 풍파를 넘어 통과된 개혁안의 내용 그 자체로는 개혁성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기득권 양당의 본심이 드러난 본회의 협상 과정
화근은 의원정수 확대 없이 연동형 방식을 도입하려 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연동형 방식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비례의석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의원정수 확대에 선을 그었다. 현역 의원의 이탈을 방치할 수 없으니, 남은 수순은 비례의석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협상 과정에서 비례의석은 점점 줄어들었다. 패스트트랙에 올라간 '지역구 225석 대 비례대표 75석'의 개혁안은 '240 대 60'으로, '250 대 50'으로 점차 줄었다.
결국 비례의석을 한 석도 늘리지 못하고, 현행 '253 대 47'로 결정되었다. 현역 이탈을 막기 위해 지역구 의석 축소를 최소화했으나, 지역구 통폐합 가능성이 높은 호남 의원들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었고, 현행대로 가야만 했던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극히 적은 비례의석에서 연동형 방식을 도입하면서 불거졌다. 정치개혁의 기본 원칙은 바로 '비례성' 확대다. 비례성을 확대하려는 개혁의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극히 적은 비례의석에 연동형 방식을 도입하면, 지역구에서 의석을 싹쓸이하는 기득권 양당은 비례의석을 배분받기 어려워진다. 더불어민주당은 '최저이익'을 주장하며 '연동형 캡' 30석을 씌웠다. 병립형 방식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비례성' 확대라는 개혁의 원칙을 훼손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기본적으로 정당득표율과 의석수를 연동하여, 정당의 실력만큼, 정당이 지지받는 만큼 의석을 갖게 하자는 제도다. 그러나 준연동형을 주장하며 연동률을 50% 줄인 것도 모자라, 의원정수 확대 논의에 선을 그어 비례의석을 최저 수준에 머무르게 만들고, 여기에 연동형 방식으로 배분되는 의석에 상한선까지 씌운 것이다. 사실상 '비례성' 확대라는 원칙은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아래 표를 보자.
이는 20대 총선 결과를 27일 본회의에서 통과된 개혁안에 대입하여 나온 의석수이다. 27일 통과된 개혁안으로 인해 비례성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의당의 경우 정당득표율에 100% 비례했을 때, 얻어야 하는 의석은 22석이다. 여기에서 지역구 당선된 2석을 빼고 남은 수에 준연동형 비율인 50%를 적용하면 10석을 배당받게 된다. 하지만 연동형 캡을 적용하므로 다시 2석을 빼야 한다. 여기에 병립형 방식으로 1석을 추가하면, 최종적으로 얻게되는 의석은 총 11석이다. 국민의당은 정당득표율에 100% 비례했을 때 배분받아야 할 의석은 83석이나 된다. 하지만 마찬가지 방식으로 계산하면 최종적으로 52석을 배분받게 된다. 여기서 반문할 수 있다. "그래도 소수정당들이 얻는 의석이 늘어나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왜 더 얻으려고 욕심을 부리는가?"라고 말이다.
거대양당이 지키려는 건 '최저이익'이 아니라 '초과이익'
그러나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뮬레이션 <표 1> ㉱ 항목을 보면 소수정당들이 정당득표율의 50%를 적용해서 배분받아야 할 의석은 총 39석이다. 하지만 캡을 씌워 30석 아래로 조정하며 총 9석이 하향조정 되었다. 거대 양당을 지지하는 표의 가치는 100% 반영되는 데 반해, 소수정당을 지지하는 표의 가치는 여전히 30~50% 정도만 반영된다. 정당득표율이라는 기준, 즉 한 정당에 대한 지지를 온전히 반영하는 기준에 대비했을 때,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표의 가치는 107% 반영되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표의 가치는 145% 반영되었다. 지역구에서 압승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지키려고 하는 것은 '최저이익'이 아니다. 지역구에서 압승하더라도 비례의석은 별개로 더 얻을 수 있는 '초과이익'의 전략인 셈이다. 이를 지키려 함이 기득권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반면, 27일 도입된 개정안을 반영하더라도 국민의당을 지지하는 표의 가치는 62%, 정의당을 지지하는 표의 가치는 50%만 반영된다. 심각한 불비례성은 여전하다. 소수정당이 제 밥그릇을 늘리기 위해 욕심부리는 것이 아니다. 비례성 높은 비례대표제 도입은 모든 정당이 자기 정당의 지지만큼 공정하게 의석을 얻고, 다양한 사회균열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정치구조를 만들자는 개혁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거대양당의 의석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래 자기 것이 아님에도 과도하게 얻은 의석을 내려놓는 상식적 행위다. 그것은 공정한 게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지, 양보라고 할 수 없다. 27일 통과된 선거법은 역사적 진전임에는 틀림없으나, 여전히 개혁의 대상이다. '최저이익'이라는 말로 기득권을 포장하려 하기보다는 '최소한의 예의'를 더욱 고려한다면, 비례성이 높은 비례대표제로의 정치개혁은 더욱 빠르게 현실이 될 것이다. 당장 줄어들고 늘어나는 것만 보는 것은 조삼모사다.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는 비례성 원칙을 기준으로 놓고 봐야 개혁의 정치적 의미를 제대로 짚을 수 있다.
2020총선, 비례의석의 본질을 되짚어야
2020년 총선을 앞두고 정당들이 분주하다. 연동형 캡을 도입해 살려놓은 병립형 비례의석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할지 불 보듯 선명하다. 인재영입이라는 명목 아래에 화려한 담론전략을 펼칠 것이다. 정책은 없으나 상징적 인물을 영입하는 것이다. 청년정책은 없으나 청년을 영입하고, 여성정책은 없으나 여성을 영입한다. 그 결과 정책은 없으나 청년정당이 되고, 여성정당이 된 것처럼 선전하다. 기성정당의 오랜 수법이다. 그러나 간판으로 영입한 인물들이 당의 체질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이합집산하며 선거에서 유효할 담론만 취하는 정당은 실질적으로 이루어내는 것이 없다.
포용적 복지국가에서 죽어가는 가족들, 노인들, 장애인들의 소식이 무섭도록 자주 들려온다. 정당의 성향은 내세우는 인물이나 상징, 선거 구호와 같은 가벼운 것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수행하는 정책에서 진정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비례성이 높은 비례대표제는 반듯한 말만 앞서는 정치를 극복할 방안이다. 진정성 없이 상징만 내세우는 기만정치를 극복할 방안이다. 정책을 만드는 정당이 평가받고, 정책 성과로서 선거를 치르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20대 총선 결과에 대입해 보았을 때, 100% 연동형을 시행하면 의원정수는 331석으로 산정된다. 현행 300석에서 10%만 늘리면 100%의 비례성을 보장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선거 결과에 따라 다르겠으나, 비례성 높은 비례대표제가 시행되어야만 제대로 된 정당 정치가 정책 정치가 자리 잡는다. 50% 준연동형에 연동형 캡을 씌운 안이 통과되었으니, 다음 목표는 더욱 명확해졌다. 100% 연동형에 연동형 캡을 폐기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진정성 있는 정책 정당이 정치하는 나라에서 살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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