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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마리 갑충'처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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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마리 갑충'처럼 지내고 있다

[삼성공화국, 어디로 가나] 25미터 철탑 위에 올라간 '벌레'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은 이 문장으로 시작한다. 갑충이 된 잠자는 졸지에 가족에 기생하는 존재로 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장 영업사원으로서의 생각과 내면이 변한 것도 아니다. 그레고르의 부모는 사장에게 빚을 졌는데, 그것을 갚기 위해 그레고르는 누구보다 성실히 일하고 있었다. "한 마리 갑충"이 되고나서도 그레고르는 "언젠가 돈을 제법 모아 부모님이 그에게 진 빚을 다 갚"(이상, 홍성광 옮김, 열린책들 )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은 죽음을 맞고 만다. <변신>을 독일 문학 쪽에서는 어떻게 해석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임금노동자의 초상 같다는 느낌이 떠나지 않는다. 카프카는 멀쩡한 사람인 그레고르를 "한 마리 갑충"으로 만들었지만, 앞에서 든 문장에서 보듯, 그 변신에 잠자는 놀라는 것이 아니라 담담하다. 그러니까 소설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레고르로 상징되는 노동자는 "한 마리 갑충"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서울시지하철 강남역 교통CCTV 철탑 위에 올라가 넉 달이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김용희 씨의 사진을 봤을 때 먼저 "한 마리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가 떠올랐다. 김용희 씨가 창원공단에 있는 삼성테크윈노동조합 초대 노조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가 해고당한 분이라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24년 동안 복직투쟁을 하다가 정년퇴직일인 7월 10일을 한 달 남겨두고 고공농성을 시작한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사이에 목숨을 건 단식투쟁을 했고, 이제는 그것을 멈추었지만,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전혀 아닌 데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사고의 작동이 멈추어버린다.

도리어 그는 그곳에서 웃으며 생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끔 페이스북을 통해서 우스갯소리를 던지거나, 어느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지상에 있을 때 투쟁을 탄압하고 못살게 구는 사람들이 많아서 올라왔다"면서 "차라리 철탑 위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정말 "한 마리 갑충"처럼 지내면서 삼성이 빼앗아간 자신의 삶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해고 이후 복직투쟁 기간 동안 김용희 씨의 삶은 삼성에 의해 철저히 짓밟혔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삼성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은 그 구조가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체감하고 있는 분명한 현실이다. 스스로 2016년 촛불에 의해 탄생했다면서 '촛불 정부'라고 자처하는 현 정권도 삼성 앞에서 작아지는 모습을 수차례 보여줬다. 삼성그룹의 이재용은 박근혜 정권 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깊이 연루된 인물이며, 대법원에서 뇌물죄가 인정되어 현재 파기환송심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은 도리어 이재용에게 "대한민국 경제를 이끌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현실에 드러난 대로 말하자면 그 말이 전혀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재용은 삼성의 이익을 위해 일을 한 것이지 대한민국 전체를 위해 일한 것은 아니며 동시에 중대한 범죄들도 저지른 인물이다. 이재용이 직접 개입했느냐 여부는 둘째 치고 김용희 씨의 경우도 삼성이 지금껏 저지른 중대한 범죄 중 하나이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조합 활동을 방해하고 그에게 깊은 고통을 줬기 때문이다.

ⓒ프레시안(최형락)

다시 말하면 가해자는 온갖 추문 때문에 재판 중인데 대통령에게 감사의 말까지 듣고 심지어 둘이 덕담을 나누기도 한다. 반면에 피해자는 "한 마리 갑충"이 되어 높은 철탑 위에서 간신히 몸을 누이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 기막힌 역전 현상은 정확하게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김용희 씨를 피해자로 보는 것은 사법적 관점에 국한되어야 한다. 즉, 김용희 씨의 삶을 짓밟은 삼성이 가해자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상대적 규정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2007년에 작고한 일본의 저명한 작가이자 평화사상가인 오다 마코토는, 1970년대와 김대중과 김지하의 석방, 구명 운동을 계기로 한국과도 인연이 깊은 사람인데, 그는 하늘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의 눈이 아니라 땅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벌레의 눈을 강조한 사람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오다 마코토는 중학생이었는데, 이 예민한 사춘기 소년은 오사카를 초토화시킨 미군의 폭격을 경험하면서 폭격하는 하늘의 폭격기가 아니라 폭격을 당하는 지옥의 현장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됐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벌레의 눈'이다. 하늘에 떠 있는 폭격기의 관점에서 보면 폭격당하는 땅의 모습은 요즘 감성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게임일 수도 있으나 땅에서 살아가는 벌레의 눈으로 보면 땅은 말 그대로 지옥불의 한가운데일 뿐인 것이다. 오다 마코토는 이 때 경험한 벌레의 눈으로 그의 평화 사상을 숙성시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는 가끔 김용희 씨가 25미터의 철탑 위에 올라간 오다 마코토의 벌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역설적으로 그곳은 그야말로 '별유천지 비인간'일 것이다. 삶을 짓밟힌 한 인간의 눈은 정말 오다 마코토가 말한 벌레의 눈과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발을 땅에 디디고 사는 존재는 높은 곳에서 사는 존재들의 진실을 꿰뚫어볼 수 있지만, 높은 곳에서는 땅에 사는 존재들을 일면적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그런데 김용희 씨는 땅에서도 아래였지만, 25미터 위에서도 변함없이 아래다. 단지 그가 "한 마리 갑충"처럼 그곳에서 농성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삼성이 저지른 중대한 범죄와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이 '높은 곳'에서 더더욱 긴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되어 있지만 주권을 위임받은 순간부터 실질적인 주권자는 정말 "한 마리 갑충"이 되고 마는 게 우리의 진실이며, 그것은 당연히 국가와 자본이 강요한 탓이다.

이 "한 마리 갑충"이 높은 곳의 진실을 꿰뚫어보는 '벌레의 눈'을 가지려면 김용희 씨처럼 저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가 수백 일 동안 비바람을 집 삼아야 하는 기막힌 일을 치러야 하는 것일까. 특히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다반사이다. 인공지능시대가 와도, 내연기관자동차가 수소자동차로 바뀌어도 이 지독한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도리어 대통령은 범죄자가 인공지능을 만들고 수소자동차를 만들면 달려가 손을 내밀고 칭찬을 한다. 덕담을 나누고, 감사를 표한다. 물론 인공지능도 수소자동차도 노동자가 만들며, 그 하청 노동자가 허드렛일을 다해야 만들어지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파기환송심에서 이재용의 범죄를 어떻게 판단할지 아무도 모른다. 비록 대법원에서 그 유죄를 인정했다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높은 곳’은 이제 법을 지킬 마음이 없는 것 같다. 이미 법 적용 단계부터 국가 공동체의 상식과 도덕을 우습게 본 지가 꽤나 되었다. 법을 끌어들이는 일에서부터 그리고 범죄 여부를 판단하는 일까지, 아니 법의 판단 이후까지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은 이제 기존 법은 필요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재용은 마땅한 법의 판결을 받아야 하고, 김용희 씨는 그간의 짓밟힌 시간을 보상받아야 한다. 누가 생각해도 '살아 있는 법'은 두꺼운 법전에 있지 않다. 지금 정권과 삼성은 이미 죽은 법의 테두리에서 서로 웃음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한 마리 갑충"이 되어 끝내 죽었지만 카프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독자들의 가슴에서 부활하는 새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문학은 다 말하는 것이 아니기도 하지만, 말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면 우리 삶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김용희 씨에게 내가 모르는 다른 삶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으며 그가 발을 땅에 내디딤으로써 드디어 완성되길 바란다. 다만 그것은 이재용이라는 범죄자가 있어야 할 곳에 마땅히 있는 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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