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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의사의 노예가 아니다

〈전태일통신 25〉혼자 찾아나선 생명의 길

대학 3학년 때 폐결핵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고 투병을 시작한 지 20년이 넘었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간간이 비치듯 도중에 잠간씩 몸이 가벼워져 몸을 잊고 산 적도 있었지만 결국 대학을 졸업도 못했으니 40대 중반이 되도록 투병만 하고 산 셈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화장실에도 못 가게 되자, 똥오줌만이라도 창피하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으면 그런대로 살만할 텐데 하면서 15미터 걷는 것을 작은 꿈으로 삼고 살았던 때도 있었다.

그때 정말 한창 젊었던 때, 1년 간 결핵약을 먹고 나서는 몸이 완전히 망가졌다. 결핵은 말끔히 나았지만, 결핵약의 후유증으로 온 내장이 제 기능을 잃게 되자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프면 무조건 약 먹어야 되고, 더구나 몸속에서 득시글거리는 그 놈의 세균을 잡아 죽이려면 살균제를 먹어야 된다는 의사의 처방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데 3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내가 체험을 통해 알게 된 명백한 사실은 '약이 병의 근본해결책이 아니다'는 것이다. 의사의 말만 믿다가는 몸 망가지고 죽기 딱 알맞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때부터 의사들 얼굴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튼튼하게 해 준다는 각종 비방과 전설, 민간요법을 섭렵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이제 좀 살만하다 했더니, 다시 옆구리가 묵직해 왔다. B형 간염이 시작되었다. 어릴 때부터 보균상태였을 것이니 어차피 한 번은 넘어야 하는 산이었다. 결핵은 그렇다 치더라도 B형 간염엔 약이 없다. 나홀로 설 수밖에 없었다. 시내 대형서점에 있는 건강관련 책은 다 읽어 본 것 같다.

15년 전인 그 당시에도, B형 간염 치료에 대해서는 의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민간요법이 자리를 잡아 가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구름버섯, 녹즙, 엉컹퀴 추출물(실리마린) 등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결핵 치료 후유증을 치료한 내공도 있으니 B형 간염쯤은 우습게 물리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크나큰 오산이자 오만이었다. 1년, 2년 세월만 흘러가고 간염은 나를 놓아주질 않았다. 거의 3년을 채워갈 무렵,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간염 증상이 사라졌다. '인생이 늦었지만, 5년 늦은 건 아무 것도 아니야' 하면서 남보란 듯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투병하느라 보낸 5년의 설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몇 년간 사람을 못살게 굴던 간염 바이러스도 잠잠해졌으니 조금만 더 지내다 보면 예전의 활력을 되찾겠지 하고 대학에 복학을 했다. 그런데 웬 걸, 몸은 더 엉망진창이 돼 가고 있었다. 버스 속에서 서 있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정도가 됐으니, 무거운 짐을 든 할머니를 보아도 못 본체 해야 했다. 심지어, '어이 총각, 나 짐 좀 내려줘'라는 말을 들어도 못 들은 체 해야 했다.그러다가 완전히 집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 동네를 벗어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마당 밖 세상을 보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고, 그렇게 30대를 보내고 말았다.

도대체 사람은 왜 아프고 죽는 걸까. 여름이 오면, 감이 익는 것을 볼 수나 있을까, 겨울이 오면, 내년 봄 냉이가 기지개 펴는 것을 볼 수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조금만 견디면 뒷산에 오를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에이 이왕 이렇게 된 것 건강과 질병에 관해 치열하게 연구나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살아 온 세월이 15년이다. 연구라고 하니 거창한 것 같지만, 매우 더디고 우직한 실험이었다. 곡식을 생으로도 먹어보고, 싹을 틔워서도 먹어보고, 소금을 끊어도 보고, 오줌을 마셔도 보고, 하루에 식사를 한 끼로 줄여도 보고, 열흘 정도 굶으면 어떻게 되나 싶어 단식도 해보고, 한 번이면 부족할까봐 또 해보기도 하고, 효소를 먹으며 단식을 해보면 달라질까 해서 효소단식도 해보고…. 그러나 이젠 이 방면에 어느 정도 도가 텄다고 자부하는 지금도 내 몸은 아프다. 그래서 몸에 대해 이야기 하는 데는 무척 주저주저 한다.

2000년, 역시나 고통스런 새해를 맞았다. 실험적으로 다시 비타민 씨를 먹어보았다. 복용 후 1시간 후, 근육피로가 줄어든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릴 수 있는 시간도 몇 배 늘어났다. 한 달이 지나자 볼에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비타민 씨는 허약한 사람에게는 엄청난 활력을 준다.

내가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락토페린'이라는 우유추출물 때문이다. 비타민 씨를 먹은 후 더 오래 이야기하고 앉아 있을 수 있었으나 집 밖을 나가면 자꾸 돌아갈 길이 멀어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몸이 이렇게 아픈 것은 병든 문명 때문이라면서 자연스러움을 찾고 유기농 식품만 골라서 먹는 내가, 인터넷에서 '미제' 락토페린을 주문했다. 밤에 락토페린 2캡슐을 먹고 다음날 일어나 보니, 이게 내 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것을 계기로 서서히 몸이 좋아졌다.

모유에는 락토페린이 우유보다 10배나 많이 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른다. 몸이 알아서 우리를 챙겨준다는 것을…. 어떤 이유로 체내에서 락토페린 합성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면역계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락토페린 신세를 톡톡히 지고 난 후에는, 엄마 젖 한 모금도 얻어먹지 못하고 크는 새끼들을 보면 그 애들이 커서 얼마나 시달릴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락토페린을 먹은 후 몸의 흐름이 바뀌자 몸에 좋은 것을 판별하는 것도 쉬워졌다. 유산균을 먹어서 똥에 냄새가 나지 않도록 하고, 클로렐라를 먹은 후에는 꽤 오랫동안 공부를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어쨌든 나는 내 몸에 맞는 약과 식품을 기나긴 생체실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환자는 의사의 노예다. 노예는 주인이 놓아주는 것을 두려워하듯이 노예인 환자 역시, 의사가 붙잡아 두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쇠사슬을 제 다리에 묶고 의사 곁을 떠날 줄 모른다. 오히려 자신의 주인이 좀 더 강해져 수퍼맨이 되고 줄기세포를 만드는 신이 되어 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지금 주어진 이 찰나에 살아 있음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살면서도 죽는 것만큼은 발작적으로 거부한다. 주인이 더 전지전능하게 되어 우리 삶을 지배하기를 바라거나 생명공학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우리가 한순간도 사람답게 살아보지 못하여 생긴 보상심리가 아닐까.

각종 검사결과를 펴 놓고 있는 의사 앞에 앉아 있는 환자는 참으로 초라한 존재다. 의사의 의지와 상관없이 검사 결과는 이미 객관적 실체로 존재할 뿐인데, 마치 의사가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환자는 그 순간 비굴해진다. 의료법은 모든 의료행위, 심지어 부항, 뜸, 봉침, 수지침, 지압조차도 의사가 아니면 할 수 없도록 규정해 놓았다. 변호사법과 비교해보아도 의료법의 독점은 심각한 수준이다. 얼핏 보면 이러한 방식이 일반 대중이 돌팔이에게 피해를 입지 않게 하는 데 효율적일 것 같은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의사보다 자신이 더 잘 아는 법이고 몸이 아프면 스스로 부항도 뜨고 수지침도 놓으면 된다. 언제부터 개개인의 건강이 다른 사람의 관리의 대상이 되었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감기만 걸려도 겁부터 집어 먹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우리는 생태장사(산 사람을 상대로 한 의료산업)니, 동태장사(죽은 사람을 상대로 한 장의산업)니 하는 비아냥을 들으면서까지 전문가주의의 수렁에 빠져버렸는가.

응급의료, 외과학, 안과, 치과, 항생제, 예방접종 등 현대의학이 이룬 성과는 눈부시다. 이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예방접종 분야에서는 의료의 사회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계급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혜택을 누리고 있지만, 응급의료나 외과학에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서민들로서는 뜻밖의 사고를 당하게 되면 집 팔아 전셋집으로, 또 전셋집에서 사글세집으로 이사를 가야할 상황이 되고 만다. 몇 십 년 환자였던 나도 주위에서 환자 한 사람 때문에 갑자기 극빈층으로 전락하게 되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피할 수 없는 질병이나 사고에 대해서는 집을 팔거나 적금을 해약하지 않고도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눈부신 성과를 내고 있는 이 분야에서 의료의 사회화는 시급한 과제이다.

우리가 마주치는 현대의료의 대부분은 이러한 긍정적인 부분이 아니다. 의료는 내 몸에 대한 타인의 간섭이다. 만성병을 약물투여나 주사 등으로 개선하는 것은 언 발에 오줌누기에 지나지 않는다. 만성병은 오로지 환자의 몫이며 생활습관의 개선과 절제로써 극복될 수 있다. 물론 타율적 의료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의학이라는 유사 종교에 기대서 돈 버리고 세월 허송하게 하는 것은 죄악이다.

'병은 의사가 고친다'는, 돈만 갖다 주면 병은 의사가 고쳐 줄 것이라는 뿌리깊이 교육된 잘못된 신념이 쉽게 바로 잡아질 것 같지는 않다. 환자는 왜 의사에게 주눅이 들까. 무엇보다도 의사들이 설정해 놓은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환자가 의사를 만나게 되는 과정 자체가 지극히 관료적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관계가 수직적이고, 여기에다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 또한 수직적이다 보니 의사와 환자 사이에는 일방적인 지시만 있을 뿐이다. 제 아무리 병원이 고객 서비스 제일주의를 들고 나온다 해도 병원은 근본적으로 일방적 명령만 있는 대화 부존재의 공간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 감기 환자는 찬바람을 쐬면서 병원에 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기약을 먹고, 졸더라도 직장에 나가서 졸아야 한다.

의사는 심하게 말하면 타인의 불행을 먹고 사는 사업자다. 우리는 이런 진실을 똑바로 쳐다보아야 한다. 부질없는 생명을 몇 달 연장하기 위해 중환자실에 입원하여 수 십 가지 고무호스를 온 몸에 꽂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숨을 쉬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동원하고, 심지어 감당할 수 없는 빚까지 자식들에게 남기고 떠나는 사람도 많다. 돈은 벌면 되지만 목숨은 한번 가면 다시 못 오는 것이라면서…. 이미 타율이 몸에 밴 환자나 가족들은 다른 길을 선택할 여지가 전혀 없다. 그래서 환자는 의사의 노예다.

자동차 수리 1년이면 자동차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 귀신같이 알아 맞추는 판에, 우리는 몇 십 년을 살았어도 우리 몸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교과서 내용 그대로 읽어 주는 식의 조언이나 그들이 전수해 준 피상적인 안목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환자는 자신의 몸이 내는 경고를 관찰하고 일상생활을 성찰하는 기본적인 임무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의사에게 기대려 한다.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와 비례하지 않는다. 이것은 의료분야에서도 그대로 맞는 말이다. 환자는, 특히 가난한 만성병 환자는 우리 뇌리에 깊이 박혀버린 '교환가치'라는 허깨비로부터 벗어나야 진정한 건강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병은 의사가 고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낫는 법이다. 벌레 한 마리가 꿈틀거리는 것조차도 신비덩어리일 뿐이다. 우리 몸은 더 그렇다. 의사들은 자기들의 지식의 여집합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게 모두 병의 원인이고 치료의 핵심이다. 이것은 제쳐 둔 채 당뇨환자에게 인슐린이나 주고 두통환자에게 아스피린이나 주면서도 자신이 환자의 질병을 다스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개인이나 사회나 질병에 걸리는 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거대한 흐름이다. 지금 병에 걸려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거나 질병에 걸리고 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은 큰 흐름을 주시해야 한다. 몸속에 아스피린 성분이 부족해서 두통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항생제 성분이 부족해서 감염되는 것도 아니다.

병든 문명과 땅 위에서 마음놀림과 몸놀림을 잘못 하다가 병을 얻게 되었는데도, 병든 문명이 만든 병든 치료법을 믿고 병상에 누워 낮선 사람의 능숙한 손놀림에 몸을 맡기는 것은, 더러움을 가득 안고 있는 수원지는 보지 않고, 수도꼭지만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과 같다.

지금처럼 의료전문가가 홍수를 이룬 때는 없었다. 고장 난 자동차를 카센터에 맡기듯 아픈 아이를 전문가에게 싣고 가서 검사를 받게 하는 짓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병원에서 태어나서 병원에서 죽어가는 것, 이것은 이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야 할 법칙으로 되어 버렸다.

근대의료는 우리에게서 자생적인 삶을 빼앗고 그 자리에 '무지와 의지박약'을 심어놓은 데서 출발했다. 의사가 환자와 질병을 통제하려는 근대국가의 의도는 대성공을 거뒀다. 우리는 의사에게 인간의 품위를 내어 주는 대신 과학과 인간의 지식이 우리를 구원할 거라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노예만이 누릴 수 있는 편안함이다.

투병 중에 멀리서 바라본 우리 시대 삶이란 내 생각에는 거의 미쳐가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그 속에서 부딪히고 상처 입으며 근근이 버텨가고 있으니 오히려 희망은 오직 무덤에만 있다는 에르빈 샤르가프의 자조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환자는 노예가 아니며 죽을 때 자신이 살던 방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젠 살 만큼 살았어. 지겨울 정도로…'라는 말을 하고 죽는 것은 최소한의 품위이다. 에르빈 샤르가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두려움과 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슬픔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나는 인간의 운명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에 철저히 반대합니다. 운명은 우리 인간성의 일부입니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거나 약을 복용함으로써 그것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의 슬픔은 이런 것이다.

"무엇이 한량없이 슬픈가 하면, 인간다운 품위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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