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반미 투쟁이념은 이라크 민족주의”**
바드다드 시내 중심가에서 40km쯤 서쪽에 떨어진 팔루자는 1980년 한국의 광주와 같은 곳이다. 주로 수니파 교도들이 살고 있는 인구 30만의 팔루자에선 지난 4월 한달 동안 팔루자 사람들은 압도적인 미군의 화력에 맞서 피어린 항쟁을 벌였다. 미군은 팔루자 민간인 주거지역에 AC-130 전투용 항공기, 코브라 헬기, F-16 전투기를 동원한 대규모 야간 무차별 폭격, 7백명 넘는 사망자를 냈다. 워낙 단기간에 많은 사람들이 미군 공격으로 죽는 바람에 그곳 축구장은 거대한 공동묘지로 바뀌었다.
***휴화산처럼 아래서 끓는 팔루자**
이번 이라크 현지 취재길에 팔루자 안으로 가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팔루자는 지난 4월 한달 동안 미군에 의해 외부와 차단됐다가, 5월1일부터 다시 길이 열렸었다. 그러나 6월 들어 다시 상황이 악화되는 바람에 외국 기자들의 출입이 막혔다. ‘이라크 평화네트워크’의 현지 활동가 윤정은님과 함께 팔루자로 들어갈 요량으로 아침 일찍 바그다드를 출발, 잘 닦여진 준고속도로를 따라 팔루자에 거의 다 다가가자, 이라크 군인들이 지키는 검문소가 나타났다. 그들은 미군이 새로 모아 훈련시킨 이라크 병사들이었다. 검문소는 반미 저항세력의 기습공격에 대비, 모래 가마니를 2m쯤 높이로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쌓아 놓고 그 위에 철조망을 둘렀다.
그 이라크 군인들에게 이라크임시행정청(CPA)이 발급해준 취재허가증을 보이며 "팔루자로 가려한다"고 말하자, 그들은 어디론가 무전기로 상황을 알렸다. 1분도 안 돼 모래 가마니 뒤에서 미군 두 명이 나타났다. 그 미군들에게 다시 취재허가증을 내보이자, 그들은 무전기로 조회를 한다. 그런 것까지는 복무규정대로 따르는 것이려니 이해를 했다. 그러나 이어 “팔루자엔 안전 때문에 외국인은 못 들어간다”는 말을 듣는 순간 열이 올랐다. “안전? 그런 문제라면 나의 문제이니, 그냥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속마음으론 “미국인들이야 팔루자에서 학살을 저지른 전과가 있으니 못 들어가겠지만, 나야 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필자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그 미군 병사는 “내가 여기 있는 한, 당신은 이곳을 못 지나간다”고 고압적인 태도로 나왔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나올 일이지, 내 안전을 걱정해주는 낯간지러운 말은 왜 했나? 동행한 윤정은님은 “지난 5월말에도 나는 팔루자에 들어갔었는데...”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날 들은 소식은 팔루자 지역의 이맘(imam, 회교 지도자)이 6월 들어 “팔루자 지역엔 외국인들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하라”는 칙령을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일부 미국 기자들이 팔루자 반미 저항세력의 움직임을 취재하고는 미군 당국에 정보를 건네준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팔루자 상황은 현재로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휴화산처럼 보인다. 팔루자에 시리아나 사우디 등 아랍권의 무자헤딘(전사)들이 수백명 들어와 있다는 얘기도 들리지만, 그런 걸 확인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미군 점령당국도 언젠가 팔루자에서 다시 무장투쟁이 벌어질 걸로 보고 팔루자 상공에 무인비행기를 띄우는 등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다. 팔루자에서 바드다드로 돌아오는 길목에 자리한 아부 그라이브 감옥 앞엔 뙤약볕 아래 많은 이들이 여전히 줄 서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곳에서 만났던 이라크 여인들의 어두운 얼굴들이 떠올라 가슴이 시려왔다.
***반미 정서 강한 ‘혁명의 도시’**
팔루자를 뒤로 하고 바그다드 동쪽의 또다른 반미현장 사드르 시티로 향했다. 인구 550-600만 바드다드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빈민지역이다. 팔루자 투쟁과 사드르 시티의 투쟁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팔루자는 수니 삼각지대의 여러 반미 투쟁지역 가운데 하나라면, 사드르 시티는 최근까지도 시아파 성지 나자프에서 반미투쟁을 벌여온 회교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드르와 그 무장세력인 마흐디 군의 본거지다.
이 지역은 후세인 정권 시절 그의 이름을 따 ‘사담 시티’라고 일컬어졌지만, 정권 붕괴 뒤 미 점령당국이 지역 이름을 ‘사드르 시티’로 바꾸었다. 1999년 사담 후세인에게 암살 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맘 모하메드 사드르(반미 회교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드르의 아버지)를 기려서다. 그렇지만 현지 주민들이 이 지역을 가리켜 일컫는 아랍어 이름은 ‘알-타우라’, 우리말로는 ‘혁명의 도시’란 뜻이다.
사드르 시티 곳곳에는 반미 구호들이 적힌 포스터들과 플래카드들이 내걸려 눈길을 끈다. 통역인 카짐에게 내용을 물어보니, “점령자 미군은 이라크에서 물러나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회교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드르, 그의 아버지이자 1999년 사담 후세인에게 암살 당한 것으로 알려진 이맘 모하메드 사드르의 포스터들도 많이 나붙어 있다. 한 포스터에 쓰여진 이맘 모하메드 사드르의 어록-“미국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어도 믿음을 가진 이라크를 지배할 수 없다”
사드르 시티를 돌아보니, 지구촌의 빈민지역이 보이는 전형적인 문제점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 한구석엔 쓰레기 더미가 쌓여있고, 그 주변에선 남루한 옷을 입은 아이들이 이렇다 할 놀이기구도 없이 버려진 깡통을 갖고 놀고 있다. 높은 실업률과 범죄는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에도 바드다드 시당국의 골칫거리였다. 지난해 4월9일 바그다드 함락 뒤 국립박물관과 관공서 건물들을 비롯, 시가지를 휩쓸었던 약탈 바람의 주력군도 이곳 사드르 시티 거주자들이었다는 소식이다.
오늘의 사다르 시티를 사실상 지배하는 세력은 회교성직자 모크타다 알-사드르를 따르는 마흐디 군이다. 미군 점령당국도 사드르 시티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곳 한 담배공장에 사령부를 차린 미 제1기병사단 병사들은 사드르 시티 중심가로 탱크를 몰고 나오진 못하고, 그 주변에서 멈칫거릴 뿐이다. 이라크 경찰도 사드르 시티의 치안을 맡겠다고 감히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들은 미군과 마흐디군의 틈바구니에서 동네북처럼 두둘겨 맞기 일쑤다.
그곳 한 경찰서는 오늘의 이라크 경찰이 지닌 어정쩡한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이라크 경찰들이 지키는 그곳에 가보니, 폭탄 공격을 받아 엉망이었다. 누가 그 경찰서를 폭격했느냐는 사람마다 말이 달랐다. 이라크 경찰은 “마흐디 군이 그랬다”고 하고, 그곳 주민들은 “미군이 폭격해서 그리 됐다”고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마흐디 군이 “이라크 경찰들은 미군 부역자(附逆者)"라며 이른바 RPG라 일컬어지는 로켓 추진 총류탄으로 경찰서를 공격 점령한 뒤 건물 안에서 폭탄을 터뜨려 건물 일부를 파괴했고, 그 뒤 미군이 마흐디 군을 경찰서에서 쫓아내려고 미사일로 공습하는 바람에 건물 지붕에 커다란 구멍을 남겼다.
***“이라크 임시정부는 미국의 정치적 도구”**
사다르 시티에서 회교지도자 모크타다 알-사드르와 반미노선을 함께 하는 영향력 큰 회교성직자 카심 알-카비를 만난 것은 필자에겐 두 가지 측면에서 행운이었다. 하나는 알-카비로부터 현재 나자프에 머물며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지내는 모크타다 알-사드르의 투쟁이념을 들을 수 있었고, 다른 하나는 필자의 나자프 취재 길에 알-카비가 써준 소개장이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점이다. (시아파 성지인 이맘 알리 사원을 중심으로 미군과 전투를 벌여온 마흐디 군은 외국 기자들에게 매우 거칠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인다. 알-카비의 소개장은 암행어사 마패같은 신통한 약발을 보였다. 이 부분에 대해선 곧 이을 다음 차례 글에서 쓸 예정이다). 사드르 시티의 알-카비 집에서 그와 주고받은 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크타다 알-사드르와 마흐디 군의 반미 투쟁을 어떻게 보는가.
“그들의 반미 투쟁은 현시점에서 이라크의 민족노선을 대표한다고 믿는다. 미 점령자들은 알-사다르의 개인적인 투쟁으로 사태의 본질을 축소하려 하지만, 알-사드르는 적어도 5백만,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이라크 인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알-사드르의 투쟁은 이라크의 반미투쟁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을 왜 미워하고 비판하는가.
“미국은 우리 이라크 사람들을 범죄꾼처럼 여기지만, 우리는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미국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미국은 입만 열었다 하면 후세인 독재와 이라크 민주주의를 말해왔다. 후세인을 무너뜨리고 민주화를 이루겠다는 미국의 선전은 엉터리임이 드러났다. 우리가 보기에 이라크 침공을 주도한 럼스펠드(미 국방)는 후세인과 똑같은 인물이다. 처음엔 분명치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라크 민중들은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별하게 됐다. 이곳 사드르 시티 주민들은 후세인 정권 때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겪는 중이다”(바로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전기가 나갔다. 그나마 작은 선풍기로 버티던 방은 곧 찜통으로 바뀌어 갔다. 전기와 자동차 기름의 불안정한 공급은 미 점령당국에 대한 이라크 사람들의 불만을 키우는 또다른 씨앗이 됐다-필자 주).
-모크타다 알-사드르의 반미투쟁에 시아파 종교지도자인 아야톨라 시스타니가 적극 동조하지 않는 모습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가.
“시스타니가 반미투쟁에 적극 동조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이라크 종교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잘못이다. 두 사람 다 미국의 이라크 점령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이다. 다만 시스타니는 큰 어른이고 보다 종교적이라면, 알-사드르는 젊은 사람으로 정치적인 투쟁성향을 보다 많이 드러낸 인물이다. 당신 나라 한국이 외국 세력에게 점령당했다 치자. 그럴 경우 종교 최고지도자에게 투쟁할까요 말까요 하고 물어볼 필요가 있는가?”
-이라크 사람들의 반미투쟁을 전하는 외신 보도경향에 대해선 불만이 없는가.
“문제점 투성이다. 우리 이라크 민중들의 투쟁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미국 점령자들의 선전에 놀아나고 있다. 이를테면 한달 전 바그다드 북쪽 미산 지역에서 우리 이라크 형제들이 미군 탱크들을 14대 파괴했으나, 제대로 보도가 안됐다. 그 대신 미국이 제공하는 뉴스를 재탕 삼탕하는 수준이다. 세계의 주요 TV 방송국들은 미군이 제공한 화면을 되풀이해 보여주고 있다”
-사담 후세인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후세인을 한마디로 평가하긴 어렵지만, 그는 서구 열강의 정치적 도구였다고 본다. 그의 얼굴은 미국 동전에 나오는 미 대통령들과 같은 얼굴이다. 그는 미국에 맞서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 내용적으론 미국에 협력적인 모습마저 보였다” (후세인의 시아파 탄압정책 탓에 이라크 시아파 성직자들은 그를 매우 비판적으로 본다. 그래서 후세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지 못하는 측면이 강하다-필자 주).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나 이제 곧 출범하는 이라크 임시정부가 이라크 민중의 정치적 의사를 대변하고 있다고 보는가.
“과도 통치위나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는 자들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과 지배를 합리화시켜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한마디로 미국의 정치적 도구다. 앞으로 있을 총선도 이라크 민중의 정치적 의사와는 거리가 먼 거짓 총선이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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