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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사진을 찍으면서 답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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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그렇듯 사진을 찍으면서 답을 찾았다"

[화제의 책] 아프가니스탄 <평화의 사진가>

아프가니스탄이 소련과 전쟁 중이던 1986년 7월, 프랑스의 사진 기자 디디에 르페브르는 '국경 없는 의사회'의 현지 구호 활동을 취재하고자 아프가니스탄 북부 접경 지대에 발을 들여놓는다.

의료팀과 만나 현지 적응을 하고, 전쟁에 희생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일행과 떨어져 혼자 파키스탄으로 돌아가기까지 4개월의 여정을 그는 필름 130통 분의 사진으로 남겼다. 그 기록이 바로 <평화의 사진가>(에마뉘엘 기베르, 디디에 르페브르, 프레데릭 르메르시에 지음,. 권지현 옮김. 세미콜론 펴냄)다.

전쟁터에 뛰어든 사진가?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건 충분히 가까이에서 찍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명언으로 르포 사진가를 강박에 빠뜨린 로버트 카파를 떠올린다면, <평화의 사진가>의 작가이자 주인공 디디에 르페브르의 감성은 조금 의외일지도 모른다.

인간적인 사진가를 만나다

▲ <평화의 사진가>(에마뉘엘 기베르, 디디에 르페브르, 프레데릭 르메르시에 지음,. 권지현 옮김. 세미콜론 펴냄). ⓒ프레시안
전쟁 중인 나라에 투입된 사진 기자라면 죽음을 무릅쓰고 현장을 기록하는 용감한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만, 르페브르는 매사 불평 투성이에 의존적인 인간이다. 그는 물론 혈기왕성하고 호기심이 넘치지만,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소련군의 무자비함을 폭로하려는 의도나 열정을 지닌 건 아니었다.

서양인이 다른 문명과 교류할 때 흔히 내비치는 현지인에 대한 인간적인 미화나 찬양도 하지 않는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의 죽음에 숨죽여 울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의 선심에 감동받기도 하지만, 도움을 약속하며 돈을 요구하는 카라반들이나 부패 경찰, 위험한 장난을 치는 10대 무자헤딘에 넌더리를 내기도 한다. 힘든 여정에 지쳐 하루빨리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은 의무감에, 혹은 할 일이 없어서 사진기를 들기도 한다.

지금까지 분쟁 지역에 뛰어든 기자들의 사진은 이런 '틈'을 보여주지 않았다. 전쟁의 강렬한 이미지 속에 사진가의 인간적인 냄새가 끼어들면 한가한 것처럼 보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화의 사진가> 속 르페브르는 웃음, 감동부터 불평, 짜증, 심지어 팔에 난 종기까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 책 속에는 전쟁의 참상 뿐 아니라 사진밖에 찍을 줄 몰랐던 작가가 현지 의료팀과 만나고 헤어지며 성장해가는 과정, 또 프랑스인으로서 겪는 문화와 관습의 차이까지 '관찰자'의 인격이 담겨있다. 피사체를 둘러싼 인간 관계가 한층 더 또렷하게 나타나는 사진들은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고개를 넘어갈 무렵, 피곤에 절은 나는 도대체 내가 여기까지 와서 뭘 하는 건지 자문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사진을 찍으면서 답을 찾았다."

만화와 사진이 혼합된 르포

이렇게 자신의 존재를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책이 만화와 사진이 혼합된 독특한 형식의 르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화의 사진가>는 사진으로 된 아프가니스탄 전쟁 르포이면서, 그 르포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이기도 하다.

<평화의 사진가>는 르페브르가 이웃으로 친하게 지내던 만화가 에마뉘엘 기베르에게 아프가니스탄 취재 사진을 보여준 것을 계기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르페브르가 잠자고 있던 사진을 꺼내놓자 기베르는 이 사진들에서 큰 영감을 받았고, 그와 함께 이 경험을 만화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끝나지 않은 채로 상자 속에서 잠들어 있다. 만화는 이 자고 있는 이야기들을 깨우는 방법들 중 하나다." (이마뉘엘 기베르)

르페브르와 기베르는 만화책의 칸 속에 밀착 인화한 사진을 배치해 마치 사진도 만화책 페이지의 한 칸 속 그림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꾸몄다. 사진과 그림은 상호 보완 작용을 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낸다. 기베르의 그림은 셔터를 누르던 순간 르페브르의 표정과 손짓, 주변 배경을 담아내고, 르페브르의 사진은 그가 무엇을 봤는지 알려준다. 영화로 말하면 일반 쇼트는 그림으로, 시점 쇼트는 사진으로 교차하는 셈이다.


누구도 보지못한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낸 르페브르는 그러나 2007년 앙굴렘 국제만화 페스티벌에서 이 작품이 그해의 주요 작품으로 선정되는 기쁨을 맛본 지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그토록 넌더리를 냈던 아프가니스탄에 1986년 이후로도 일곱 차례 더 방문해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나아가 아시아권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에 지속적이고 커다란 애정을 갖고 생전에 <아프가니스탄 견문록>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평화의 사진가> 속 4개월이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가뜩이나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이 없는 나라에서, 그것도 20년 전의 아프가니스탄 분쟁 이야기는 어려운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디디에 르페브르의 뷰파인더를 통해 본 그곳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인간의 땅'이며, 마르지 않는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줄리안 오피를 떠올리게 하는 세련된 삽화와 개성 강한 실제 인물들, 그리고 무엇보다 디디에 르페브르의 감수성에 매료되는 것도 괜찮은 경험이다. <평화의 사진가> 한국어판은 르포라면 저널리즘 형식 외에는 거의 접해본 적 없는 한국 독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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