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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보아에서 눈 뜬 사라마구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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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보아에서 눈 뜬 사라마구를 만나다

[손호철의 포르투갈 여행기] 리스본(2) : 눈먼 자들의 도시?

"사람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말자."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명대사로,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원래 홍상수 감독이 만든 말이 아니라, 199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포르투갈의 소설가 주제 사라마구(Jose Saramago)의 말이다. 그는 그의 대표소설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말한다.

"비록 우리가 완전히 인간답게 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완전히 짐승처럼 살지 않기 위해서, 있는 힘껏 노력해야 한다."

▲ 포르투갈에서 유일하게 노밸문학상을 받은 주제 사라마구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정영묵 옮김, 해냄 펴냄). ⓒ해냄


리스본에는 국제크루즈선이 정박하는 국제여객터미널이 있다. 이 터미널을 지나 파두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흰색 건물이 나타난다.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건축과 포르투갈의 마누엘 스타일로 지어진 이 건물은 흰 겉면에 운동화 스파이크 같이 뾰쪽 튀어나온 장식들이 이어져 있어 '스파이크의 집'이라고 부른다. 이 건물 벽에는 한 사람의 커다란 사진이 붙어있다. 바로 사라마구의 사진이다. 이곳에 사라마구재단과 기념관이 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마르케즈는 남미의 역사와 현실을 우화와 섞어 서술한 '마술적 사실주의'로 유명하다. 사라마구도 포르투갈 역사를 판타지와 혼합한 마술적 사실주의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특히 그는 그의 대표작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진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마침표, 쉼표 이외에는 따옴표가 없는 독특한 문체로 한 여인을 빼놓고 모두 눈이 멀게 되는 질병에 감염된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그 혼란 속에서 나타나는 어두운 인간의 본성을 무섭게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현대사회가 휘황찬란한 네온불빛과 수많은 볼거리들이 넘쳐나지만 모두가 진실은 보지 못하는 '눈먼 사회', '눈 뜬 장님들의 사회'라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눈이 멀어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보지만 눈이 멀었다,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다." "아마도 눈먼 사람들의 세계에서만이 사물이 진정한 자신일 수 있을 것이다."

▲ 리스본의 항구 근처에 있는 사라마구기념관, 건물 흰 겉면에 운동화 스파이크 같이 뾰쪽 튀어나온 장식들이 이어져 있어 '스파이크의 집'이라고 부른다. ⓒ손호철

<눈먼 자들의 도시>는 많은 독자들이 생각하듯이 ‘가상세계에 대한 가상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현실 고발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말한다.

"기아와 전쟁, 착취 등 우리는 이미 지옥 속에 살고 있다. 모두가 눈이 멀어버린 집단적 파국과 함께 모든 것들, 긍정적인 것들과 부정적인 것들이, 떠오르고 있다. 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세계를 그린 것이다."

그는 포르투갈에서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의 자랑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순탄하지 못했다. 우리가 한 예술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함께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피카소의 그림에 열광하지만 그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라마구도 마찬가지다. 그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많이 읽지만 그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라마구는 1922년 리스본 근교의 가난한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나 정비공 생활을 하는 등 어려운 삶을 살았다. 어렵게 도서관에서 이런 저런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해 1947년 첫 소설을 발표했고 출판사에서 일하며 톨스토이, 헤겔 등을 번역했다. 당시 포르투갈은 쿠데타에 의해 파스시트 정권이 들어섰고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모든 자유를 제약을 했던 암흑기였다. 독재에 대한 저항을 주도한 조직은 불법 지하조직이었던 공산당이었다. 그는 1969년 이에 가입해 목숨을 걸고 활동했다.

다행히 1974년 군부의 개혁세력이 주도한 무혈의 '카네이션 혁명'(이에 대해서는 <리스본 4: 카네이션 혁명과 전경박물관>에서 다룰 예정)으로, 민주화가 되자 좌파신문의 부편집장에 취임해 급진적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공상당과 가까운 군부의 좌파세력이 주도한 1975년 좌파 쿠데타가 실패한 뒤 언론사가 문을 닫자 그는 다시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다. 좌파혁명의 실패가 우리가 아는 '소설가 사라마구'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 50년의 파시스트 독재를 무너트린 1974년의 개혁적 군부의 카네이션 쿠데타. ⓒ손호철

이후에도 그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60세를 넘긴 1980년대가 되어서야 명성을 얻었다. 1982년 출판한 네 번째 소설 <수녀원의 비망록>이 1988년 영어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그는 국내적으로 여러 면에서 '비주류'에 속해서 포르투갈보다는 국제적으로 더 유명하고 국제적 명성이 국내적으로 인정을 받게 만들었다). 국제적 명성을 얻은 뒤에도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의 80% 이상이 가톨릭 신도인 포르투갈에서 무신론자로 가톨릭과 불화가 많았다. 그는 말한다.

"바티칸은 기도에 집중하고 사람들은 평화롭게 내버려둬야 한다. 나는 신자들은 존중하지만 종교기관에 대한 존경심은 전혀 없다."

그는 1990년대 초 예수를 결점 많고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찬송가>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는 1992년 포르투갈의 주요문학상 최종후보군에 올랐는데, 당시 보수정권의 수상이었던 아니발 실바는 이 작품이 반종교적이라는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할 것을 지시했다(이 점에서 그는 예수를 인간적으로 그린 <최후의 유혹>을 써서 그리스정교와 갈등을 겪어야 했던 그리스의 문학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비슷하다). 만일 그가 이전에 노벨상을 받았더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지만, 당시는 그가 노벨상 수상전이었기에 이 같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1990년대에, 그것도 유럽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충격을 받고 항의의 뜻으로 포르투갈을 떠나 스페인령인 카나리아 제도에 있는 작은 도시 란자로테로 이주해 버렸다. 사실상 정치적 망명길에 나선 것이다. 그가 199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도 여기에 살 때다. 그는 노벨상을 받고도 고국인 포르투갈로 돌아가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거기에 살았다. 그러나 리스본을 자주 오갔고 세금도 냈다. "포르투갈이 싫은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없는 보수정권이 싫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1990년대 이후에는 특히 자본 중심의 지구화와 유럽연합(EU)을 강력하게 비판했고 죽을 때까지 불의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식에서 자신의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인권선언이 발표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 지난 반세기동안 우리 정부들은 인권을 위해 도덕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의는 배가되고, 불평등은 악화되고, 무지는 늘어나고, 비참함은 커지고 있습니다. 인류는 정신분열적이어서 운석 성분을 연구하기 위해 행성에 탐사도구들을 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기아에 처해있는 수백만 명의 죽음은 무관심하게 지켜볼 따름입니다. 화성에 가는 것이 이웃에게 가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것 같습니다."

그는 소련동구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공산당을 탈당하지 않았고 공산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공산당 후보로 공직선거에 이름을 올리도록 허락했다. 물론 포르투갈의 공산당은 소련동구와 달리 민주주의를 추구하는 유로코뮤니즘이고, 긴 독재 하에서 민주주의 투쟁을 선도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이탈리아 등 다른 유로코뮤니즘들이 1980년대 말 소련동구 몰락 후 다 몰락하고 만 것과는 대조적으로, 포르투갈에서는 아직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포르투갈공산당은 얼마 전부터 녹색당과 선거연합을 하고 있는데 이 연합은 현재 의회에서 230석 중 17석인 8.3%, 유럽의회는 21석 중 2석, 지방정부는 9.5%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리스본 시내에는 두 당의 연합후보의 포스터가 사방에 붙어 있었다. 사라마구는 죽기 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 몸속에 매일 수염이 자라게 하는 호르몬이 있듯이, 내 호르몬 속에는 공산주의가 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 체제가 한 잘못에 대해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교회도 끔찍한 일을 많이 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나는 내 생각을 가질 권리가 있고, 나는 아직 이보다 나은 사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리스본 시내에 붙어있는 공산당과 녹색당의 연합후보 선거포스터. '민중과 국가의 수호자'라고 쓰여 있다. ⓒ손호철

또 죽기 1년 전 마지막 작품인 <카인>이란 책의 출판기념회에서 "성경은 인간 본성의 최악의 것들의 목록표"이자 "나쁜 도덕의 지침서"라고 말했다가 또 다시 가톨릭과 불화를 겪어야 했다. 87세의 나이에도 그는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들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2010년 그가 죽자 포르투갈은 이틀간의 국장을 선언했고 2만 명의 추모객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졌다. 당시 대통령은 그의 작품을 수상후보에서 삭제하라고 지시해 그가 포르투갈을 떠나게 만들었던 아니발 실바였다. 그는 휴양지에서 휴가를 보내며 사라마구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끝까지 그와 화해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참석자 중 일부는 분노해 1979년 포르투갈에 민주화를 가져다준 카네이션 혁명을 연상하도록 카네이션을 들고 나왔다.

그는 자신의 재단이 주 사업으로 자신에 대한 추모 사업보다도 인권운동을 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기념관에는 세계 각국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들과 그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시신을 화장해 나온 재는 기념관 앞에 심어진, 그가 어린 시절 매일 보며 문학의 꿈을 키우던, 고향의 100년 된 털가시나무 밑에 뿌려졌다. 그 나무 앞에는 이 세계적인 문학가를 추모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털가시나무 앞의 바닥에는 양쪽에는 각각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JOSE SARAMAGO, 1922~2010(주제 사라마구, 1922~2010."
"MAS NAO SUBIU PARA AS ESTRELAS SE A TERRA PERTENCIA(지구에 속해 있어 별들 속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 기념관 앞에 심은 털가시나무에 수목장으로 만들어진 사라마구의 무덤에 참배객들이 모여있다. ⓒ손호철

그의 출세작인 <수녀원의 비망록>의 마지막 문장으로 천국이라는 종교적 담론을 부정하고 현세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 구절이다. 그 앞에서 묵념을 하며 그의 치열했던, 용기 있는 삶에 존경을 표했다. 그러자 갑자기 사라마구기념관으로 오다가 본 한 식당의 진열장이 떠올랐다. 이 진열장에는 항구에서 사온 싱싱한 해산물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생선들이 모두 고개를 쳐들고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사라마구가 비판한 '눈먼 자들'의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지구에 속해 있기 때문에 별들 속에 있는 천국으로 올라가지 않고 아직도 이 땅에 남아 고통 받는 민중들과 함께 하며 지금도 우리에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이제 눈을 뜨라."

▲ 리스본 한 식당 진열장에 전시된 생선들. 하늘로 향한 눈들이 눈 뜨고도 못 보는 '눈먼 도시'를 상징하는 듯하다. ⓒ손호철


▲ 리스본의 명물 관광 교통수단 툭툭 ⓒ손호철

▲ 신세대 관광 그룹 투어 ⓒ손호철

▲ 리스본 가로수길 ⓒ손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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