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에 전면 개정했다는 산업안전보건법이 오는 2020년 1월 16일부터 시행된다. 고용노동부는 법 시행만으로 이제까지 '위험'만을 '외주화'하던 산업현장의 관행이 변화하고, 하청 노동자도 사업장에서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산업재해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 자신한다. 고용노동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노동자 생명 안전 확보를 평생 과제로 살아온 활동가의 입장에서 가슴 떨리는 설래임과 기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기대는커녕 걱정과 우려가 앞선다.
전면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만드는 과정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 법안은 노사단체·전문가 의견수렴도 없이 밀실에서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산재예방제도 대부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실태와 부실한 지도감독 실태에 대한 분석과 고려가 없었다. 또한, 예방주체인 노동자와 노동자대표의 참여권과 알 권리 확대에 대한 언급이 없고, 위험의 외주화를 막고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방안도 없다. 또 중대재해와 산재다발 사업장 처벌강화 방안이 없어 재해예방을 위한 근본적 성찰과 대안이 될 수 없는 불과했다. 이마저도 국회 통과과정에서 누더기가 되었다.
산재예방제도가 무력화된 현실과 제도개선 필요내용이 반영되지 않은 전부개정
제대로 된 법안을 위해 노동부는, 산재사망 세계 1위 국가라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는 현행 산업재해 예방제도와 산업안전보건법의 규정 운영 실태를 종합적으로 진단·평가하고, 이를 토대로 법안을 설계하여 산업재해예방제도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야 했다.
그러나 전면개정법안은 산재예방제도가 무력화된 현실과 제도개선 필요내용을 전체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산업안전보건법에는 노동부가 사업장 산재예방을 위해 사업주의 산업안전보건법 준수 여부를 지도 감독할 책무가 주어져 있다. 노동부는 근로감독관들이 감독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할 수 있기나 한 것인지? 감독 과정과 결과가 사업장 법 준수 강제와 재해예방체계 구축으로 직결되고 있는지? 법은 감독을 제대로 뒷받침하고 있는지? 등을 검토해야만 했다.
현장에서 매년 최소 7만∼10만 건에 달하는 산업재해가 발생하고 있는데, 정작 노동부는 그때마다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지 않는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는 것은 '노동자가 사망한 경우, 중대재해가 발생한 경우뿐이다' 사망사고와 같은 중대재해는 동일 원인의 사고가 반복하다 결국 사망사고로 이어지는 것이다. 모든 산업재해에는 안전보건조치 미실시나 안전교육 미실시 같은 구체적 산안법 위반사항이 숨어있다. 노동부는 산재발생이라는 사전 위험경고를 무시한 채 큰 사고를 키우고 있다.
사고가 발생해도 법 위반 여부를 조사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자행하면서 산재사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노동부의 주장을 믿을 사람은 없다.
노동자와 노동자대표 참여권과 알 권리 확대가 빠진 빈 껍대기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을 만든 1981년부터 지금까지 산안법의 가장 큰 맹점은 피해자이자 예방 주체인 현장노동자의 알 권리와 참여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문재인 정권은 높은 지지율과 국회 다수당이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이 만든 산안법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데 실패했다. 사업장의 중대재해 발생을 막고 재해예방 사업 활성화와 효과적인 추진은 당사자인 노동자와 노동자대표의 참여가 관건임에도 전부개정 법안에 노동자와 노동자대표 참여권 관련 진전된 내용은 없었다.
산재예방제도에 있어 노동자의 참여는 산업안전보건위위원회 운영과 명예산업안전감독관 제도 근골격계 유해요인조사 등에 협소하게 규정되어 있을 뿐, 산업재해예방제도 전반에 걸쳐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참여를 명시하고 있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하청과 비정규노동자의 참여권리는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 산재 예방과 안전 관리를 위해 시행하고 있는 대부분의 예방제도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배경과 원인에는 노동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의견제시를 불허하는 참여권 제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산재 예방제도의 구체적인 실태를 살펴보면 분명히 확인된다.
산재예방제도의 핵심인 '위험성 평가'제도를 살펴보자. 이 제도는 재해발생 위험원인을 낱낱이 평가 분석하여 재해의 근본 원인이 없어질 때까지 재평가와 개선을 반복하도록 하여 사업장 재해예방시스템을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실시한다. 그러나 노동부와 산업안전공단은 위험성 평가 기준조차 제대로 마련하지 않고, 산업안전보건법상 위험성 평가 실시 주체를 사업주와 관리감독자로 규정하여 노동자 참여를 배제하고 노동자 개선 의견을 반영할 통로를 마련치 않았다.
회사가 실시한 위험성 평가결과에 대해 노동자에게 설명하거나 알려야 할 의무도 부여하지 않았다. 노동부는 사업주가 위험성 평가를 제대로 실시하고 있는지 제대로 지도감독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험성 평가는 회사가 의례적으로 실시하는 안전점검 수준으로 전락했다. 실태가 이런데도 전면 개정했다는 산안법은 예방주체인 노동조합이 위험성 평가에 대해 적극 참여하고 감시하는 길을 여전히 봉쇄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사업주가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지 않거나 노동자 참여를 보장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처벌 조항을 명시하지 않아 근로감독관이 강제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가스누출폭발 같은 중대산업사고 예방을 위해 실시하고 있는 ‘공정안전보고제도’의 실상도 살펴보자. 노동자에게 공정안전보고서 내용을 고지하도록 법적의무가 부여되어 있으나, 대부분 사업장은 대외비나 기업비밀로 규정하고 있어 노동자에게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는다. 노동자는 공정안전보고서를 볼 수조차 없고 사전 안전 확보를 위해 필요한 내용을 미리 교육받지 못한다. 제도 운영과정에서 노동자 참여는 배제되고 시설과 설비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거나 의견을 제시할 권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정안전보고는 실효는 없고 사업주는 시늉만 하는 제도일 뿐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화학공장의 화재, 폭발, 누출 소식이 들려오는 나라에서 공정안전보고제도는 화학사고와 중대산업사고 예방의 발판이 되기는커녕, 기업의 발목잡는 규제로 비난받고 있다. 일본의 수출규제를 빌미로 경제 5단체가 화학물질 관련법 규제완화를 요구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즉각 기업 고충을 해소하라며 행정부를 압박하고 나섰다. 그 결과 공정안전보고서 사전 심의기간을 90일 이내에서 60일로 축소하는 하위법령 개악을 통해 공정안전보고제도가 예방제도의 기능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있다.
화학물질 취급 노동자와 직업병 피해노동자의 알권리를 차단한 전면 개정
전면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물질안전보건자료 기재 대상에 유해·위험성이 국제적으로 확인된 화학물질만 물질안전보건자료에 기재토록 하고 있다. 현재 약 10만 종의 화학물질이 전 세계적으로 유통, 사용되고 있으나 전 세계적으로 유해·위험성을 정확히 확인한 화학물질은 WHO(세계보건기구) 산하 IARC(국제암연구소)에서 규정하고 있는 1천여 종에 불과하다. 전체 화학물질의 1%만이 어떤 위험이 있는지, 어떤 유해성이 있는지 확인됐을 뿐, 아직도 유해위험 여부를 확인조차 하지 못한 99% 물질이 노동현장에서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피해자가 6,578명, 사망자 1,449명이 나온 가습기 살균제 사태의 주범 메틸아이소티아졸리논(MIT) 성분은 국제적으로 확인된 물질일까? 그렇지 않다.
2016년 메탄올 중독에 따른 시력상실과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의 연이은 죽음으로 유해화학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직업병 발생의 근본 원인은 노동자 자신이 어떤 위험한 물질을 쓰는지 가장 기초적인 정보조차 제공받지 못하고, 유해화학물질 노출로부터 건강을 지키기 위한 아무런 대비조차 마련하지 못한 작업환경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에 전면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유해성이 확인되지 않은 미분류된 유해화학물질은 고용노동부에만 별도로 제출하고, 국제기준에 따라 유해성·위험성이 확인된 물질만 사업장 물질안전보건자료에 기재하고 게시하게 했다. 심각한 사실은 노동부가 '국제기준'이 무엇인지 아직도 밝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기준이라면 전 세계에서 유통 중인 화학물질 중 99% 물질에 대한 정보를 한국의 노동자는 제공 받지 못한다. 유럽연합 규정인 RICH제도가 규정이라면 전 세계에서 유통 중인 화학물질 중 90% 가량에 대해 노동자는 정보를 제공 받지 못한다.
결국, 전면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이 적용되면 사업장 취급 화학물질의 유해 위험성을 전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화학물질 취급에 따른 보호조치 요구가 소극적일 수밖에 없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건강장해가 노동자에게 발생해도 노동조합과 피해 당사자는 취급물질을 구성한 전체 성분이 아닌 국제적으로 확인된 일부 성분의 유해위험성 외에는 확인할 수 없어 질병과 업무와의 관련성 규명에 어려움이 따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질병 발생의 책임이 개인 건강관리소홀로 자연스럽게 전가되고, 직업병 발생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며, 알권리는 더욱 제한되고 차단된다.
한편 전면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은 영업비밀 등의 이유로 화학물질의 명칭 및 함유량을 물질안전보건자료에 밝히지 않는 사업주는 노동부 승인을 받아 해당 화학물질의 명칭 및 함유량을 대체 표기할 수 있게 했다. 만약 노동자에게 중대한 건강장해가 발생한 경우 ‘영업비밀’ ‘대체자료’ 등 비공개 정보의 제공을 요구할 수 있으나 이 권한을 진료 의사, 보건관리자 및 보건관리전문기관, 산업보건의, 근로자대표, 역학조사 기관,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로 제한하여, 정작 직업병이 발생한 피해노동자 당사자를 정보 제공 요구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이는 직업병 피해 의심 노동자가 자신이 취급 노출됐던 화학물질에 대한 접근권리와 알 권리를 차단하는 것이며, 산재신청과 승인을 위해 자료를 검토하고 노력할 기회조차 가로막는 것이다.
노동자가 죽어가도 근로감독관이 에방대책 수립을 강제할 수 없는 개정
전면 개정법안은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대한 노동부의 작업중지 범위를 극단적으로 축소했다. 또한, 기업의 요구를 반영하여 사업주가 노동자를 배제하고 졸속으로 작업중지를 해제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수많은 노동자의 목숨을 앗아간 2017년 삼성중공업 크레인 참사와 STX조선 폭발사고의 대가인 ‘중대재해 근절과 근본적 대책마련을 위한 작업중지 원칙’을 노동부가 앞장서 폐기했다. 지난 4월 노동부는 “필요성을 입증하지 못한 규제는 폐지 또는 개선한다”며 “중대재해 발생 시 작업중지 명령 대상을 해당 작업 및 중대재해 발생작업과 동일한 작업으로 엄격히 제한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5월 고용노동부가 만든 기존의 <중대재해 발생 시 작업중지 명령·해제 운영기준> 을 심각하게 훼손한 <중대재해 발생에 따른 작업중지의 범위·해제절차 및 심의위원회 운영기준>을 발표했다.
고용노동부 일선 지청장들과 근로감독관 조차도 "이제 건설현장에서 근본적 안전대책을 강제할 수 없게 됐다. 그동안 작업중지 명령이 있어 작업을 중지시키고 근본대책 마련을 지시 강제할 수 있었는데 앞으로는 추락 사망사고가 발생해도 사업주가 사고 장소에 안전난간대나 추락방지망 하나 만 설치하면 작업이 재개되게 된다. 이 정부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개탄스럽다"고 우려하고 있다.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 작업중지 명령의 의미는 감독 기관인 노동부가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대책을 마련하라는 것이다. 생산과 이윤을 위해 노동자 생명을 희생하는 위법하고 부도덕한 회사 운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정부와 공권력의 엄중한 의지표명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고용노동부는 중대재해 발생 사업장에 대한 근본대책 마련을 지시하는 ‘작업중지 명령’과 근본적인 대책 마련 여부를 확인하는 ‘해제절차’를 불필요한 규제로 치부했다. 노동자가 목숨을 잃어도 근본적인 대책 마련은커녕 생산 차질을 우려하며 작업재개에만 혈안이 된 자본의 주장을 대통령과 노동부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받아들인 것이다.
전면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의 문제는 이뿐이 아니다. 지난 4월 노동부가 입법예고한 하위법령은 쓰레기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어 전문가와 노동계의 신랄한 비판에 직면해 있다. 문재인 정권은 ‘김용균법’이라고 포장했으나 실상은 김용균을 두 번 죽이는 내용이다. 죽은 김용균 노동자가 수행했던 작업과, 매년 50명 이상씩 죽는 조선업 위험작업과 같은 유해·위험 업무에 내몰린 비정규직을 도급금지 대상에서 제외했다. 건설현장에서 중대재해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덤프, 굴삭기 등을 도급승인 대상에서 제외했다. 법을 위반해 노동자를 사망하게 한 사업주를 엄격히 처벌하라는 처벌 하한형 도입도 폐기했으며, 극단적으로 축소한 작업중지 명령마저도 재차 사업주 요구를 수용해 노동자를 배제한 즉각 해제 절차를 덧붙였다.
전면개정 법안으로 노동자의 생명 안전을 보호 할 수 없다
전면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안은 문제점이 차고 넘쳐 산재예방에 기여하기 어려운 지경인데도 국회는 그마저도 개악을 더해 통과시켰다. 노동존중을 포기하고 기업 편들기와 안전보건 규제완화로 전향한 문재인 정권의 정책기조로 인해 안전관련 법안의 완화가 속도를 더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무엇도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원칙을 확인하고, 노동자가 재해 예방에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안전보건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법을 만들어야 한다.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산업안전보건법 전면 재개정’이 필요하다. "안전 때문에 눈물짓는 국민이 단 한 명도 없게 만들겠습니다. 위험의 외주화 방지법 제정하겠습니다. 중대재해 기업처벌법을 제정하겠습니다" 모두 대통령의 약속이다.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권력이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삼켜버린다면 분노한 노동자와 시민이 이를 끄집어내서 되살려야 한다.
이 겨울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 1주기를 앞두고 발전소 하청노동자와 전국 곳곳에서 가족을 잃고 생명을 위협받고 있는 조선소·제철소·건설 하청노동자들이 김용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함께 차가운 거리로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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