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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금융과 영국의 야합, 중동 재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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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금융과 영국의 야합, 중동 재앙의 시작

<묵시록의 시대 3> 야합역풍, 중동 민족주의 분출

***<묵시록의 시대 III>: 시오니즘의 탄생과 중동 분쟁**

그렇다면 석유와 더불어 미국의 또 다른 화두인 이스라엘의 중동 패권 정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시오니즘의 계기가 된 '드레퓌스 사건'을 다뤄야만 한다. 1894년 10월, 프랑스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유대인 출신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Dreyfus, Alfred: 1859-1935)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비공개로 진행된 군법 회의에서 그는 별다른 물증이 제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당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유럽 사회에 팽배해진 반유대주의라는 사회적 편견이 드레퓌스를 스파이 사건의 주범으로 몰아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프랑스 군 수뇌부는 그 후 사건의 진범이 드레퓌스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얻었음에도 진상을 밝히길 거부하고, 오히려 사건을 은폐시키려 했던 것이다. 그러자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고 재심을 요구하던 가족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1897년 11월, 진범으로 알려진 헝가리 태생의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한다. 하지만 프랑스 군부는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석방함으로써, 이 사건의 진상은 영원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하였다(참고로 프랑스군은 사건이 발생한지 1백년만인 1995년 9월, 드레퓌스가 무죄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재판 결과가 공개된 직후인 1898년 1월 13일, 소설가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프랑스 군부의 의혹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설을 <오롤>지에 게재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이 사건은 드레퓌스 한 개인의 석방 문제라는 차원을 넘어 정치적 쟁점으로 비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결과 프랑스는 정의, 진실, 인권 옹호를 주장하는 드레퓌스 재심파와 군의 명예와 국가 질서를 내세우는 반드레퓌스파로 분열되어 논쟁을 벌인 끝에 결국 재심파가 승리하면서, 이 사건은 프랑스내 좌파 세력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중세 시대부터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재산 몰수와 추방, 학살 등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시각은 달랐다.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겪어야만 하는 사회적 차별로부터 항구적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한 것이다. 그 결과 1896년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언론인인 시어도어 헤르츨(Theodor Herzl)은 <유태인 국가>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하려면 독립 국가를 세우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성서>에서 예언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이라는 시오니즘이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드레퓌스 사건 이후 유럽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중동 지역의 기독교도들과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팔레스타인의 땅을 매입해 수십개의 정착촌을 건설했다. 그리고 마침내 에밀 졸라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해 ‘나는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국가 권력을 비판하던 1898년, 정치적 시오니즘(Political Zionism)의 아버지로 불리던 헤르츨은 “앞으로 50년 후 이스라엘은 독립할 것이다” 라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말이 실현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1948년, 놀랍게도 헤르츨의 예언은 이스라엘 국가의 탄생이라는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이스라엘 독립 이면에 감춰진 영국과 로스차일드 밀약**

유대인이 정착촌을 건설하던 19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아랍 민족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팔레스타인이 오늘날과 같은 세계의 화약고로 돌변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비 처리 문제로 고민하던 영국 정부의 야바위 게임에서 비롯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10월, 터키의 참전으로 곤경에 빠진 영국은 전세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집트 주재 외교관인 맥마흔을 통해 당시 아랍의 지도자인 후세인에게 게릴라 전문가인 로렌스를 도와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 아랍을 독립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때 유명해진 인물이 다름아닌 아라비안 로렌스다.

하지만 1차대전의 후유증으로 당시 영국 경제는 독일에 항복을 고려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미국의 참전을 유도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워싱턴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내 시오니스트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런 까닭에 영국의 전시 내각은 1916년 10월, ‘세계시온주의자연맹’ 대표이자 유럽최대 금융재벌이던 바론 리오넬 로스차일드(Rothschild)와 비밀리에 회동해, 전후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줄 것을 약속하는 런던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이에 대해 로스차일드는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재정 지원을 약속한다.

하지만 당시 미국의 시오니스트들은 영국 정부의 런던 조약의 이행 여부에 회의적이었다. 1916년 12월4일, 다급해진 영국 정부가 전격적으로 시오니스트로 유명한 로이드 조지를 총리로 임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총리로 취임한 로이드 조지는 바로 다음날, 영국에서 존경받는 조시아 웨지우드 의원을 미국에 파견한다. 12월 23일, 웨지우드가 미국에 도착하자 당시 윌슨 대통령의 고문인 에드워드 하우스 대령은 그를 뉴욕 54번가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머물도록 배려하면서, 유대계 지도자 51명을 사보이 호텔로 초청해 런던 조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기회를 제공한다.(1912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정치적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정관 필립 드루>(Philip Dru: administrator)의 실제 저자가 바로 윌슨 대통령의 고문인 하우스 대령이다.)

당시까지 친독 노선을 지향하던 미국의 시오니스트들이 친영 노선으로 입장을 정리한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다(이것은 훗날 독일 나찌 정권의 유대인 학살의 동인으로 작용한다).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를 설립하려는 유대 시오니스트들은 당시 영국 지배하에 있던 팔레스타인을 필요로 했고, 그런 까닭에 영국을 돕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 결과 1917년 4월 2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서 “미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기에 이르고, 그로부터 불과 4일만인 1917년 4월 6일, 미국은 특별한 사유도 없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1917년 11월,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Balfour)가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아래의 서한은 이같은 이면 합의의 빙상의 일각이었던 셈이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을 위한 고국(National Home)을 건설하는 것에 호의를 보이며, 이 목적이 쉽게 달성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다만, 현재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는 비유대인 단체의 시민적.종교적 여러 권리를 손상시키지 않고, 또 다른 나라에서 유대인이 누리고 있는 여러 권리 및 정치적 지위를 손상시키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 귀하께서 이 선언을 시온주의자 연맹에 통지해 주시면 저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영국은 약속대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도왔다. 그 결과 1936년 팔레스타인내 유대인 인구 비율은 전체의 28%를 차지하게 된다. 1880년대 팔레스타인의 총인구 50만명 가운데 유대인 비율이 겨우 5%인 2만5천명이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이 시기에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이주해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영국 정부의 비호 하에 로스차일드로부터 제공되는 우수한 기술과 자본을 바탕으로 정착촌을 건설하고 협동조합과 각종 산업 시설을 갖추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하자, 시오니즘 운동의 지도자인 데이비드 벤-구리온은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의 건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꿈에 그리던 이스라엘의 독립이 달성된 것이다.

***중동 전쟁을 주도한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

1차 대전이 종료되면서 오스만 투르크에서 해방된 중동 지역엔 아랍 국가들이 하나 둘, 독립하기 시작한다. 먼저 이집트가 독립한데(1922) 이어 사우디 아라비아가 독립했고(1926), 이어서 이라크(1932)에 이어, 레바논(1943)과 시리아(1944)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그리고 1946년엔 요르단이 독립하기에 이른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탄생 과정을 지켜보며 영국과 미국을 배후에서 조정하는 유대 시오니스트들의 완력에 두려움을 느낀 이집트, 사우디, 이라크,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등 아랍국들은 1945년 3월, 아랍 연맹을 결성해 이스라엘에 대항하기로 합의한다.

4차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아랍 세계를 리드한 것은 이집트였다(심지어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더불어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유혈 분쟁의 중심 인물인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수반도 전직 이집트 군인 출신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수에즈 운하 때문이었다. 수에즈 운하를 독점해온 영국이 이스라엘을 통해 그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는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국의 외무장관 밸푸어는 친영국 성향의 유대인들이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2차 중동전쟁을 통해 명백히 입증되었다.

1차 중동전쟁이 끝난 1949년 이후 이집트는 이스라엘 선박과 이스라엘행 특정 물자를 운송하는 외국 선박의 운하 통과를 거부했다. 그 사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요구하는 이집트인의 요구가 격렬해지면서 운하에서는 이집트인과 영국군의 충돌이 빈번해졌다. 그런 가운데 1952년 혁명에 성공한 나세르는 1954년 10월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고, 1956년 6월 영국군이 철수하자 7월 26일, 마침내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단행한다. 그러자 10월 31일, 영국의 사주를 받은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를 공격해 가자 지구와 아카바만에 접근할 수 있는 시나이반도 끝의 샴 엘 셰이크를 확보하기에 이른다. 2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에 완패를 당하자, 정규전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아랍 민족주의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투쟁 방법으로 ‘테러’ 조직을 구상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나온 것이 다름아닌 1964년 전직 이집트 군인 출신인 야세르 아라파트가 창설한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PLO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PLO는 테러라는 폭력 수단을 동원해 이스라엘을 파괴시키겠다는 목표를 가진 테러 조직이었다.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사살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그런 의미에서 알-카에다의 탄생 과정은 PLO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PLO는 ‘특정 인물’에 대한 ‘테러’를 무기로 삼았지만, 알-카에다는 ‘불특정 다수’에 대한 ‘자살 테러’를 무기로 삼는다는 점이다.)

‘6일 전쟁’으로 불리는 3차 중동전쟁(1967) 역시, 수에즈 운하의 아카바만 봉쇄를 둘러싸고 발생한다. 시리아, 요르단과 군사동맹을 맺은 이집트는 소련의 지원하에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지만, 오히려 이스라엘로부터 선제 공격을 당해 골란고원과 예루살렘 구시가지, 가자지구, 시나이반도, 웨스트 뱅크를 빼앗긴다. 흔히 ‘욤키푸르’(속죄일) 전쟁으로 불리는 4차 중동전쟁은 1973년 10월, 속죄일 기간에 이스라엘을 공습한 것으로 이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은 결국 이집트와 시리아의 공격을 물리치는데 성공한다. 전쟁에서의 패배로 이집트는 1979년 3월, 시나이반도를 돌려받는 대가로 이스라엘을 국가로서 인정하는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4차에 걸친 중동 전쟁을 종식시킨다.

***석유의 무기화를 구상한 카다피와 후세인**

이집트가 무대에서 사라지자 중동에서는 이스라엘을 상대할 또다른 정치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된다. 이 때 혜성과 같이 등장한 인물이 다름아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다.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문제로 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했다면, 후세인은 이라크 석유의 국유화 문제로 팔레스타인 분쟁에 개입한 경우였다. 후세인에게 석유 국유화 가능성을 깨우쳐준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생포된지 불과 1주일만에 WMD(대량살상무기)의 완전 포기를 선언한 리비아의 카다피였다. 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한 1973년에 발생한 1차 오일 쇼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70년까지 원유는 배럴당 1달러대인 반면, 소비자들은 휘발유를 1리터당 1달러에 구입하고 있었다. 여기에 산유국의 정부 지분율은 메이저 석유회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이는 제값을 받으려는 산유국의 시도가 미국과 유럽의 메이저 석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강대국에 의해 번번히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란의 팔레비 정권이 붕괴되고 호메이니가 등장하자 미국이 후세인을 지원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당시 미국은 이란의 종교 혁명이 아랍권에 확산되는 것을 막기위한 조치라고 해명했지만, 실상은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전세계 메이저 석유회사의 통제에서 벗어난 최초의 인물은 1969년 영국사관학교 유학생으로 영국에 와 있던 리비아의 젊은 장교 카다피였다(지난해 말 후세인이 생포된지 불과 1주일만에 이루어진 카다피의 WMD의 포기 선언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리비아 왕이 비굴한 자세로 영국에 석유 이권을 바치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은 카다피는 그 해 9월, 젊은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붕괴시키고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한 카다피는 메이저가 아닌 인디펜던스, 다시 말해 당시 리비아에서만 원류를 전량 매입하던 옥시덴탈사와의 협상에 성공, 정부 지분율을 대폭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카다피의 협상 방식은 이후 다른 중동 산유국의 협상 모델로 부각되어 1973년 여름, 원유는 배럴당 1달러대에서 3달러로 상승한다. 이에 대해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OPEC와의 협상입지 강화 차원에서 시추율을 올리려는 시도를 중단함으로써 석유 생산에 대한 통제에 나섰다. 하지만 1973년 10월에 터진 4차 중동전쟁의 여파로 11월엔 선진국 유가가 4배나 상승하는 석유 파동이 벌어진다. 게다가 생산량마저 감축되면서 당시 중동 원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우디 아라비아의 유가 고시 가격은 배럴당 11.69달러까지 수직 상승하게 된다. 마침내 제1차 오일 쇼크가 발생한 것이다.

1차 걸프전의 계기가 된 후세인의 쿠웨이트 침공(1990.8)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이라크의 주도로 이뤄진 OPEC의 쿼터(생산량 할당)를 쿠웨이트와 아랍에미리트가 무시하고 초과 생산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배럴당 3달러 정도의 인상 요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유가는 하락했는데, 이는 메이저 석유회사의 로비를 받은 미국의 배후 조종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후세인에게 있어,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고갈된 상황에서 쿠웨이트의 이같은 행동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1차 걸프전 이후 사담 후세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2000년 8월, 후세인은 이라크를 방문한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게 OPEC 석유 대금을 달러가 아닌 유로화로 사용할 것을 제안한 것이다. 후세인의 제안에 공감한 차베스는 이후 한달간 중동 지역을 순방하며 각 국지도자를 설득한 끝에 9월에 개최된 OPEC 회의에서 석유의 무기화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다음날 뉴욕 증시는 공황 상태에 빠지고, 2000년 대선을 준비하는 부시는 지지자들에게 “여러분 제가 후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죠?”라는 말로 후세인 축출 의지를 드러낸다. 2001년 4월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진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와 2003년 3월에 발생한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은 이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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