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비를 지급하지 않은 부모의 명단을 공개한 '배드 파더스' 관련 명예훼손재판이 내년 1월 14일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다는 소식과 '배드 파더스'는 공익적 행동을 한 것이라며 처벌하지 말라는 청와대 청원 소식이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배드 파더스'는 이혼 후 양육권자에게 양육비를 주지 않는 '나쁜 부모'들의 신상(이름, 거주지 등)을 공개한 온라인 사이트로 2018년 7월 개설되었다.
'배드 파더스'는 '나쁜 아빠들'을 공개하는 취지에 대하여 '양육비를 주지 않는 아빠들이 양육비를 주도록 압박하기 위한 것이며, 이런 압박이 정당성을 갖고 있는 근거는 '아빠의 초상권'보다 아이의 '생존권'이 우선되어야 할 가치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8년 여성가족부 조사 결과 한부모 73.1%가 받아야 할 양육비를 받지 못했고 82.3%가 양육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양육비 이행관리원을 통한 양육비 이행률도 32.3%에 불과하다. 법원이 양육비 이행 명령을 내려도 위반 시 처벌은 '감치' 처분인데 별로 효율성이 없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양육비 미지급 문제가 심각하다는 데는 이론이 있을 수 없고, 이에 국가가 나서서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양육비 이행관리원을 설립하는 수준의 제도 개선에 머물러 있다. '배드 파더스'는 더 이상 이런 상황을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하에 명예훼손으로 처벌될 위험을 무릅쓰고 신상을 공개했고 예상대로 신상이 공개된 사람의 고소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되어 국민참여재판을 앞두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변호사로서 양육비 지급 관련 사건을 여러 차례 다루면서 양육비를 받지 못하여 고통받는 의뢰인들을 자주 목격하였기에 '배드 파더스'가 나선 절박함에 공감하고 있다.
한편,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바로 떠오른 것이 있는데 바로 '코피노, 아빠 찾기'였다. 코피노는 한국 남성과 필리핀 현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 아이들을 일컫는다. '코피노 아빠 찾기'의 일환으로 모 단체 대표가 블로그에 아빠들 사진과 실명 신상정보를 공개한 후, '배드 파더스'와 마찬가지로 명예훼손의 논란이 일었다. '코피노, 아빠 찾기'가 '배드 파더스'의 원조인 셈이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아동성착취반대협회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코피노 숫자는 3만 명에 달하고, 2018년에는 4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코피노 아이들의 생부는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갔던 10대 후반~20대 초반의 한국 유학생들이 다수인데, 이들은 영어를 빨리 배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필리핀 여성들과 동거하다 자식까지 낳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 버린 경우가 많다. 그 외 사업가, 일회적 성매매 남성들이 있다. 필리핀에서 코피노 문제는 사회 문제까지 될 정도다.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에서는 낙태가 어렵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유독 피임을 하지 않는 한국 남성들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 남성들의 진출은 필리핀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지난해 나는 베트남 여성 A를 도와 아이의 친부인 한국 남성 B를 찾아 양육비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A는 20대 초반의 베트남 여성으로 베트남에 여행 온 B와 사귀게 되었다. 두 젊은이는 사랑에 빠졌고 B는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A에게 가능한 한 빨리 한국으로 초청하겠다고 약속했다. B가 한국에 입국한 후 A는 임신 사실을 알았다. 임신 소식을 들은 B는 기뻐하며 A의 진료 비용을 보내는 한편 베트남을 다시 찾아 결혼을 약속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간 B의 태도가 돌변했다. 자신의 부모가 A의 배 속 아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A는 베트남에서 함께 살면 된다, 베트남에서 친구들과 커피숍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으니 베트남에서 결혼하여 살자고 B를 설득했다. 그러나, B는 A에게 낙태를 종용했고, 이미 임신 4개월이 넘어선 A가 낙태를 거부하자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20대 초반의 A는 베트남에서 홀로 아이를 출산한 뒤 B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B는 A의 연락에 어떤 응답도 하지 않았다. 베트남에서 여자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한국 남자의 아이를 낳고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베트남은 '라이 따이한'의 역사적 아픔이 있는 나라다. 라이 따이한은 대한민국이 1964년부터 참전한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 군인과 민간인에 의한 매춘, 강간, 또는 사실혼 관계에 의하여 태어난 2세 아이들이다. 남베트남의 붕괴와 한국군의 철수로 이어지는 역사적 순간 속에서 라이따이한들은 '적군의 아이'로 베트남에 남겨졌다. '라이'는 베트남어로 경멸의 의미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잡종을 의미한다. '따이'는 '대한'을 베트남어식으로 읽은 것이라고 한다. 라이따이한은 최소 5000명에서 최대 3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베트남 땅에서 적군의 아이로 남겨진 아이들과 그 엄마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A는 그런 베트남에서 미혼으로 한국 남자의 아이를 낳았으니 그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A는 영어를 능숙하게 잘하는 꿈 많은 젊은이에서 손가락질받는 미혼모로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이가 너무 어려 아르바이트조차 못 한 채 친정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아가던 A는 아이가 세 살이 되자 B를 찾기로 결심했다. A는 한국의 단체들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나는 그녀를 돕게 되었다. 이름과 전화번호만을 알고 있는 B를 상대로 아이를 친생자로 인지할 것과 양육비 지급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고, 재판부의 허가를 받아 통신사에 그의 주소를 조회하는 등 갖은 노력 끝에 그의 인적 사항을 알아냈다.
일단 친자임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주장에 맞서 유전자 감정을 했다. 사실 유전자 감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아이와 엄마가 베트남에서 입국하여 처음으로 아빠인 B와 아이가 대면하던 날, 부정할 수 없는 유전자의 힘을 보았다. 나는 먼저 아이 아빠를 대면하였고, 조정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베트남에서 온 엄마와 아이를 처음 보았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아빠를 쏙 빼닮은 아이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진화는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것이고, 아이들은 생존을 위해 사랑받기 위해 부모를 닮는 것으로 진화했다고 했던가. 아빠를 빼닮은 아이의 모습에서 보이는 강인한 생존 본능이 참으로 서글프게 다가왔다.
조정과정에서 내가 분노했던 것은 B가 아이를 대하는 태도였다. 앞으로 B가 결혼도 해야 하니 아이를 B의 가족관계등록부에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베트남 물가를 감안하여 양육비를 일시불로 3~4000만 원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미혼이던 B가 이제라도 A와 결혼하겠다고 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지만(A도 전혀 B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아예 자식이 없는 것처럼 속이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아이를 자신의 자녀로 등록하지 않는 조건을 내세우다니…. 아이 엄마의 어려운 처지를 이용해 돈을 무기로 삼다니 마음속에서 차가운 분노가 일었다. 그렇지만 나는 차마 A에게 저따위 제안 뻥 차버리라고 조언하지 못했다. 미혼모로 아이를 키우고 살아가는 현실은 너무나 차가운 것이므로. 하지만 A는 엄마로서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돈은 자기도 벌 수 있다며 법원이 허용하는 매월 일정금(몇십 만 원)의 양육비와 아이를 B의 자녀로 등록하도록 한 것이다. A는 아이를 베트남에서 자신의 아이로만 키울 수도 있으나, 한국 남자의 아이가 베트남에서 차별 없이 크기란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아이가 B의 자녀로 한국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다. 나는 프랑스, 미국 등 세계 최강의 나라들을 물리친 베트남 여성의 이 '멋짐'에 홀딱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남성들이 뒤탈이 없을 것이라는 정보를 공유하고, 가난한 나라의 나이 어린 여성을 찾아 성매매를 떠난다거나, 심지어 외국에서 한 달 살기 콘셉트로 이국의 여성들의 성을 착취하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 여성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주로 성매매를 통해 태어났을 것이라는 생각도 착각이다. 사랑이라는 외피를 쓰고 현지에서 버젓이 살림을 차리고 심지어 결혼식까지 올리고 남편으로 행세하다가 한국으로 잠적하거나, 연인 관계로 지내다 여자가 임신하자 도망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이들은 자녀가 태어나는 것 따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피임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쾌락만이 중요할 뿐…. 우연히 태어나는 아이는 여인의 자식일 뿐이요, 도망가면 그뿐이다. 이들은 부자나라 한국에 대한 동경을 품은 가난한 나라의 어린 여성들을 오직 성욕 해소의 상대로 착취하고, 자신에게서 비롯된 수많은 아이들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금방 돌아온다거나, 한국으로 초청할 것이라고 약속하지만, 한국어로 남긴 주소나 연락처는 대개 가짜다. 금이야 옥이야 간직해온 메모를 들고 한국을 방문한 엄마와 아이에게 차마 한국어를 번역해줄 수 없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한국 남성들이 필리핀 여성에게 한국 주소라고 써준 쪽지에는 욕이 쓰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코피노 아빠 찾기' 블로그에 한국 아빠들 사진을 올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한국 아빠들이 남긴 전화번호나 주소는 가짜여도 함께 찍은 사진은 가짜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필리핀 여성들과 아이들이, 그리고 내 의뢰인 A가 원하는 것은 '가족 재결합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 확인과 양육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빠로서 최소한의 책임에서마저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두더지처럼 숨고 또 숨는다. '코피노 아빠 찾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필리핀 여성들은 아이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한국의 법원에 친자 확인와 양육비 지급 소송을 활발히 제기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필리핀 여성들이 소송에서 받은 양육비 중 일부를 과도한 수수료로 지급하고 있는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였다. 필리핀 여성들이 한국에서 소송을 할 수 있도록 알선해준 한국인들이 승소 후 받은 양육비의 상당 부분을 수수료로 챙긴다는 것이다.
왜 이런 문제들이 불거지는가. 결국 국가가 나서서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피해 당사자 개개인들이 나서게 했기 때문이다. 한국 남성들의 잘못으로 4만 명이 넘는 아이들과 그 엄마들이 사회적 편견과 양육의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이는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문제다. 과거 일본의 경우 자피노(일본인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문제가 대두되자 국가가 해결에 나선 예가 있다.
코피노 등의 문제는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에 대한 성착취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배드 파더스' 문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으나, 아빠들이 자녀의 생존 및 건강한 성장을 위한 최소한의 양육 책임마저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같은 점이 있다. 이혼 후의 부의 양육비 미지급 문제와 미혼부의 3.4%만이 양육비를 지급하고 있는 현실에서, 양육비 이행관리원을 설립하여 양육비 소송 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적 해결은 너무도 미봉책이다.
양육비 문제는 아동의 생존 문제이다. 그간 여성·아동인권 단체가 강하게 주장해왔던 것은 국가가 먼저 양육부모에게 양육비를 선지급하고 양육비 지급 의무자에게 구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양육 부모가 소송 지원을 받아 양육비 지급 소송에서 승소한다고 해도, 상대가 재산을 숨겨 놓거나 하면 받을 길이 요원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먼저 양육비를 지급하고,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에게 적극적으로 구상을 하는 것이 가장 실효성이 있는 제도이자 양육의 책임이 개인이 아닌 사회의 공적 책임이라는 가치에도 부합한다. 국방비로 50조 원의 예산을 편성하는 대한민국의 경제 규모에서 양육비 선지급 정도의 정책을 시행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의지가 없는 것이지 돈이 없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여러 나라에서 '양육비 선지급'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많은 나라에서 양육비를 지급하지 않는 부모에게 강력한 제재를 가한다. '배드 파더스'의 명예훼손죄 성립 여부에 대한 국민참여재판에 즈음하여 '나쁜 아빠들'의 명예는 아동의 생존권과 비교해 보호할 가치가 없다는 여론에 공감하면서도, 양육비의 문제가 '나쁜 아빠들'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서서 국가의 공적 책임의 문제로 귀결되기를 바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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