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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노래가 흘러나오자 혁명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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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노래가 흘러나오자 혁명이 시작됐다

[손호철의 포르투갈 여행기] 리스본(4) : 카네이션혁명과 GNR 박물관

나는 알고 싶다네. 내가 누군지
내가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지
누가 나를 버렸고
나는 누굴 잊어버렸는지
나는 나 자신에게 묻고 있다네.
나는 우리에 대해 알고 싶다네.


1974년 4월 25일 밤 10시 50분, 포르투갈의 한 라디오방송에는 이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2주 전 유럽 최고의 가수와 노래를 뽑는 '유로비젼 1974년' 경연에서 포르투갈 대표로 출전한 파울루 데 카르발루(Paulo de Carvalho)라는 가수가 부른 '그리고 이별 이후에(E Depois do Adeus)'라는 노래이다. 50년 이상 군사 독재에 신음하고 있던 포르투갈의 현실에 대해 묻는 것 같은 의미심장한 가사의 이 노래는 경연에서 저조한 성적으로 떨어졌고, 이후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스웨덴의 그룹 아바(ABBA)가 우승을 차지했다.

주요 군부대에서 숨을 죽이며 라디오를 듣고 있던 군부의 개혁파들은 이 노래가 나오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노래는 예하 부대들에게 민주화를 위한 쿠데타에 돌입하라는 비밀신호였다. 개혁파는 계획대로 정부관공서, TV방송국 등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방송에는 제카 아폰사(Zeca Afonsa)의 '갈색 할아버지 마을(Grandola vila morena)'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목표지점들을 다 장악했다는 신호였다. 50년간 포르투갈을 옥죄어온 군사독재는 유로비젼 참가곡인 '이별 이후'에 의해 노래 제목처럼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포르투갈은 1926년 군사 쿠데타에 군부가 집권한 뒤 근 50년 동안 파시스트 독재 정권이 지배해 왔다. 이 점에서도 포르투갈은 1930년대 프랑코가 쿠데타를 일으켜 독재를 해온 이웃나라 스페인과 비슷하다. 다만 스페인처럼 긴 내전을 겪지는 않았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변화가 일어났다. 오랜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누적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잠비크, 콩고, 앙골라, 기니 등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누르기 위한 전쟁이 지속되면서 국민 등의 불만이 쌓여갔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군사독재를 무너트린 것은 민중들이 아니다. MFA라는 군부개혁파였다.

▲ 경찰이면서 군대이기도 한, 포르투갈의 독특한 경찰 GNR ⓒ손호철

쿠데타가 일어나자 정부군은 일종의 '전투경찰'이라고 할 수 있는 GNR 본부에 지휘소를 설치하고 저항했다. GNR(Guarda Nacional Republicana, 공화국 국민방위대)는 프랑스를 모델로 만든, 포르투갈 특유의, 경찰이면서 군이기도 한 특수한 경찰이다. GNR은 도시를 뺀 농촌과 지방의 치안과 고속도로 교통, 국경, 세관, 해안경비, 자연보호, 평화유지군과 같은 해외파병을 담당하며, 경찰 업무와 관련해서는 내무부장관의, 군 문제와 관련해서는 국방장관의 지시를 받는다.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거리로 달려 나왔다. 특히 그 중 일부가 꽃 가게에서 카네이션을 사가지고 나와 쿠데타군에게 선물했다. 이들은 친정부군에게도 다가가서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아줬다. '카네이션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국민들이 쿠데타를 지지하자 친정부군은 하나씩 입장을 바꿔 민주화를 지지했다. 군부 독재는 결국 항복하고 민주화에 합의하게 된다. 50년의 독재가 막을 내리고 포르투갈에도 민주주의 시대가 온 것이다.

▲ 카네이션 혁명 당시 군인이 메고 있던 기관단총에 카네이션을 꽃아놓았다. ⓒ손호철

어느 나라를 가건 내가 반드시 들르는 곳이 있다. 역사박물관이다. 거기를 가면 그 나라의 역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재 정권이거나 오랜 독재를 경험한 나라들은 대부분 역사박물관이 없다. 대신 유물들을 모아놓은 유물 중심의 고고학 박물관이 역사를 대신하고 있다. 역사를 이야기하기에는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있었던 것이 대부분 유물 중심의 고고학 박물관이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서야 처음으로 광화문에 본격적인 역사박물관을 만들었다. 헌데 이는 충분한 논의가 없이 졸속으로 만든 데다가 이름부터가 '한국현대사 박물관'이 아니라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으로 되어 있고 독재 정권들을 미화하는 등 문제가 많다. 제대로 된 역사박물관은 제주도에 있는 제주 4.3 평화박물관이다. 거기에는 4.3의 비극이 일어난 해방공간의 상황으로부터 4.3의 진행 과정 등을 아주 잘 설명해 놓았다.

▲ 제대로 된 역사박물관인 제주 4.3 평화박물관. ⓒ손호철

포르투갈도 오랜 독재를 겪었기 때문에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역사박물관이 없다. 포르투갈의 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 없는지 인터넷을 여기저기 찾아보다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것은 GNR박물관을 가보라는 팁이었다. 포르투갈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전투경찰박물관을 가보라?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릎을 쳤다. GNR박물관이 역사박물관 역할을 해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GNR 본부가 카네이션 혁명 당시 정부군 본부로 사용되는 등 카네이션 혁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리스본은 여러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리스본을 제대로 구경하려면 다리가 좀 아파야 한다. GNR박물관은 리스본에서도 아주 가파른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인기 여행지인 페드로 4세 광장에서 지그재그로 만들어진 계단을 끙끙대고 올라가 다시 한참을 언덕길을 오르자 경찰복을 입은 경찰이 눈에 뜨였다. 찾고 있던 GNR 본부였다. 문 앞에는 황금투구 모양의 모자를 쓴 의장대 경비병에게 히잡을 한 이슬람계 관광객 부부가 부탁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본부 왼쪽에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박물관 안내로 그동안 35만 명이 다녀갔다는 선전판이었다. 경찰박물관에 35만 명이나 다녀갔다는 것은 그만큼 리스본에 볼만한 역사 관련 박물관이 없다는 이야기다.

▲ GNR 박물관으로 가는 지그재그형 언덕길 ⓒ손호철

▲ GNR 박물관으로 가는 지그재그형 언덕길 ⓒ손호철

▲ GNR박물관 입구의 초소(좌)와 35만이 거쳐갔다는 선전문 ⓒ손호철

입구에 서자, 쿠데타라고는 박정희, 전두환 같은 극우독재 정권을 세우기 위한 쿠데타만 보아온지라, 유학 시절 민주화와 급진적 개혁을 위한 포르투갈의 군부 쿠데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하도 신기해서 이에 대해 자세히 찾아본 기억이 났다. 박물관으로 들어가자 '600년 GNR의 역사'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600년이면 언제지" 하고 계산해 보니 포르투갈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인 1385년 알주바르타 전투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읽어 보니 맞았다. 박물관은 GNR의 역사를 자료 등을 통해 보여주고 있지만 이를 설명하기 위해 포르투갈 역사를 같이 기술하고 있어 포르투갈 역사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포르투갈은 오래전에 로마의 식민지였고 8세기부터는 아랍이 지배했지만 12세기 초 아랍을 몰아내고 독립을 했다. 우리가 아는 포르투갈이 세워진 것은 12세기 초이다. 그러나 이후도 스페인 북부의 레온왕국이 포르투갈 북부의 일부를 지배해오다가 1385년 전투에서 포르투갈이 승리함으로써 확실히 독립국가가 됐고 영토도 지금처럼 차지하게 됐다. 이 때 처음 GNR 전신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 포르투갈과 GNP 600년 역사 ⓒ손호철

두 번째 변신은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지진과 같은 거대한 자연재해의 대응, 구호, 이후 생겨난 사회불안 등에 보다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군 헌병대로 재정비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기본적으로 포르투갈이 왕정체제였기 때문에 GNR은 왕의 지시를 받는 조직이었다. 그것이 현재의 GNR로 바뀐 것은 왕정이 무너지고 포르투갈이 근대적인 공화정으로 바뀐 1910년이라는 설명이다. GNR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도 이 때이다. 이후 1924년 군사 쿠데타에 의해 군사 독재의 하수인으로 변했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또 한 번 변화를 겪게 된다.

이 박물관을 보고 나니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포르투갈의 역사가 확실하게 시대구분이 됐다. 포르투갈 역사는 크게 보아 로마 지배-아랍 지배-12세기 초 독립-14세기말 독립 재확인과 영토 확정-1755년 대지진-1910년 공화정-1924년 쿠데타-1974년 민주화로 특징지울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박물관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를 그대로 드러내 놓고 있다는 점이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포르투갈에는 프랑스 등의 영향으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왕정을 무너트리고 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저항들이 거세지는데, '왕의 수족'으로 이 같은 운동을 탄압하고 분쇄하는데 앞장선 것이 자신들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 같은 자기고백은 계속되고 있다. 1924년 쿠데타 이후 '국민의 경찰'이 아니라 '군사 독재의 앞잡이'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한 것이 자신들임을 고백하고 있다. 이 시기에 재미있는 것은 스페인 내전과 이후 프랑코 독재 기간 동안 국경을 지키던 GNR이 프랑코군을 피해 국경을 넘어오는 공화파 수만 명을 구해줬다는 설명이었다.

▲ 군사독재 정권은 1960~70년대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운동 세력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손호철

이를 보고 있자 우리도 이 같은 경찰박물관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역사적 뿌리는 조선시대의 포도청이라고 보고 왕의 수족으로 민중들을 수탈하고 억압한 역사에 대해 자기반성문을 전시하면 될 것이다, 이후 일제하에서는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독립운동가들을 감시, 체포, 고문한 전력을, 해방 후에는 노덕술 같은 악덕 친일경찰들이 다시 경찰이 되어 의열단을 만든 김원봉과 같은 독립투사들을 빨갱이로 몰아 고문한 전력을 고백해야 한다. 이어 군사 독재 하에서 수십 년간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극우 독재정권의 주구'로 민주투사들을 탄압해 온 역사를 전시한다면 좋은 역사적 교훈이 될 것이다.

이 박물관의 백미는 역시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이다. 이 혁명에 대해 발발로부터 개혁파 쿠데타군과 정부군 양측의 움직임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기록해 놓아 혁명의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 데 아주 유익하다. 특히 여러 사진 자료와 전시물들이 뛰어났다. 개혁파의 거사 장면으로부터 거리로 달려 나온 리스본 시민들의 시위, 시민들이 꽂아준 카네이션을 총구에 꽂고 있는 군인들, 독재자들의 사진을 벽에서 뜯어내는 시민들 등 생생한 혁명의 현장들을 느낄 수 있다.

▲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생생한 사진들 ⓒ손호철

▲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생생한 사진들 ⓒ손호철

▲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생생한 사진들 ⓒ손호철

▲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생생한 사진들 ⓒ손호철

▲ 1974년 카네이션 혁명의 생생한 사진들 ⓒ손호철

카네이션 혁명 자료를 보고 있자, 좋아하는 좌파 정치학자인 니코스 풀란차스(Nicos Poulantzas)가 생각났다. 1960~70년대 자본주의 국가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이론 틀을 개발해 20세기 최고의 국가론자로 불리는 그는 그리스 출신이지만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활동했다. 그는 프랑스에 있으면서도 그리스 공산당에 가입해 있었는데, 당시 그리스는 포르투갈, 스페인과 함께 독재 체제였다. 1970년대 초 그리스 공산당이 그에게 그리스의 미래에 대해 글을 부탁했다. 그는 탁월한 국가론의 지식을 발휘해서 그리스, 포르투갈 등이 유럽의 주변부로 영국, 독일 등 유럽 중심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민주 체제인 중심부 국가들과 달리 독재 체제가 오래갈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 글이 나오자마자, 포르투갈과 그리스의 군정이 무너졌다. 특히 둘 다 군부의 내부 분열로 무너졌다.

헤겔의 표현대로, 지혜의 신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내려야 비상을 시작한다." 즉 아무리 뛰어난 지식인도 대중을 이해하고 역사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사후적 설명이나 하는 것이고, 김수영 시인의 말대로 풀(민초들)은 바람보다 더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놀란 그는 <독재의 위기>라는 책에서 자신이 군부 체제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민중의 힘을 과소평가했다는 자기반성을 했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그리스의 독재를 무너트린 '직접적인 원인'은 군부의 내분(개혁파의 등장)이지만 이 같은 분열을 가져온 것은 민중들의 저항이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것'은 민중의 저항이었다고 분석했다.

유학 시절 이 글을 읽고 나는 무릎을 쳤다. 1979년 박정희 체제의 몰락을 기가 막히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포르투갈과 그리스의 군부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정권은 민중봉기에 의해 무너지지 않았고 김재규의 암살에 의해 무너졌다. 이 점에서 유신체제를 무너트린 '직접적인 원인'은 10월 26일의 '그 때 그 사람'이다. 그러나 김재규를 그 같이 만든 것은 YH여공들의 야당당사 점거 농성과 부마항쟁이었다는 점에서, 유신 체제 붕괴에 '궁극적으로 결정적이었던 것'은 (포르투갈,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민중들의 저항이었다.

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카네이션 혁명 자료를 보고 있자 감개가 무량했다. 전시의 마지막은 실제 정부군들이 들고 있었던 기관단총에 카네이션을 꽃은 실물 전시물과 그리고 민주화 이후 '국민의 경찰'로 다시 태어난 GNR에 초등학교 학생들이 보낸 사랑과 감사의 카드들이었다. 너무 강력하고 뭉클한 전시물이었다. 카네이션 혁명이 없었다면 포르투갈 사람들이 지금처럼 자유를 즐길 수 있겠는가? 카네이션 혁명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이처럼 자유롭게 포르투갈 여행을 즐길 수 있겠는가? 카네이션 혁명 만만세다!

▲ 새로 태어난 GNR에 대한 어린이들의 감사와 사랑의 편지들 ⓒ손호철

▲ GNR박물관의 다양한 자료들 ⓒ손호철

▲ GNR박물관의 다양한 자료들 ⓒ손호철

▲ GNR박물관의 다양한 자료들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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