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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과 장기를 사고파는 시장이 생긴다면…

[김윤태 칼럼] 사회학의 고전 <선물관계>, 경제적 인간을 정면 비판하다

왜 우리는 헌혈을 하는가? 자신의 혈액을 돈도 받지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다수 경제학자들은 모든 인간이 자기 이익을 추구한다고 가정한다. 이를 합리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이기주의가 인간의 기본적 본성이라고 본다. 그러면 헌혈을 하는 사람들은 비합리적인가? 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무익한 행동을 하는 것일까? 이 흥미로운 문제를 영국 사회학자 리처드 티트머스(Richard H. Tittmuss)가 탐구했다.

주류 경제학의 토대를 뒤흔든 <선물 관계>의 충격

1970년 티트머스가 출간한 <선물 관계 : The Gift Relations>는 영국과 미국의 헌혈 제도를 비교하였다. 전 국민에게 보편적 의료 혜택을 제공하는 국가보건서비스 NHS를 만든 영국은 자발적 헌혈제도를 운영한다. 반면에 민영보험 위주의 미국에서는 혈액의 상업적 거래가 가능했으며 수익을 추구하는 혈액은행이 많았다. 두 나라 가운데 어느 나라의 혈액의 질이 더 좋을까? 어느 나라의 운영 체제가 더 효율적일까? 티트머스가 발견한 결과는 매우 충격적이었다.

<선물 관계>는 네 가지 중요한 발견을 제시했다. 첫째, 경제학자들의 예상과 달리 혈액 '시장'에서 자원의 '효율적 할당'이 이루어지 않았다. 미국의 혈액 시장은 만성적 부족이 발생했으면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균형의 개념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미국에서는 오염된 혈액이 공급되면서 사회적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만들었다. 티트머스가 발견한 통계 자료를 보면, 미국에서 거래되는 혈액의 질이 훨씬 더 나빴다. 심지어 간염, 성병, 마약중독에 걸린 사람들의 질 낮은 혈액이 공급되었다. 환자의 질병과 죽음의 위험은 훨씬 더 높았다.

둘째, 미국의 혈액 시장은 비효율적이었다. 행정적으로 비효율적이었고 더 많은 관료주의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영국의 헌혈 제도보다 미국에서 5배에서 15배까지 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사적 시장이 국가보다 더 효율적일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았다.

셋째, 혈액시장의 재분배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의 혈액이 부유한 사람에게 전달되었다.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받기 위해 혈액을 판매했으나, 정작 자신들이 병원에서 혈액이 필요한 경우에는 돈이 없어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반면에 민간 혈액은행에 돈을 지불할 수 있는 부유한 사람들이 더 많은 혜택을 받았다.

넷째, 가장 중요하게도 혈액 시장은 궁극적으로 사회를 파괴했다. 헌혈을 위한 이타적 동기를 약화시키고 편협한 이기심을 조장했다. 결국 시장 관계가 사회적 인간을 해체한다.

<선물관계>를 둘러싼 논쟁

티트머스의 <선물 관계>는 출간되자마자 커다란 반향과 논쟁을 일으켰다. 특히 그의 책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케네스 애로우(Kenneth Arrow) 교수가 <뉴욕타임즈>에 서평을 게재하였다. 이어서 1975년 <철학과 공공문제> 저널에서 애로우는 비록 티트머스의 공헌을 칭찬했지만, 경제학자의 시각으로 티트머스의 논리를 비판하였다. 그는 미국의 상업 혈액 시장이 실패했다는 지적을 인정하지만, 낭비와 상업적 시스템 사이의 연계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유명한 호주 윤리학자 피터 싱어(Peter Singer) 교수는 같은 저널에서 애로우 교수가 지적한 문제를 티트머스가 자신의 책에서 효과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티트머스에 따르면, 혈액은 소멸되는 것이기 때문에, 효율성은 규칙적인 예측 가능한 공급에 의존하며, 상업적 시스템은 자발적 시스템보다 불규칙적인 "사회의 밑바닥(skid row)" 유형의 혈액을 더 많이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티트머스는 혈액 공급에 "시장의 법칙"이 도입되면, 개인은 무료로 이타적으로 혈액을 기증할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티트머스는 그들이 "시장에 의해 강요를 받고 제약을 받는다"고 말한다. 결국 혈액의 시장화는 주류 경제학의 가정처럼 개인이 선택할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방해한다. 티트머스의 주장을 옹호하는 싱어는 애로우의 주장과 달리 경제적 분석이 몰가치적일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티트머스의 연구가 혈액 공급 시스템에 적용한 총체적 접근법은 경제적 분석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티트머스는 사회정책이 경제적 효과를 고려하는 동시에 사회 통합이라는 윤리적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정책의 윤리적, 가치적 차원

티트머스의 <선물 관계>는 자유시장과 신자유주의를 주창한 영국의 경제문제연구소(IEA)의 혈액 시장을 지지하는 주장에 정면으로 반격을 가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 시장 논리가 사회의 운영을 지배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효과적으로 논박하였다.

경제문제연구소는 영국의 국가보건서비스와 국가수혈서비스가 시장 메커니즘을 확대하면 더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보편적 복지국가의 이론가이자 열렬한 옹호자인 티트머스는 경제문제연구소의 주장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사회에서 시민들 사이의 사회계약, 평등주의, 공동체주의 관계를 만든 복지국가에 대한 정면 공격이라고 비판하였다.

티트머스는 혈액을 주고받는 사회적 관계를 넘어서 근본적인 윤리적,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는 혈액의 기증이 민주적 복지국가에서 시민권의 중요한 측면이라고 보았다. 만약 자아를 상징하는 친밀한 요소인 혈액을 시장의 힘으로부터 분리하지 않는다면, 의료, 교육, 사회보장, 입양아 위탁보호와 같은 모든 종류의 사회서비스를 결국 시장에 완전히 개방될 것이다. 혈액의 구매가 아니라 혈액의 공유는 집단적 가치를 근본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프랑스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Marcell Mauss)의 저서 <증여론>을 인용하면서 혈액은 거래가 아니라 기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는 시장과 어떻게 다른가?

선물의 순환은 공통적 사회관계의 형성과 시민 사이의 상호성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혈액을 주고받는 행위는 비인격적 상호성과 동료 시민들 사이의 포용의 감정을 만든다. 반면에 혈액을 사고파는 행위는 상업적 거래를 위해 일시적 관계만 가지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도구적 상품 관계를 만든다. 티트머스는 혈액이 일단 시장의 힘에 의해 시장화되면 다른 모든 사회적 영역이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시장의 기능이 중시돼야 하는가? 혈액과 장기 시장의 만성적 공급 부족을 해결하고, 교환 메커니즘을 개선하기 위해 시장의 기능을 강화해야 하는가?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는 혈액과 장기를 사고팔지 않는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백화점에서 혈액과 장기를 구매할 수는 없다. 고기와 과일은 원산지를 명기하고 최상품을 높은 가격으로 거래하지만, 혈액은 원산지 표기에 따른 차별적 가격을 매기지는 않는다.

티트머스의 <선물 관계>는 경제의 신자유주의화와 인간의 인체 조직의 상품화를 탁월하게 연결한다. 신체 장기를 사고파는 시장이 출현하면 모든 사회생활은 시장의 논리에 의해 지배를 받는 길을 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티트머스의 주장은 묵시적 예언처럼 보인다. 오늘날 우리는 신체 장기의 시장화와, 지구적 차원의 생명 경제의 등장을 목도하고 있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서구 사회에서 유가 파동, 경제의 탈규제화, 보편적 복지국가의 약화가 발생하면서 빈곤과 불평등 뿐 극단적 개인주의화, 성형수술, 과소비, 우울증, 정신질환, 자살율, 살인율 등 사회문제의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 티트머스의 책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가치를 깨닫게 만드는 연구이다. 또한 우리의 가슴을 저미는 심오한 연구이다.

보편주의 복지국가의 이상

오늘날 티트머스가 정열적으로 옹호했던 사회민주주의 가치는 점점 약화되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케인즈 경제학과 베버리지 보고서의 정신이 사라지면서 사회는 자유시장의 원리의 지배를 받고 모든 사회적 관계는 상업화되고 파편화되었다. 그러나 혈액의 시장화를 제한하자는 그의 호소력 있는 주장에 따라 혈액, 골수, 장기는 상업화의 세계에 빠지지 않았다. 혈액과 장기의 기증을 시장과 분리하는 것은 중요한 인간적, 문화적 성취이다. 자유시장의 논리가 세계를 지배하는 현 시대에서 혈액과 신체 장기의 선물 경제(gift economy)를 유지하는 티트머스의 통찰력은 우리에게 여전히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티트머스의 <선물 관계>가 출간된 후 40여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에서 사회적 관계는 해체되고 시장에 의한 상업화가 가속되고 있다. 한국의 학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막대한 사교육비를 지출해야 하고, 신혼부부는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거액의 대출을 받아야 하고, 노인이 되면 병원과 요양기관의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사교육비, 부동산 거품, 과잉진료의 폐해는 시장 실패의 어두운 그늘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시장에서 돈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사회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시장의 균형을 절대적 진리로 신봉하는 사람들은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시장은 지속적으로 불평등을 만든다. 결국 시장 메커니즘은 효율성을 위한 것이지 사회통합을 위한 것은 아니다.

시장 원리와 효율성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경제적 인간(호모 이코노미쿠스)'은 선물 관계를 비효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시장의 경쟁은 당연한 것으로 본다. 입시 경쟁, 취업 경쟁, 승진 경쟁을 자연적인 법칙으로 본다. 그러나 사회가 작동하는 논리는 이보다 미묘하고 복잡하다. 지나친 경쟁은 사회적 연대감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인간(호모 소키에테스)'을 해체한다. 오히려 사회적 결속은 많은 경우 선물 관계에 통해 이루어진다. 보편적 시민권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에게 복지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복지국가는 문명화의 결과로 볼 수 있다. 20세기 위대한 영국 사회학자 T. H. 마셜이 말한 대로 모든 사람이 가지는 동등한 지위를 가리키는 시민권의 개념이 없다면 사회와 문명은 제대로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명제는 지금 복지국가의 이상과 꿈이 희미해지는 한국 사회도 깊이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다.

* 이 글은 리처드 티트머스의 책 <선물관계: 혈액에서 사회정책까지>(김윤태, 윤태호, 정백근 옮김, 이학사 출간, 2019, 519쪽)에 게재된 글 ‘<선물관계>와 사회적 인간’에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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