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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탄압 뚫고 탄생한 <그리스도의 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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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탄압 뚫고 탄생한 <그리스도의 수난>

<묵시록의 시대 1> 유대인의 역사적 이중성

<묵시록의 시대 I>: 유대인의 탄압 뚫고 탄생한 <그리스도의 수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막 11:9)와 “그 새끼를 당장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눅 23:21). 한 사람에 대한 이처럼 극단적인 찬양과 저주는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오늘날 기독교의 모태가 된 유대 땅 나사렛 예수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흘러나온 두 목소리다. 한 사람도 아니고 이처럼 수많은 유대 군중들의 입에서 동일 인물인 예수를 향해 터져나온 이 묵시록적 찬양과 저주의 행태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당시 로마의 치하에 있던 유태인들은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이를 살려내는 예수의 이적을 보고, 그를 구약에서 언급한 묵시록적 예언을 성취할 메시야로 믿었다(‘예수'(Jesus)란 이름은 ‘구원자’란 뜻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보고 그들이 열광적으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를 연호한 까닭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유대인들의 간절한 바램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나사렛 예수는 그들이 기대하는 묵시록적 ‘빅 쇼’를 대신해 제자들과 조용한 곳에서 만찬을 함께 나누며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차분한 마음으로 예비하고 있었다.

“호산나”를 연호하던 유태인들이 흥분한 폭도로 돌변한 것은 그 때부터다. 유대 총독 빌라도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예수를 당장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쳐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가 묵시록적 ‘빅 쇼’를 보여줄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군중들은 인위적으로라도 예수를 묵시록적 상황으로 몰아가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으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호산나!” 라고 찬양하던 입에서 “그 새끼를 당장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라는 저주가 터져나온 이유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에게 쏟아진 찬양과 저주는 이처럼 상반된 입장의 두 목소리가 아니라, 묵시록적 환상을 기대한 유태인들의 빗나간 욕망이 빚어낸 한 목소리였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기독교의 모태가 된 예수의 죽음은 이처럼 구약의 예언 성취에 혈안이 된 유태인들의 묵시록적 환상이 만들어낸 광기어린 카니발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새삼스레 그리스도의 ‘수난’이 전세계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에게 <리쎌웨폰>과 <브레이브 하트>로 친숙한 액션 배우 멜 깁슨(Mel Gibson)이 시나리오와 메가폰을 잡은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 이하 <수난>으로 표기)이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북미 영화 시장에서 3주 연속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현상을 보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맬 깁슨의 영화 <수난>은 카톨릭 력으로 ‘재(灰)의 수요일'인 2월25일 개봉에 들어가 불과 한 달여만에 3억 달러를 돌파하는 놀라운 흥행 실적을 보이고 있다. 이같은 흥행세에 힘업어 이제는 할리우드 전문가들조차 영화 <수난>이 오는 4월 둘째주 성지 주일에서 부활 대축일에 이르는 ‘성주간’까지 대략 3억7천500만 달러 안팎의 수입을 올려, <반지의 제왕III: 왕의 귀환>(이하 <반지의 제왕III>로 표기)이 세운 헐리우드 흥행 기록(3억7천110만 달러)을 갈아치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쯤되고 보면, 멜 깁슨의 <수난>은 <벤허> 이후 헐리우드에서 가장 성공한 종교 영화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유대인의 ‘반유대주의’ 논쟁이 부활시킨 <그리스도의 수난>**

그런데 정작 영화 <수난>의 흥행이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11개 부문을 석권하면서 흥행뿐 아니라 작품성에서도 인정받은 <반지의 제왕III>의 성공과 비교해보면 명료해진다. 먼저 <반지의 제왕> 시리즈는 총 4년여의 제작 기간에 3억7천만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인 반면, <수난>은 제작비가 그 10%도 안되는 2천5백만 달러의 저예산 영화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반지의 제왕III>은 전세계 동시 개봉을 앞두고 글로벌 홍보 전략을 통해 가히 ‘반지의 제왕’ 신드롬이라 불릴만한 붐을 조성할 수 있었다. 반면 ‘수난’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사전 홍보는 고사하고 미국에서조차 영화를 상영할 극장마저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멜 깁슨의 영화 <수난>이 개봉을 앞두고 이처럼 예상치 못한 ‘수난’을 겪은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유대인들의 뿌리깊은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의 죽음은 구약의 예언 성취에 혈안이 된 유태인들의 묵시록적 환상이 만들어낸 광기어린 카니발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영화 <수난>은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헐리우드의 유대계 자본은 영화 <수난>의 시나리오를 들고서 투자자들을 찾아나선 멜 깁슨을 냉대했고, 이같은 냉대는 헐리우드를 장악한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비유대계 투자자들의 외면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수난>의 흥행 신화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거기에서 시작되었다. 헐리우드를 장악한 유대인들은 투자자를 찾지 못한 멜 깁슨이 결국 제작을 포기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해 영화 <수난>의 제작에 나선 것이다. 예기치 못한 사태에 적잖이 당황한 유대인들은 <중상모략반대연합>(Anti-Defamation League)같은 단체나 친유대계 신학자 등을 동원해 멜 깁슨의 <수난>이 ‘반유대주의’를 선동하고 있다며 지속적인 음해를 가했다. 하지만 결과는 다시 한번 그들의 예상을 빗나가고 말았다. 영화를 제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던 <수난>이 ‘반유대주의’ 논쟁을 계기로 비로소 언론과 세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영화 <수난>이 우여곡절 끝에 완성되자, 이번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든든한 후원자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다름아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지난해 12월 초, 로마 교황청에서 개인적으로 영화 <수난>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영화에 대해 “(복음서에서 기록한) 사실 그대로”라며 멜 깁슨의 영화를 축복한 사실이 전세계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카톨릭과 유대교의 관계 강화를 위해 노력해 온 교황의 이같은 지지는 이 영화가 반유대주의를 촉발시킬지도 모른다는 친유대계 신학자들의 우려를 종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배후에 있던 유대인들의 압력을 무마시키는 데에도.

하지만 영화 <수난>이 북미 지역에서 개봉되기 위해서는 이 지역의 배급망을 쥐고 있는 유대인들과 적절한 타협점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비위를 거스리는 특정 장면에 대한 삭제를 의미했다. 문제의 장면은 빌라도가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예수를 군중 앞에 세우고 “이 사람을 보라! 난 그에게서 아무런 죄도 발견치 못했노라”며 석방시키려 할 때, 자신들의 ‘밥그릇’에 위협을 느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십자가 형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등장한다. 묵시록적 예언 성취에 혈안이 된 흥분한 군중들의 소요 사태를 두려워한 빌라도가 대야에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해 나는 깨끗하니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는 말에 유대인들이 “그(예수)의 피를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돌리소서!” 라고 외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멜 깁슨의 <수난>이 북미 지역에서 부분적이나마 개봉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면엔 이처럼 영화 <수난>의 편집 과정에서 또다른 ‘수난’이 있었던 것이다.

***제작팀의 극사실주의 기법이 부활시킨 <그리스도의 수난>**

하지만 제작 과정부터 예기치 않은 ‘수난’을 겪은 멜 깁슨의 <수난>이 개봉될 당시만 해도 이 영화가 지금과 같은 흥행을 거두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수난>은 <반지의 제왕>이 보여준 장대한 스케일이나 스피드한 사건 전개, 스펙타클한 전투 장면 등 헐리우드에서 말하는 흥행 코드와는 거리가 먼 영화였다. 오히려 그보다는 어떠한 흥행 요소도 배제한 채, 오로지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가 유대 관원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12시간 동안 겪은 그리스도의 ‘수난’에만 포커스를 맞춰,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듯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촬영한 엄밀하고 장중한 영화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수난>이 흥행 면에서 <반지의 제왕III>에 필적하게 된 것은 이같은 극사실주의 기법이 완성시킨 그리스도 ‘수난’의 완벽한 재현 때문이었다. 실제로 멜 깁슨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세계 최고의 분장 전문가인 키스 반들린과 그레그 켄놈에게 영화 <수난>의 백미인 예수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채찍질과 십자가 처형 장면을 부탁했다. 그러자 이 영화를 위해 못박힘과 관련된 해부학을 연구한 키스 반들린은 예수 역을 맡은 짐 카비젤을 분장시키는데 하루에 4-8시간을 투자하는 등, 최첨단 가발과 보철을 이용해 마침내 수난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완벽하게 부활시킬 수 있었다(물론 이 과정에서 짐 카비젤은 매일 7시간 걸리는 특수분장을 참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영화 <수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그처럼 생동감 있게 그려질 수 있었던 이면엔 촬영 감독인 킬데브 데스차넬의 공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멜 깁슨으로부터 극명한 음영의 대비를 통해 생생한 실감이 표현될 수 있도록 촬영을 요청받은 그는 영화 속에서 어둠을 꿰뚫는 빛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촬영의 40%를 밤 또는 밀폐된 실내에서 진행하는 집념을 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화 <수난>의 의상 책임자인 마우리지오 밀레노티는 철저한 사전 고증을 거쳐 직접 손으로 의상을 제작, 전반적인 시각적 디자인을 강화함으로써 멜 깁슨이 카메라 앵글에 담고자 했던 카라바지오의 갈색, 검정, 베이지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훌륭히 표현해냈다.

이제 남은 것은 예수가 살던 당시 사용하던 고대 아람어와 예루살렘 시가지의 복원이었다. 이를 위해 멜 깁슨은 고대 아람어와 정통 유대 문화의 전문가인 윌리암 폴코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의 노력에 힘입어 2천년전 유대인들이 사용한 ‘고대 아람어’와 로마 군인들이 쓰던 ‘거리의 라틴어’는 영화 <수난>을 통해 완벽하게 부활할 수 있었다. 또한 영화의 캐스팅이 완료된 직후부터 멜 깁슨은 고대 예루살렘과 유대 사막을 둘러싸고 있는 건조한 느낌의 촬영지를 찾아 전 세계를 뒤진 끝에 마침내 로마를 최종 촬영지로 낙점한다. 로마에는 세계 최고의 세트 제작팀으로 알려진 스튜디오 ‘시네시타’가 위치해 있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2000년이 넘은 고도(古都) ‘마테라’가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와 마테라가 촬영지로 정해지자 멜 깁슨은 오스카상을 수상한 프란체스코 프리게리와 칼로 게르바시에게 2천년전 예루살렘 시가지의 완벽한 복원을 주문한다. 그러자 프란체스코 프리게리와 칼로 게르바시는 불과 10주만에 마테라의 언덕과 배경으로 쓰이는 암벽 등을 이용해 1세기 예루살렘 시가지를 완벽하게 복원하는데 성공한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네시타’ 스튜디오가 있는 로마 외곽 지역의 세트에서는 2천년전 예루살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될 수 있었다. 영화 <수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 재판이 행해지던 사원과 필레트의 성 앞, 몇몇 법률 심의가 이루어진 정원, 예수 그리스도가 매맞고 채찍질 당하는 장면은 모두 이 거대한 세트에서 촬영된 것이다. 더불어 영화 <수난>의 백미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 역시, 이탈리아 남부 마실리카타에 위치한 아름다운 도시 마테라에서 촬영된 것이다.

***카톨릭 영화 <수난>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열광**

멜 깁슨의 <수난>의 흥행 신화에서 나타난 또다른 아이러니는 최근 헐리우드 흥행 코드와는 거리가 먼 종교 영화라는 점이다. 더구나 영화 <수난>은 단순한 종교 영화를 넘어 카톨릭에서 말하는 ‘14처’로 상징되는 ‘십자가의 길’을 형상화했다고 할 만큼 일반 대중들에게 조금은 생경한 그리스도의 ‘수난’을 다소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의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난>은 촬영 방식에 있어서는 다큐멘터리적인 극사실주의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내용 면에서는 영화의 첫 장면인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장면인 예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vs 사탄'의 구도를 명확히 드러내는 등 지나칠 정도로 종교(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이같은 분위기는 예수를 배반한 가룟 유다가 자살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묘사되고 있다).

게다가 멜 깁슨의 <수난>은 프로테스탄트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카톨릭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그리고 있었다(이 점은 영화 제작자인 멜 깁슨과 예수 역을 맡은 짐 카비젤(Jim Caviezel)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라는 점에서도 여실히 증명된다). 예컨대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넘어진 예수에게 마리아가 다가와 위로하는 장면이라든가, 피땀으로 얼룩진 예수의 얼굴을 베로니카가 수건으로 닦아주는 장면은 <성서>가 아닌 카톨릭 교회의 전승에 따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는 동안 그 뒤를 따르며 예수의 ‘수난’을 바라보는 마리아와 사탄을 대비시키는 장면이나, 엔딩 장면에서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말을 잊은 채 카메라 너머 관객을 응시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프로테스탄트에게는 낯선 성모 마리아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수난>의 흥행 신화에 불을 지핀 것은 카톨릭과는 조금은 껄끄러운 관계에 놓여 있는 프로테스탄트였다(흔히 ‘개신교’로 번역되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는 ‘이의를 제기하는 자’란 의미를 갖고 있다. 물론 여기서 이의 제기의 대상은 루터의 종교 개혁 당시 부패한 중세 카톨릭이다). 특히나 부시 정권의 지지 기반으로 알려진 남부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자들의 <수난>에 대한 열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텍사스에서만 매일 수천 명에 달하는 교인들이 <수난>이 상영되는 극장 앞에서 문전성시를 이룬 것이다(아마도 여기엔 카톨릭과 결별하면서 폐기된 교회 전승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향수가 배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같은 프로테스탄트의 폭발적인 반응에 힘입어 북미 지역에서 부분적으로 개봉되던 <수난>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될 수 있었고, 마침내 북미 시장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같은 현상은 아마도 4월2일 개봉하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수난>의 흥행 성공에 눈이 멀어 정작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동안 ‘교회’에서만 선포되고 묵상되던 그리스도의 <수난>이 매일 매시간 ‘카타르시스’란 이름으로 섹스와 폭력이 난무하는 ‘스크린’으로 인카네이션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카톨릭 사제들 사이에서 점차 확산되는 동성애와 미국 카톨릭 교회에서 저질러진 신부들에 의한 1천여 건이 넘는 성추행 사건의 본격적인 소송이 진행중인 상황에서. 더불어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여야 할 성공회가 동성애 결혼에 대한 찬반 논란으로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는 상황에서. 또한 사회 개혁과 개인의 성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성령 운동을 개인의 마스터베이션 상품으로 전락시키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타락 속에서.

그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 지난 3월 25일, 영화 <수난>을 관람한 뒤 자신이 애인을 죽였다고 자수해서 화제가 된 댄 랜덜 리치 주니어(21)의 ‘고해성사’ 사건이다. 미국 텍사스 남부 로젠버그 출신인 그는 멜 깁슨의 영화 <수난>을 보고서 자신의 죄가 떠올라 교회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며 죄를 고백한 뒤 마을 경찰서를 찾아 자수한 것이다. 이쯤 되고 보면, 마땅히 ‘교회’의 성직자가 각성시켜야 할 양심의 정화를 ‘영화’ <수난>이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멜 깁슨의 영화 <수난>은 2천년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며 자신의 피 값을 지불하고 세운 ‘교회’에서 더 이상 머물 곳을 찾지 못한 그리스도가 폭력과 섹스가 일상화된 극장의 ‘스크린’으로 인카네이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천년전 유대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몸 풀 곳을 찾지 못한 그리스도가 누추하기 짝이 없는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아기 예수’로 인카네이션한 것처럼.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영화 <수난>의 제작 및 배급 과정에서 나타났듯이, ‘반유대주의’에 대해 유대인들이 유독 그처럼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잠시 영화 <Once upon a time in America>로 돌아가 ‘반유대주의’에 희생된 유대 이민사를 이해해야만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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