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해산물 천국, 겨울 통영 맛 기행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해산물 천국, 겨울 통영 맛 기행

2019년 12월 섬학교 <송년특집-통영과 미륵도>

겨울 통영은 어느 때보다 해산물 요리가 풍성하고 맛있습니다. 이번 섬학교의 가장 큰 목적은 겨울 통영을 맛보는 것입니다. 경상도 음식이 맛없다고 투덜거리던 사람들도 통영에 와서는 그 맛에 탄성을 지릅니다.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 큰 전라도 사람들도 통영 음식만은 인정하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통영 음식이 특별한 것은 조선시대 3백 년 동안 전라도 여수에서 이주해온 삼도수군통제영이 자리 잡은 특별자치구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최대의 군사도시 통영만의 독자적인 음식문화를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통영은 섬 왕국이기도 하다.Ⓒ이상희

겨울 통영은 해산물 천국이지요. 겨울이 제철인 통영 굴은 알이 유독 굵고 탱글탱글한데다 우유처럼 고소합니다. 최고의 겨울 술국인 물메기국은 타락죽처럼 부드럽습니다. 온갖 해산물요리가 한상 가득 차려져 나오는 ‘다찌’는 단언컨대 한국 최고의 씨푸드입니다. 해산물 요리의 향연도 즐기고 윤이상, 박경리, 유치환, 이중섭, 백석 등 예술가들의 발자취도 더듬어봅니다. 아울러 역사적 유래가 깊고 원형의 자연과 문화가 살아있는 미륵도를 깊이 탐방합니다. 대부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한국 100대 명산인 미륵산도 걸어서 오르고 법정스님이 출가했던 절 미륵사의 편백숲과 둘레길도 걷습니다. 또 내내 바다가 보이는 삼칭이 해안길도 걸어 봅니다.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88강은 12월 7일(토)-8(일)일, 1박 2일 일정으로 통영과 미륵도에서 진행됩니다. 따뜻한 남쪽 바다, 저무는 한 해를 보내며, 가장 맛있는 통영도 맛보고 많이 걷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해산물 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인 다찌 상차림Ⓒ이상희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의 답사지인 <통영과 마륵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
맛의 고장, 전라도 태생인 내가 처음 경상도 통영에 매혹된 것은 오로지 음식 때문이었습니다. 통영이 전라도 음식에서 발견되던 개미 진 맛의 유전자가 경상도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지요.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깨뜨려준 도시 통영. 특히 해산물 요리에 관한 한 통영은 이 나라 으뜸입니다. 그중에서도 겨울 통영의 맛은 극상이지요. ‘통영은 맛있다’는 찬탄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아직 8천 원짜리 회정식을 파는 집이 있고 뚝배기 하나를 시켜도 생굴이나 멸치회무침 등이 반찬으로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다찌집’이죠. 다찌집이란 술을 시키면 안주는 그날그날 주인 마음대로 내주는 선술집입니다. 관광 다찌가 아니라 지역 사람들이 애용하는 다찌 집을 잘만 찾아가면 겨울에 맛볼 수 있는 거의 모든 해산물을 한상에서 받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이미 만들어놓은 식은 음식이 아니라. 즉석에서 해주는 대면 요리입니다. 최근에 자주 가는 단골 다찌집에서 헤아려보니 회를 포함한 싱싱한 해산물의 수만 11가지나 된 날도 있었습니다. 방어회, 전복, 멍게, 호래기, 개불, 피조개, 오징어, 참소라, 굴, 해삼, 해삼내장젓. 통영이 아니면 불가능한 차림입니다. 시금치나 몰 등의 나물류도 더없이 맛깔스럽습니다. 개조개 유곽이나 해물잡채 등 통영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진귀한 요리들도 나옵니다. 경상도 음식을 얕잡아 보던 전주나 목포 사람들도 통영 다찌 음식을 한번 맛보고 나면 엄지를 치켜듭니다.

대체 통영이 유독 맛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이 궁금해서 나그네는 통영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물로 <통영은 맛있다>란 제목의 책까지 낸 바 있습니다. 처음엔 통영사람들에게 통영이 특별히 맛있는 이유를 물어봐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높은 벼슬아치가 통영을 다스렸기 때문에 한양에서 궁중음식 문화를 가져온 것이 이유가 아니겠느냐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납득이 되지 않았지요. 그렇다면 왕이 살았던 서울의 음식이 가장 맛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같은 고위직이 다스리던 다른 지역도 다 맛있어야지 않겠는가. 그런데 서울 음식 맛있다는 소리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통영 맛의 근원을 파헤쳤던 것입니다.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조선시대 내내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 있던 통영은 어느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했다는 점입니다. 맛이란 물질적 풍요 속에서 나옵니다. 전라도의 음식문화가 발달한 이유는 배후에 호남평야나 나주평야 같은 곡창 지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배 채우기도 급급하다면 맛을 따질 여유가 없을 겁니다. 요리가 발달할 수도 없습니다. 부가 있어야 요리도 발달하게 됩니다. 아무리 맛있는 도미라도 맨날 구워 먹기만 하면 질리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도미의 뱃속을 가르고 소고기와 야채를 다져 넣고 삼색 지단을 올린 뒤 쪄내는 도미찜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멋을 부리며 음식문화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통영 음식문화의 발전 또한 조선 최대 군사도시 통영의 물적 기반과 남해바다의 풍부한 해산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해로교통이 활발했던 과거에 수군사령부인 통영으로 각지의 물산과 문화가 자유롭고 활발하게 유입되었습니다. 풍부한 식재료와 여러 지방의 음식문화가 하나로 융합되어 통영의 음식문화가 발전했던 것이지요. 통영이 경상도 타 지역과는 차원이 다른 뛰어난 음식문화를 형성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입니다.

통영은 조선시대 500여 척의 전함과 수군 3만 명 이상이 주둔한 최고의 군사도시였습니다. 군수물자가 넘치니 물산이 풍요로울 수밖에 없었겠지요. 심지어 화폐를 발행하는 주전소까지 있었습니다. 게다가 통영은 1602년 공사를 시작해 1604년에 완공된 신도시였지요. 임진왜란 직후 여수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 땅으로 옮겨 오면서 전라도 출신 군사들이 대거 이주해 왔고 여기에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 병사들까지 합류했습니다. 군수품을 조달하는 12공방을 만들면서 8도에서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불러왔습니다. 또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해 통영으로 몰려와 살았습니다. 경상도 땅에 생긴 도시에 전라도를 주축으로 한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뒤섞여서 만들어진 융복합 도시가 통영이었습니다. 게다가 경상도 관찰사나 삼도수군통제사나 같은 직급이었으니 지휘를 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통영은 특별자치구역이었습니다. 통영과 경상도는 동급이었던 것이지요. 그 기간이 통제영이 폐영 되는 1895년까지 무려 3백 년 동안이나 지속됐습니다.

3백 년 동안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고 그 문화 또한 통영만의 독자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육로가 발달하지 못했던 과거에는 바다가 고속도로였으니 통영은 길이 불편한 경상도 내륙보다는 수로를 통해 경상도 해안이나 전라, 충청 등 타 지역들과 더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했습니다. 군사도시인 까닭에 양반보다는 중인들이 주축이었고 장인들의 수공업과 객주, 상인들의 상업 활동이 전국 어느 곳보다 활발했지요. 많은 통영 사람들이 나전칠기, 소목, 화공 등 12공방의 일을 3백 년 동안이나 가업으로 이어오면서 그들의 몸속에는 예술적 유전자가 형성됐습니다. 음악가 윤이상의 아버지도 유명한 소목장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과 가깝고 교류가 활발했던 까닭에 서양문물이 어느 곳보다 먼저 유입될 수 있었습니다. 1914년에 이미 ‘봉래좌’란 극장이 들어섰고 1930년대는 영화사가 2곳이나 있었지요. 통영삼광영화사는 1930년에 김유영 감독의 <화륜>을, 1931년에는 이구영 감독의 <갈대꽃>을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 친일연극인 유치진이나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화가 전혁림 등 통영 출신 예술가들이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도 모두 통제영 12공방에서 비롯된 예술적 유전자와 신문물을 일찍 수용할 수 있었던 통영의 역사, 지리적 요인들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영은 음식문화 또한 지금의 경상도 다른 지역에 비해 유독 빼어난 전통을 이어 올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술꾼들이나 해산물을 좋아하는 미식가들에게 겨울 통영은 천국입니다. 해산물이 가장 풍성하고 맛있는 시기가 겨울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겨울이 어디보다 따뜻합니다. 서울이 영하 10도 일 때 통영은 영상입니다. 무려 십도 이상 따뜻하죠. 겨울 통영을 찾지 않으면 후회할 이유입니다.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관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타락죽처럼 부드러운 물메기국
물메기의 표준어는 꼼치입니다. 꼼치는 동서남해 모든 바다에서 납니다.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이지요. 동해에서는 곰치, 물곰, 남해에서는 미거지, 물미거지, 서해에서는 잠뱅이, 물잠뱅이 등으로 칭합니다. 통영에서는 흔히 '미기' 혹은 ‘메기’ ‘물메기’라 부릅니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옵니다. 12월에서 3월까지의 물메기가 맛있는 것은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우기 때문입니다. 보통 수명은 1년 남짓. 대부분 산란 후 죽습니다.

<자산어보>에도 물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잡히면 버리는 하찮은 물고기가 아니라 술병까지 고치는 명약으로 대접받았다 합니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정약전 <자산어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우리나라 호남 부안현(扶安縣) 해중에 수점(水鮎, 물메기)이 있는데, 살이 타락죽(찹쌀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옛 기록들이 아니더라도 물메기국은 그야말로 해장에 최고입니다. 물고기들이 흔하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귀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겠지만 물메기 또한 어류의 가계에서 제법 족보 있는 물고기였던 셈이지요.

늦가을부터 통영은 물메기국 끓이는 철이 시작됩니다. 동해안에서는 곰치, 물곰이라고도 하는 물메기. 곰치국이든 물메기국이든 해장국으로 그보다 더 시원한 음식은 드물 것입니다. 물론 대구나 복국이 있지만 시원하고 담백하기로는 물메기국을 따라가기 힘듭니다. 지방이 아주 적고 아미노산이 풍부해 감칠맛이 납니다. 통영에서 마른 메기는 잔치음식의 대표지요. 전라도 잔치상에 홍어가 빠지면 차린 것 없단 소리를 듣듯이 통영의 잔치집에서는 마른 메기찜이 빠지면 '안꼬 없는 찐빵'이라 합니다.

물메기국은 맑게 끓여야 제 맛입니다. 너무 매운 ‘땡초’(고추)도 넣지 말아야 합니다. 팔팔 끓는 물에 무를 어하게 썰어 넣고 소금 간을 한 뒤 무가 익을 즈음에 손질해둔 메기를 넣고 익힙니다. 살이 무른 생선이니 너무 끓이지 않고 살이 익을 정도로만 끓입니다. 다진 마늘을 넣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국을 낼 때 대파를 얹습니다. 그래야 맑고 시원한 메기국이 됩니다. 양파 등 다른 채소를 넣지 않는 것도 물메기 본연의 맛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통영에서는 세파에 시달려 지친 사람들의 속을 물메기국이 달래줍니다. 술병도 곧잘 고쳐주는 물메기국의 유혹을 누군들 피해 갈 수 있으리오.

윤이상, 유럽 5대 작곡가이자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인에 꼽혀
윤이상 선생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서 부친 윤기현과 모친 김순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0년 가족들과 함께 통영으로 이주해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통영은 윤이상의 선조들이 통제영이 시작될 때부터 대대로 살았던 땅입니다. 윤이상 의 선조는 세병관을 세우는데 공헌한 사람 중 한 분이었고 증조부까지 선조들은 대부분 수군 장교로 통제영에 복무했었다 합니다. 출생지는 산청이지만 삶의 자양분을 얻고 그를 키운 고향은 통영이었습니다. 윤이상은 그의 자서전격인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 입은 용>에서 고향 통영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였으면 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도천테마파크에는 윤이상의 동상이 있고 2층 전시실에는 윤이상의 흉상이 있습니다. 살아생전 그토록 고향에 오고 싶어 했으나 조국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회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했겠지요. 그 대신 그의 동상이 고향 통영으로 왔습니다. 2층 전시실의 흉상은 평양 윤이상연구소에 있는 흉상을 만수대창작사에서 복제해 준 것입니다. 윤이상평화재단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흉상 또한 2009년 6월 인천항으로 반입됐으나 북한의 핵실험 후 정부의 반입보류 조치로 오랫동안 인천세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통영예총의 탄원으로 어렵사리 통영으로 왔습니다.

윤이상의 흉상 또한 생전의 윤이상처럼 고초를 겪었으니 그는 분단의 비극을 사후에까지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윤이상은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 5대 작곡가에 선정됐고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의 교수들에 의해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 명으로 뽑혀 이름이 동판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작곡가로는 윤이상과 스트라빈스키 등 네 명뿐입니다.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생활을 했지만 후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습니다.

▲통영에서 그려진 이중섭 화백의 대표작 <황소>Ⓒ섬학교

이중섭, 통영에서 황소를 그리다
이중섭이 그의 자화상 같은 <흰소>와 <황소> 등 소 연작을 그린 장소는 통영입니다. 통영에 살던 시절, 이중섭은 또 다른 대표작 <달과 까마귀> <부부> <도원> <가족>은 물론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충렬사 풍경> 등 통영을 배경으로 한 다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통영에는 이중섭이 머물며 그림을 그렸던 건물이 아직도 건재합니다. 이중섭은 한국전쟁 피난 시절인 1952년 봄에 통영으로 와서 1954년 봄에 떠났으니 만 2년을 통영에서 살았습니다. 소련의 비평가들에게 마티스나 피카소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원산미술가동맹 위원장까지 지냈던 이중섭은 1.4후퇴 때 가족들과 원산에서 부산으로 남하한 뒤 해군경비정을 얻어 타고 제주 서귀포에 들어가 7개월을 살았지요. 그는 1952년 다시 부산으로 나와 생계가 어려워지자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낸 뒤 부두노동자로 전전했습니다. 그때 이중섭을 통영으로 이끈 이가 유강렬이었습니다. 후일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장을 지낸 유강렬은 당시 통영에 있던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이하 양성소) 주임강사였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의 근거지가 됐던 양성소는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현재 항남목욕탕 부근입니다.

통영 시절 이중섭은 3번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1952년 녹음(호심)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서양화 4인전>을 가졌고, 1953년 12월에는 성림다방에서 40여 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녹음다방 건물은 더 이상 다방이 아니지만 여전히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5천 통의 연서를 보냈던 바로 그 중앙우체국 건너편에 옷가게로 변신해 존재합니다. 복자네집이나 새미집 등이 단골 술집이었는데 이중섭은 새미집 다다미방 바닥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주인할머니의 타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는 본래 2층짜리 청루 건물이었는데 이를 학교로 바꾼 것입니다. 청루는 기생이 있는 요정입니다. 양성소 부근이 일제 때는 청루 골목이었습니다. 이중섭은 양성소 강사가 아니었으나 늘 이 건물에 살다시피 했고 항상 스케치북을 들고 와 스케치를 했다합니다. 소 연작과 대표작들도 이 건물에서 구상되고 그려졌을 것입니다. 통영 시절 이중섭의 작품 활동 근거지였던 양성소 건물은 1930년대 초에 지어졌지만 별 훼손 없이 원형을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1층은 식당 영업 중이고 2층은 DVD 게임랜드였다가 카페로 바뀌었으나 이내 문을 닫고 지금은 비어 있습니다. 2층의 일부는 살림집으로 이용 중입니다. 최근 주인이 매물로 내놨다는데 통영시 문화관광과에 문의해 보니 시에서는 매입해 보존할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중섭(1916∼1956)이 통영 시절 완성한 <흰소> <황소> 등 소 연작은 이중섭 작업의 백미로 꼽힙니다. 이중섭은 젊은 시절부터 소에 대한 애착이 깊었습니다. 한번은 원산의 송도원 들판에서 끊임없이 소들을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 받았을 정도입니다. 아마도 이중섭이 들판에서 소를 관찰하는 동안 소들은 하나 둘씩 이중섭의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던 것이 아닐까요. 소들이 살면서 이중섭의 몸 안에는 드넓은 초지가 생겼고 날마다 소떼가 풀을 뜯었습니다. 한국전쟁 동안 피난민으로 떠도는 와중에도 이중섭은 소들을 키웠습니다. 자신은 굶어도 소들은 풀을 먹였습니다.

오랜 세월 키우던 소떼와 함께 이중섭은 통영으로 왔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은 문득 깨달았습니다. 제 안에 기르기엔 소들이 너무 커버렸다는 사실을. 이중섭은 마침내 기르던 소들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풀려난 소들이 이중섭의 손끝을 타고 화폭으로 마구 쏟아졌습니다. 이중섭의 화폭 위에서 흰소도, 황소도, 포효하는 소도 마구 뛰어다녔습니다. 이중섭의 소들은 여전히 살아서 펄펄 뛰고 있습니다. 이중섭이 소들을 화폭에 가두지 않고 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중섭이 기르던 소떼를 대중들에게 처음 선보인 것도 통영이었습니다. 이중섭은 통영으로 왔던 1952년 통영의 녹음다방에서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과 함께 4인전을 했는데 전혁림은 그날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그날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합니다.

“장윤성이하고, 유강렬하고, 나하고, 중섭이가 모여서 그림 팔려고 한 거 아닙니까? 팔렸어! 나 그림은 서울 사는 부인이 다방으로 들어오더마는 현장에서 돈을 주고 사가고 그란께 딴 사람들이, 중섭이가 혀를 헤 내밀더만. 중섭이 <소>는 딴 사람이 샀어요. 그때 돈으로 8만원이라고 하드나.” (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 중에서)


▲벽화마을의 원조, 동피랑 마을Ⓒ이상희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 동피랑이 지금은 통영의 랜드마크가 됐지만 동피랑은 오랫동안 통영의 대표적 달동네였습니다. 2007년 통영시에서도 동피랑 재개발 계획을 세웠습니다. 동피랑 꼭대기에는 옛날 통영성의 세 망루 중 하나였던 동포루 터가 있습니다. 시에서는 동피랑 마을을 전부 철거한 뒤 동포루를 복원하고 그 일대는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지요. 그때 오래된 마을과 골목, 삶의 흔적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지방의제 추진기구 '푸른통영21'에서 재개발 대신 보존을 제안했습니다. 마을을 무작정 철거하기보다는 “지역의 역사와 서민들의 삶이 녹아있는 독특한 골목 문화로 재조명 해보자”고 시를 설득했지요. 오래 되고 낡은 마을과 골목길 또한 소중히 보존해야 할 문화재라 판단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오래된 마을이야말로 진정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요. 대부분 고령인 동피랑 주민들도 마을을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정든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었지요.

다행히 주민들과 시민단체, 통영시가 한마음이 됐습니다. 재개발 계획을 중단하고 마을을 보존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낡은 마을을 새롭게 변신시키기 위해 낡고 갈라진 벽에다 그림을 그리기로 했습니다. 온 마을에 벽화가 그려지자 죽어가던 마을이 살아나기 시작했지요. 낡은 건물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자본이 아니다. 사람들의 손길입니다. 전국에서 몰려온 화가와 자원봉사들의 힘으로 벽화가 완성되자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벽화와 골목길, 동피랑 언덕 아래 통영 바다 풍경을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지요. 단지 채색의 옷만 갈아 입혔을 뿐인데, 그림만 그렸을 뿐인데 동피랑은 새롭게 태어났고 어느새 통영의 아이콘이 됐고 랜드마크가 돼버린 것이지요.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평화의 상징, 삼도수군통제영의 객사였던 세병관Ⓒ이상희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선계를 방불케 하는 미륵산 풍경Ⓒ이상희

미륵을 기다리는 섬, 미륵도
통영은 많은 섬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가장 가까운 섬은 미륵도(면적 32.9㎢)입니다. 통영 반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서 자각하기 어렵지만 미륵도 또한 섬이지요. 도시화 되고 케이블카가 생긴 뒤에 쉽게 미륵산 정상에 오르다보니 통영 여행자들도 정작 미륵도란 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미륵도에는 케이블카나 루지 말고도 많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미륵불의 하생을 기다리는 섬이 아닌가요. 진짜 미륵도를 느껴보려면 1시간이면 충분한 등산로를 따라 미륵산을 오르거나 미륵산 둘레길을 따라 걷는 것이 좋습니다. 미륵산의 압권은 산정에 올라서 보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바다와 섬들 풍경입니다. 안개라도 낀 날은 산수화가 따로 없습니다. 가히 <몽유통영도원도>가 펼쳐집니다. 미륵산의 또 다른 명품은 미래사 편백숲입니다. 100년 가까이 되는 편백나무 숲이 5만 평이나 펼쳐져 있지만 아는 이도 많지 않고 찾는 이도 드물지요. 미륵산 정상에서 20분만 걸어 내려가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용화사에서 출발해 임도를 따라 걸어도 30분이면 가능합니다.

▲법정 스님이 출가했던 절, 미륵사 일원의 편백나무숲Ⓒ섬학교

미래사 편백숲은 본래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심었던 것인데 후일 미래사에서 매입해 관리해 오고 있습니다. 편백나무는 다른 침엽수보다 세 배 이상의 피톤치트를 뿜어낸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 편백이 암을 치료하는데 좋다는 소문이 나 더러 암 환자들이 찾아와 편백숲 아래 텐트를 치고 생활하며 기력을 얻어 가기도 합니다. 미래사는 법정 스님이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했던 절이기도 합니다. 박재철은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랐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 때인 1954년 이곳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법정 스님이 됐습니다. 법정은 출가 후 미래사에서 부목(땔감 담당 나무꾼) 노릇을 하며 행자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미래사는 그리 오래된 절이 아니지만 미륵산에는 천년 고찰들이 있습니다. 용화사와 도솔암입니다. 용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恩霑)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합니다. 처음 정수사(淨水寺)라 이름했다가 용화사로 바뀌었습니다. 도솔암 창건 설화는 호랑이 이야기가 깃들어 있어 이채롭습니다. 도솔암은 고려 태조 20년(943년)에 창건됐습니다. 창건주인 도솔스님은 17세에 지리산 칠불암으로 출가해 수도하다가 25세 때 미륵산으로 옮겨와서 바위굴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며 입을 벌리고 도와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사람을 잡아먹은 호랑이의 고통을 어찌 할 것인가? 딜레마에 고민하던 도솔은 결국 호랑이의 입에 걸린 비녀를 뽑아내 줍니다. 그 뒤 호랑이도 무언가 깨달은 게 있었던 것인지 늘 도솔 곁에 머뭅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호랑이는 처녀 하나를 물어다 놓고 훌쩍 떠나버립니다. 제 먹이를 나눠주는 것으로 도솔과의 인연도 끊어버린 것이지요. 호랑이는 결국 호랑이었던 것입니다.

▲미륵산 미래사의 겨울Ⓒ이상희

법정 스님이 출가해 행자생활 하던 절, 미래사
도솔은 기절한 처녀를 정성껏 간호해서 되살립니다. 사정을 들으니 처녀는 전라도 보성 관아의 아전인 배 이방 딸이었습니다. 처녀는 혼인날을 받아놓고 목욕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왔던 것이죠. 도솔이 보성까지 처녀를 데려가자 배 이방은 감격에 겨워하며 거금 300냥을 시주합니다. 그 처녀 목숨 값으로 지어진 절이 도솔암입니다. 도솔암은 한때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이름 높았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법정 스님의 스승이자 조계종 종정을 지낸 효봉(曉峰) 선사가 잠시 의탁하기도 했었지요. 지금도 도솔암 위쪽에는 도솔이 수도하였던 천연암굴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달아전망대 일몰Ⓒ이상희

미륵도를 찾는 이들이 케이블카 못지않게 많이 가는 곳은 달아전망대입니다.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일몰이 장관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빼어난 풍광을 가졌는데도 숨겨진 보물이 또 있습니다. 삼칭이해안길입니다. 본래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에 자전거 길을 낸 것이 통영 최고의 해변 길이 됐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자전거를 타는 이도 거의 없고 걷는 이들만 간간이 보이는 길입니다. 길은 통영국제음악당 앞에서 시작해 영운리 마을까지 4km에 걸쳐 있는데 가는 내내 바다와 섬들을 바라보면서 걸을 수 있는 해안 길입니다.

삼칭이란 삼천진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영운리 마을에 삼도수군통제영의 수군진이 있었습니다. 그 진이 삼천진이었는데 진장은 종9품의 하급 무관인 권관(權管)이었습니다. 조선시대 변경지방 진관(鎭管)의 최하단위인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이 권관이죠. 삼천진은 본래 통영이 아니라 삼천포에 있었습니다. 삼천포란 고려시대 개경에서 뱃길로 삼천리 거리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합니다. 그 삼천진이 통영으로 옮겨지면서 이름도 따라와 삼천진이 됐고 삼칭이로 불리게 된 것이죠. 예전에는 군사집단의 주둔지가 바뀌면 그 이름도 따라서 옮겨지곤 했습니다. 군산은 지금의 땅이 아니라 선유도에 있었습니다. 선유도가 본래 군산도였고 거기 군산진이 있었는데 진이 옮겨 가면서 이름도 따라가 지금의 군산이 된 것이죠. 경기도 남양에 있던 영종진이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가면서 이름도 따라가 자연도였던 섬이 영종도가 되기도 했습니다.

삼칭이해안길을 따라 가다보면 손바닥만한 모래사장이 하나 있는데 통영공설해수욕장이죠. 이 마을이 수륙리인데 삼도수군통제영 시대 죽은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는 수륙제를 행하던 장소입니다. 수륙재란 수륙(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공양(供養)하는 불교의식입니다. 수륙도량(水陸道場) 혹은 수륙법회라고도 하는데 수륙재를 지내면 떠돌던 넋들이 불보살의 가피를 받아 극락으로 천도 된다고 믿어집니다. 삼칭이 길은 종현산(188m) 둘레를 돌아가는데 산이 바다에서 바라보면 거대한 종(鐘)을 하늘에 매달아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해서 지어진 이름입니다.

▲삼칭이해안길Ⓒ섬학교

이 길의 가장 때어난 풍경은 복바위입니다. 복바위는 영운리 앞바다에 있는 바위섬이죠. 세 개의 바위섬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섬들에는 애틋한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까마득한 옛날 옥황상제의 근위병 셋이 선녀 셋과 함께 이곳에 내려와 몰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옥황상제가 누군가요. 아무리 숨겨도 다 알아낼 수 있는 전지전능한 힘의 소유자가 아닌가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옥황상제는 불벼락을 내려 그들을 모두 바위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대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천상의 주인인 옥화상제마저도 질투심에 눈멀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의 힘은 신보다 강한 것이 아닐까요. 두렵고 또 두렵습니다. 사랑이여!

12월 섬학교 제88강 <통영과 마륵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7일(토)>
08:00 서울 출발(0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8강 여는 모임
-통영 도착
-점심식사(통영에서 남도백반)
-통영 걷기(7km)
용화사주차장-도솔암-미륵산정상-미래사편백숲-미륵불-미래사-띠밭등-용화사
-달아전망대 일몰
-숙소 도착(다인실)
-저녁식사 겸 뒤풀이(최고의 다찌집)
18:30 자유시간 및 취침

<12월 8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물메기탕)
-미륵도 삼칭이해안길 걷기(4km)
영운리-삼칭이-수륙마을-마리나리조트
-세병관 탐방
-점심식사(자유식-추천:<동광식당> 복국, <충무멸치쌈밥식당> 고등어회, 시장 안 시락국 혹은 죽)
-자유시간(중앙시장 장보기 혹은 동피랑 탐방 등)
14:30 서울 향발. 제88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통영과 미륵도> 답사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장갑, 선글라스, 버프(얼굴가리개),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12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