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이 1주일도 채 남지 않은 9일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촛불집회가 열렸던 부안읍 수협앞 4거리는 각 정당 후보들의 유세차량에서 나오는 노랫소리만 가득했다. 거리를 지나는 부안 주민들도 무덤덤해 보였다.
근처 약국과 슈퍼마켓을 찾아 보았다. 총선 관련 취재를 왔다는 기자의 말에 주민들은 손사래부터 쳤다. "관심 없어. 복잡하기도 하고…", "부안 주민들 총선에 별 관심 없습니다." 기자 손을 꼭 붙잡고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주장을 열정적으로 펼쳤던 지난 분위기와는 전혀 달랐다.
5선에 도전하는 민주당 정균환 후보와 '전문가' 정치신인을 내세우는 김춘진 후보의 대결이 뜨거운 전북 고창ㆍ부안에서 정작 주민들은 선거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특히 부안은 그 정도가 심했다.
***"대책위 독자 후보 못 낸 게 큰 한"**
최근 부안 대책위가 낙선운동을 선언했다. 사실상 열린우리당 김춘진 후보를 겨냥한 낙선운동 선언이다. 하지만 낙선운동 자체는 큰 힘을 받고 있지 못한 상태다.
선언 이상의 조직적인 낙선운동을 금지한 선거법의 제약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본격적인 낙선운동에 대한 힘이 안 붙는 현실이다. 선거법 제약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낙선운동에 대한 동력도 없는 상태다.
2ㆍ14 주민투표 전까지 활기가 넘쳤던 부안 주민들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부안 대책위의 김진원 조직위원장도 이런 점을 사실상 인정했다. 김 위원장은 "김춘진 후보가 당선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된 총선 상황이 곤혹스럽다"고 덧붙였다.
이런 무기력한 상황은 '독자후보'가 무산된 탓이라는 원인 분석도 나온다.
대책위의 한 관계자는 "대책위 일부 인사들이 이것저것 따지면서 '독자후보' 논의를 공론화하는 것을 계속 미루다 보니, 결국 부안 주민들이 직접 후보를 낼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버렸다"면서 "주민 독자후보가 나왔으면 100% 당선인데, 그렇지 못한 게 큰 한"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총선에서 독자 후보를 못 내놓으니, 부안 주민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가 돼 버린 게 아니냐"고 덧붙였다.
***우리당 앞서는 여론조사 결과? "글쎄, 부안은 아닐 텐데..."**
후보 등록 전 열린우리당 김춘진 후보는 민주당 정균환 후보를 여론조사 결과 평균 15% 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안 주민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부안읍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40대 기사는 "글쎄, 부안은 아닐 텐데..."라고 곧바로 여론조사 결과를 부인했다. 그는 "부안 주민들이 핵폐기물처리장 문제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데, 열린우리당과 그 후보에 호의적일 리 없다"고 단언했다. 고창은 몰라도 부안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세탁소를 경영하는 40대 후반의 주민도 의견을 같이 했다. "언론에서 어떻게 여론조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는 분위기와는 너무 다르다"면서 "뚜껑을 열어보면 알겠지만, 열린우리당 후보가 부안에서 많은 표를 얻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교직에서 정년 퇴임한 70대 할아버지도 대뜸 역정부터 냈다. "내가 부안에 온지 50년이 다 됐는데, 그 동안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정치한다고 나왔다"면서 "지가 양심이 있으면 핵폐기물처리장 싸움할 때 얼굴이라도 비춰보는 게 순리 아니냐"고 고개를 저었다.
***부안의 고민, "둘 다 마음에 안 찬다"**
민주당의 정균환 후보에 대해서는 평이 어떨까? 열린우리당 김춘진 후보에 대한 낙선운동이 더 호응을 안 받는 이유는 또 있다. 상당수 부안 주민들이 김춘진 후보에 대한 낙선운동으로 '어부지리'를 얻을 게 확실한 정균환 후보를 보는 시선도 곱지 않다는 데 있다.
길에서 만난 자영업을 하는 30대 주민은 오히려 기자에게 되묻는다. "서울에서 온 기자님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정 후보야말로 정치에서 물러나야 할 사람이 아니냐." 그는 말을 이었다. "열린우리당은 싫지만 3번 후보를 낙선운동하면 2번 정 후보가 되는 것 아니냐, 정 후보가 '어부지리'를 얻는 낙선운동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길을 지나다 들른 슈퍼마켓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할아버지들도 마찬가지다.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기 무섭게, 고개부터 내젓는다. "열린우리당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정균환이도 안 돼." 말을 멈추기도 전에 옆에서 한 할아버지도 거든다. 그는 "정균환이는 부안 출신도 아니고, 고창에서부터 16년 동안 국회의원 해 먹으면서 지역을 위해서 한 게 뭐 있느냐"면서 "핵폐기장 싸움할 때도, 진짜 주민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으면 그렇게 생색내기에 그쳐서는 안 됐다"고 지적했다.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슈퍼마켓의 50대 아주머니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주머니는 바로 "난 투표 안 할거"라면서 "8명이나 나와 복잡하기만 하고, 아무튼 다 마음에 안 든다"고 정치 전반에 대한 불신감을 토로했다.
***"그래도 누굴 찍긴 찍어야 할 텐데..."**
총선 얘기라면 손사래부터 치는 부안 주민들 상당수는 '자기 후보'가 없는 총선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투표를 '안 하겠다'는 주민보다는 '하겠다'는 주민이 더 많았다. 그러다보니 무소속 김경민 후보와 민주노동당 얘기가 많이 나왔다.
김춘진 후보에게 역정을 냈던 70대 할아버지는 바로 김경민 후보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 양반이 10년 동안 욕 많이 봤지. 핵폐기물처리장 싸움 때도 제일 열심히 한 사람이 그 사람 아니냐." 무소속으로 출마해 주목은 못 받고 있지만, 부안 주민들이라면 김경민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얘기다.
부안읍 거리에서 만난 김경민 후보를 지지한다는 40대 주민도 마찬가지다. "김경민 후보가 무소속이 아니라 당, 예를 들어 민주노동당 후보로 나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면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며 "참 운도 없고 아까운 사람"이라고 안타까움을 초로했다.
민주노동당이 여러 번 언급되는 것도 달라진 분위기였다. 부안 성당 부근 햇볕 따뜻한 길가에 할머니 세 분이 모여 있다. 총선 얘기를 꺼냈다. 한 할머니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어서 안 찍겠다"는 말을 하자마다 다른 할머니가 다음 말을 가로막는다. "그럼 정동영이만 좋게. 가서 민주노동당이라도 찍어야 한당께."
고창ㆍ부안에 후보가 없는 민주노동당 얘기를 주민들은 묻지 않았는데도 꺼냈다. 상당수 주민들은 "민주노동당 얘기하는 사람들이 확실히 늘었다"고 지적했다.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하는 사람도 많았다. 심지어 민주당 캠프나 김경민 후보 캠프의 선거운동원들도 "민주노동당 표가 예상 외로 많이 나올 것"이라는 데 토를 달지 않았다.
대책위의 김진원 조직위원장도 "민주노동당 표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핵폐기물처리장에 대한 정책도 정책이지만, '부안 사태' 동안 민주노동당이 계속 주민들과 함께 하는 모습을 보인 게 컸을 것"이라고 그 이유를 지적했다. 9일 오전에는 부안 농민회의 '민주노동당 지지 선언'도 있었다.
***"2번이냐, 3번이냐"**
현실 정치가 주민들을 규정하는 힘은 무서웠다. 부안 주민들은 탐탁치는 않지만 '민주당이냐, 열린우리당이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었다.
정균환 후보 사무실을 찾아가는 길을 묻는 기자에게 자영업을 하는 50대 주민은 대뜸 민주당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는 "나는 그래도 민주당 찍을 거다"면서 "주변에도 '이번에는 민주당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 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지적했다. 고창ㆍ부안에서라도 민주당 후보를 당선시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게 "본 떼를 보여줘야 한다"는 얘기다.
바로 탄 택시에서 총선 분위기를 묻는 기자에게 50대의 택시 기사도 같은 얘기를 들려준다. "손님들 중에는 확실히 민주당 지지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물론 젊은 사람들은 좀 다르긴 할 거"라고 지적했다.
젊은 사람들은 좀 어떨까? 은행에서 기다리는 젊은 사람들에게 물었다. 30대 초반이라고 밝힌 두 사람은 "당은 모르지만, 후보는 김춘진 후보가 좀더 나아보인다"고 김 후보 지지의사를 밝혔다. 두 사람 다 한나라당과 손 잡은 민주당과 정 후보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아들이 <전북일보> 기자라는 한 할아버지도 김춘진 후보 지지의사를 밝혔다. 그는 유치 과정에 여러 가지 문제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핵폐기물처리장도 지역 발전에 필요하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꺼내, 지역내 핵폐기물처리장 찬성론자 상당수가 김춘진 후보를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혼전이라는 말이 실감이 가는 순간이었다. 정균환 캠프의 한 관계자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는 상당수의 주민들에게 결과가 달려있지 않겠느냐"면서 판세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내비쳤다.
김춘진 후보도 어려움을 토로했다. 김 후보는 "여론조사 결과는 분명히 우리 편인데, 변수가 많아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8개월에 걸친 핵폐기물처리장 반대 운동, 참여민주주의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2ㆍ14 주민투표'를 성공적으로 이끈 부안 주민들은 총선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있다. '희망을 주는 정치인'이 희소한 한국 정치가 그들에게 유쾌하지 않은 고민을 강요하고 있다. 4월15일, 부안 주민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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