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정부 들어 미국의 한국에 대한 안보 관련 요구는 강압적이고 끈질기다. 최근 방위비 분담금 증액, 한‧일 지소미아 연장, 인도-태평양 전략 참여 등의 문제를 한‧미간에 협의하기 위해 미 국무부와 국방부 고위 관료들이 한국으로 총출동하고 있다.
10월 초부터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 동아태 차관보, 경제 담당 차관이 차례로 한국을 찾았고, 11월 14일에는 미 국방부 장관까지 방한한다. 15일 열리는 한‧미 안보협의회의(SCM)참가를 위한 것이지만, 앞서 방한했던 차관급 관료들보다 훨씬 센 압박을 가하기 위해 오는 것 같다. 미국은 한미동맹이란 명분으로 한국을 상대로 속칭 '갑질'하려 드는 것 같다. 그들의 말투와 태도는 미국의 국익을 위해 동맹국인 한국의 국익쯤은 희생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이다.
첫째, 방위비분담금 증액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은 미국을 벗겨먹는 나라(중략) 분담금 600억 달러(70조 원)는 내야"한다면서 한국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줄곧 주장해 왔다. 2019년 한국의 국방비가 46조 7000억 원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70조원은 천문학적인 액수다. 한국은 올해 방위비분담금으로 10억 달러(1조 389억 원)를 부담했다. 600억 달러의 산출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의 국방예산 총액을 훨씬 뛰어넘는 액수다.
미국은 현재 진행 중인 11차 한·미 방위비분담금특별협정(SMA) 협상에서는 주한미군의 주둔 비용 외에 태평양의 전략자산 유지비까지 포함시켜 총 50억 달러, 연간 5조 8000억 원 이상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수용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 감축’까지 거론하면서 한국을 압박하고 있다.
남북 분단이후 미군의 남한 주둔이 군사적 대북 억지력을 높여 한국의 안보를 튼튼하게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력이 커졌다고 미국의 국익만을 위해 우리의 경제적 희생까지 감수하면서 터무니없는 방위비분담금 인상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꼼꼼히 따져야 할 것이다. 미군이 한반도 남쪽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에서 미국이 거둬들이는 엄청난 편익은 왜 계산에 넣지 않고 동맹이란 모자를 씌워 한국을 옥죄는지, 투자대비 효과와 편익을 토대로 현실적인 방위비 협상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 우리정부의 용인 하에 미국이 방위비분담금을 1조원 이상 적립했다가 평택기지 건설비로 전용한 전례도 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전략자산(장거리폭격기, 핵추진잠수함, 항공모함) 전개 비용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청구한다고 하는데, 이들 전략자산은 작년 북·미 비핵화 협상이 본격화한 이후 한반도 상공과 해역을 피해 주로 동중국해 등에서 초계 작전을 수행했다. 결국 순수한 주한미군 주둔 비용이 아닌 미국의 동아시아·서태평양 안보 비용까지 한국에 부담시키려 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계산법이다.
둘째, 지소미아 문제다. 지난 10월 2일 일본을 방문한 마크 내퍼 미 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는 "한‧일 대립으로 지소미아가 연장되지 않으면 북‧중‧러만 기뻐할 것"이라면서 한‧일 지소미아 연장을 종용했다. 요컨대 미국의 동북아시아 헤게모니 강화를 위해서 한‧미‧일 삼각동맹이 구축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한국이 위안부문제 강제징용 배상문제는 대충 덮고 지소미아를 다시 연장하라는 말로 밖에 안 들린다.
한일 지소미아 연장으로 한‧미‧일 삼각동맹이 구축되면 미국의 대중 전략적 우위는 확고해지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의 미국의 국익은 그만큼 커진다. 그럼 중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의 국익은 어찌 되는가?
한‧미‧일동맹이 강화되면 될수록 북‧중‧러의 결속은 강화될 것이고, 중국은 사드 때보다 더 강하게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할 가능성도 있다. 뿐만 아니라 문재인정부의 '평화경제'의 한 축인 신북방경제협력, 신남방경제협력을 포함한 한반도신경제 구상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결국 평화협력공동체와 경제협력공동체를 만들어 신한반도체제를 추진하려던 문재인정부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국가목표로서 안보(security)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경제적 번영(prosperity)도 중요하다. 미국의 국익은 키우고 우리의 국익은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미국이 과연 우리의 진정한 동맹인지 묻고 싶다.
셋째, 인도-태평양전략 동참 문제다. 6일 미 국무부의 키이스 크라크 경제차관과 데이비드 스틸웰 동아태 차관보가 강경화 외교부장관을 만나 신남방정책과 인도-태평양 전략문제를 포함한 한미관계의 포괄적 발전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인도-태평양전략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의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을 무력화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이라면 이미 동참하기로 한 일본이야 그렇다할지라도 한국은 동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한국의 신남방정책이 인도-태평양전략과 과연 조화롭게 조율될 수 있을까? 신남방정책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우리의 국익을 미국이 보장해 줄 수 없다면 수동적으로 인도-태평양 전략에 편입되는 것은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다.
미국이 방위비분담금을 턱없이 올리고 지소미아 연장을 압박하고 인도-태평양전략에 동참을 강요하는 것은 한미동맹 강화라는 명분으로 동북아를 비롯한 유라시아 지역에서의 미국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려는 것이다. 동맹이라는 이유로 미국의 국익은 극대화시켜주고 우리의 국익이 희생되는 것이 동맹이라 할 수 있는지, 한미동맹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해 갈 수 있는지 미국에게 물어야 한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와는 다르게 미 상원의원들조차 공평한 방위비 분담을 촉구하고, 미 하원도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는 초당파적인 결의안을 채택하기도 했다.
우리도 이제 우리의 국익 보장 차원에서 미국을 강력하게 설득하고, 아닌 건 '노'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미 동맹관계가 트럼프 대통령이 줄곧 강조하듯이 일방적 '시혜'차원이 아닌 상호간 '호혜'차원이란 점을 미국에게 확실하게 인식시키고, 한‧미 서로가 동맹이라는 관계를 통해 윈-윈하는 관계, 즉 균형있는 동맹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동맹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끌려 다니는 시대는 지났다. 전후 한반도와 동아시아 질서에 수동적으로 편입되었던 과거를 성찰하고 우리의 능동성과 자율성이 반영된 새로운 국가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해나가야 한다. 우리의 지정학적인 상황은 지나친 대미 편중으로 기울어질 경우 잃게 될 것이 너무 많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의 고민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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