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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미국은 감히 이라크에서 민주주의 말하지 말라”

김재명의 '중동 현지 르포' <5> 아부 그라이브 감옥앞의 외침

***아부 그라이브 감옥 앞의 외침
“미국은 이라크에서 민주주의 내세우지 말라”**

이라크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요르단에서 이라크로 이어지는 도로는 ‘알리바바’로 일컬어지는 떼강도들이 설쳐대, 지갑이며 카메라를 털리는 것은 물론이고 운이 없으면 자칫 목숨을 잃기 십상이다. 그런 알리바바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요량으로 많은 여행객들은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한밤중에 떠난다. 요르단-이라크 국경을 새벽녁에 넘고 한낮에 바그다드에 닿는 12시간쯤 걸리는 육로는 알라바바 말고도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자동차 보험과는 거리가 먼, 20년 안팎의 낡은 차량들이 내는 평균 시속은 140-150km. 그저 운전기사에게 맨목숨을 내맡기고 그가 졸음운전 하질 않기 바라며 눈 감고 있어야 속이 편하다.

필자는 이번 이라크 취재길에 암만-바드다드 사이를 오가는 요르단 항공사의 80인승의 비교적 작은 비행기를 탔다. 75분쯤 걸리는 이 항로의 비용은 왕복 1,140 달러. 서울-뉴욕 왕복 항공료와 맞먹는다. 항공사 쪽 설명으론 이라크 저항세력으로 공격을 받아 격추될 위험 부담 탓에 보험료가 높아서란다. 지난 2002년초 아프간 취재길에 1시간 남짓 걸리는 이슬라마바드(파키스탄 수도)-카불(아프간 수도) 왕복 항공료 1,200달러를 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같은 설명을 들었다. “보험료가 비싸서…”

바드다드 공항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항공사 쪽의 보험료 타령이 터무니 없이 부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 조종사는 이라크 반미 저항세력으로부터의 미사일 공격을 피하려는 듯이, 지그재그로 비행기를 몰았다. 이라크 무자헤딘(전사)들은 어깨걸이식 구형 미사일로 바그다드 공항을 드나드는 비행기들을 위협해왔다. 필자가 탄 작은 비행기는 그렇게 곡예를 하며 바드다드에 닿았다. 비행장 주변은 미군 장갑차들이, 비행장 안은 네팔에서 온 계약직 경비원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멀리 히말라야 산맥에서 온 그 용병들은 (덩치 큰 미군과는 달리) 작은 몸매에 맞게 총신이 짧은 MP-5 자동소총을 매고 있었다.

***후세인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점령자가…**

인구 550만의 대도시인 바그다드 중심가엔 2003년 3,4월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미군의 공습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런 가운데 한국산 TV를 비롯해 각종 전자제품을 파는 일부 상가들이 흥청대는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사담 후세인의 몰락을 말해주듯, 시내 곳곳에 내걸려있던 그의 대형 초상화들은 훼손돼 보기 흉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를테면, 이라크 고등교육부 건물 입구에 놓인 후세인 초상화는 후세인 얼굴이 머리카락만 부분만 남기고 5분의 4쯤 지워진 모습이었다. 2003년4월9일 바드다드 함락 당시 미군 기중기가 끌어내렸던 후세인 동상 위엔 ‘화합과 평화’를 상징한다는 조각작품이 재빠르게 들어섰다.

그러나 이라크 땅에서 화합과 평화를 말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아부 그레이브 감옥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바드다드 시내 숙소에다 짐을 푼 뒤 먼저 수감자 학대사건으로 악명 높은 아부 그라이브 감옥으로 가보았다. 감옥은 바그다드 시내 중심가에서 팔루자 방향으로 30km쯤 서쪽 간선도로 가에 있다. 후세인 정권 아래선 정치범들이 처형당했던 곳이고, 미군들이 학대사건을 일으켜 지구촌 사람들의 분노가 쏟아졌던, 말 그대로 문제의 장소다. 철조망과 모래주머니를 사람 키만큼 높이 쌓아놓은 감옥 정문 초소엔 중무장한 미군 병사들과 이라크인 보조인력들이 질서를 잡고 있었다. 감옥의 높은 망루엔 기관총으로 무장한 미군 병사의 모습도 눈길을 끌었다.

***1년 넘게 면회도 못하고 재판도 없고**

아부 그라이브 감옥 앞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어느날 갑자기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빼앗긴 이라크 사람들이 서성댄다. 저마다 많은 가슴 저린 이야기들을 지닌, 그렇지만 극히 평범한 평범해보이는 사람들이다. 그곳에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 뒤 ‘수니 삼각지대’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미군에 맞서다 붙잡혀온 사람들이 상당수다. 통역 카짐의 도움으로 그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미군의 마구잡이식 체포작전에 ‘테러 용의자’로 몰려 1년 넘게 재판도 없이 갇혀 있는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세이프 마흐무드(22)의 아버지는 지난해 11월 미군에게 붙잡혀간 아들을 보러 왔다. 아들은 바그다드 북쪽 모술 지역에서 미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죽은 한 친구의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잡혀갔다. 그동안 아들 면회를 한번도 못하다가, 7개월만에 면회허가를 받았다며 통지서를 보여준다. 농부인 아버지는 “내 아들이 왜 잡혀갔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건강도 좋지 못한 아들이 미군들 고문에 시달려 몸을 해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다. 이른 아침부터 와서 기다리는데 들어오란 얘기가 없다”며 답답한듯 담배를 피워문다.

***“군화 발에 채인 엄마는 병원 신세, 아들은 옥살이”**

팔루자 가까운 알 칼리드 마을에 살던 트럭 운전기사 왈리드 아바스(23)는 저항세력들에게 무기를 운반해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감옥에 갇혀있다. 동생 아크람(16)은 “지난 9개월 동안 형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며 면회마저 제한하는 미군을 원망했다. “미군이 25명쯤 우리 농장을 둘러싸고 숨겨놓은 무기를 찾는답시고 집을 마구 뒤졌다. 엄마가 나서서 따지자, 미군 하나가 군화발로 엄마 무릎을 세게 걷어차는 바람에 지금도 병원에 누워계신다”고 분개했다.

모하마드 압둘 세타(22)는 바드다드대학 법대 학생이다. 2003년12월21일 바드다드시 북서쪽 하이자마 지역을 습격한 미군들에게 모하마드의 8형제 모두가 무장저항 세력과 관련된 혐의로 체포됐다. 다행히 모하마드를 비롯한 4형제는 풀려났지만, 아직도 나머지 4형제는 감옥에 갇힌 상태다. “집에서 잡혀가던 날도 미군들한테 매를 맞았고, 심문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로 매를 맞았다. 나는 다행히 무혐의로 지난 5월28일 풀려났어도, 변호사이자 인권운동가인 형, 학교 선생인 두 형, 바드다드대 공학박사 과정에 있는 형은 언제 풀려날지….”

모하마드는 형들이 미군으로부터 고문을 받았을 걸로 짐작한다.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대사건은 그에겐 남의 얘기가 아니라 여긴다. 부시 미 대통령은 포로 학대사건이 불거지자 이를 일컬어 ‘비미국적’이라 주장했었다. 그런 부시의 발언을 모하마드에게 상기시키자, 그는 쓴 웃음을 지었다. “미국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죽이고 그들의 문화를 말살시킨 나라다. 그런 야만의 기록을 지닌 미국은 이제 이라크 문화를 말살하려 든다. 이곳 아부 그라이브 만행이 보여주듯 미국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이라크 석유가 필요하다고 솔직히 말하면 안됐나?”

***“잡범만 풀어주고 언론 플레이 한다”**

미 점령당국은 그동안 아부 그라이브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몇백명씩 풀어주었다. 그러나 아부 그라이브 감옥 앞에서 만난 이라크 사람들은 “사실과는 달리 부풀려졌다”라며 고개를 가로 젓는다. 이라크의 주요 일간지이자 미 점령정책에 비판적 성향을 지닌 <아자만> 신문의 논설위원 무산나 알-타바크츨리는 “미국은 좀도둑 등 잡범 위주로 수감자들을 풀어주고 정치범은 붙잡아두면서 언론 플레이를 하려든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4,000-5,000명 가량의 수감자들을 이라크 치안에 위협적이라 여기는 위험분자로 분류, 그들을 풀어줄 뜻이 전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창살 너머나마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마주하려고 하루 종일 서성대야 하는 사람들에게 기다림은 또다른 고통이다. 이라크의 6월 날씨는 체감온도가 40도를 넘는다.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 그리운 이를 만나려는 이라크 사람들의 행렬은 그래도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그런 행렬을 뒤로 하고 바드다드로 돌아오는 길 곳곳에서 중무장한 채 무력순찰 중인 미군 병사들과 마주쳤다. 지금 이라크는 미군 침공 16개월만에 ‘주권’이 되돌려진다고 떠들썩하다. 그러나 주권의 핵심인 치안은 사실상 미군 몫이다. 반미 저항세력을 누르고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우려면, 적어도 2006년 초까지 미군은 점령군으로서 이라크에 눌러 앉아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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