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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에게 할 말 있으면 사장 없는 곳에서 해라?

[오민규의 인사이드 경제] ILO 협약과 대법원 판례 짓밟는 문재인 정부

"집회는 시민들 보지 않는 곳에서 하고, 행진 역시 외진 곳으로 가서 하라."

만일 문재인 정부가 이런 정책을 제시한다면? 박근혜 정권의 국정농단에 분노했던 1700만 촛불 시민 모두가 "문재인 정부가 촛불을 배신했다"며 다시 촛불을 들고 나설 것이다. 서초동과 광화문에 모였던 시민들도 "집회·결사의 자유를 짓밟는 짓"이라며 반발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그 '짓'을 벌일 태세다. "사업장 안에서 파업과 집회는 할 수 없고, 사장한테 할 말 있으면 사장 없는 곳으로 나가서 해라." 한마디로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가 목 잡고 쓰러질 일이다.

점거 금지조항은 이미 현행법에 존재

문재인 정부가 10월 1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국회로 보낸 노동조합법 개정안 내용 중에서, 왜 이 내용을 넣었는지 설명조차 하지 않는 조항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고 △사업장 일부 및 전부 점거하는 형태의 쟁의행위를 금지하는 개정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사업장을 점거하는 쟁의행위는 처벌받지 않았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ILO 기본협약조차 비준하지 않은 대표적인 노동후진국인 한국에서 점거행위가 자유롭게 보장받았겠는가. 이미 현행 노동조합법 제42조에서 점거는 물론이고 폭력·파괴행위까지 모두 금지되어 있다.

노동조합법 제42조 (폭력행위등의 금지) ①쟁의행위는 폭력이나 파괴행위 또는 생산 기타 주요업무에 관련되는 시설과 이에 준하는 시설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시설을 점거하는 형태로 이를 행할 수 없다.

사실 이 조항은 손을 좀 보긴 해야 한다. 왜냐면 상식적으로 ‘점거’를 수반하는 쟁의행위를 금지해 버리면 파업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하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우뚱 하시는 분들이 있을 텐데, 집회·시위를 하다 보면 불가피하게 도로 일부를 점유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보면 된다. 도로 점유 일체를 금지해 버리면 집회·결사의 자유의 본질을 침해하게 된다.

사업장 안에서 쟁의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일부 시설 점유와 점거가 불가피하다. 조합원들 다수가 출입문 앞뒤에서 출퇴근 선전전을 하다보면 출입로 일부를 점유·점거할 수밖에 없다. 식당과 현장 일부를 순회하다 보면 통행로 일부를 점유할 수밖에 없으며, 파업 결의대회를 위해서는 사내 거대한 광장을 점유·점거해야만 가능하다.

ⓒ청와대

ILO 협약과 대법원 판례도 '점거'를 파업권에 포함

그래서 ILO 역시 쟁의행위와 파업권에는 당연히 ‘점거’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한다. 지금까지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전문가위원회가 다뤄온 수많은 제소·진정 사건들에서, ILO는 한결같이 아래와 같은 원리를 적용해왔다.

▪ ILO 기준적용 전문가위원회, 1994년 GENERAL SURVEY 148항
"파업할 권리의 본질은 평화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데에 있으며, 위 권리에는 회사 부지를 점거하여 사용자를 압박하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대법원은 "점거 범위가 직장 또는 사업장시설의 일부분이고 사용자측의 출입이나 관리·지배를 배제하지 않는 병존적인 점거"의 경우에는 쟁의행위 정당성이 인정된다고 판결하여 전면적·배타적 점거가 아닌 부분적·병존적 점거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있다. 비록 ILO 협약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일체의 점거를 불법으로 몰아선 안 된다는 점은 인정한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건 상식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노동조합 활동이 사업장 내에서 벌어지게 되며, 여럿이 모여서 진행하게 되는 단체행동은 다양한 방식의 점유·점거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파업이 업무와 생산의 중단을 수반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쟁의행위는 사업장 일부의 점유·점거를 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점거 금지법이 아니라 쟁의 금지법

그럼 문재인 정부가 제출한 노동조합법 개정안의 ‘점거 금지’는 무슨 내용을 담았을까? 놀라지 마시라. 앞에서 설명한 ILO 협약 원리는 물론이고, 기존에 대법원이 판례로 형성해온 부분적·병존적 점거 일체를 금지하는 황당한 개악 내용을 담고 있다. (아래 개정안 내용)

제42조(폭력행위등의 금지) ①쟁의행위는 폭력이나 파괴행위의 형태 또는 생산 및 그 밖의 주요업무에 관련되는 시설과 이에 준하는 시설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시설에 대해서는 그 전부 또는 일부를 점거하는 형태로 이를 행할 수 없다.
ILO 전문가들이 보면 정말 목 잡고 쓰러질 개악안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조항은 ILO 결사의 자유 협약에 맞지 않는데, 사업장 전부는 물론이고 ‘일부 점거’하는 형태까지 모조리 금지한다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사업장 점거를 금지하는 게 아니라 사업장 내 일체의 쟁의행위가 금지되고 만다.

너무 과도한 해석 아니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자본가들이 노조 간부를 고소·고발하거나 손해배상소송 또는 각종 가처분 소송을 제기할 때 일관되게 사용하는 문법이 있다. "◯◯◯은 조합원 수십 명과 함께 식당 출입구를 점거한 채 피케팅과 선동을 하였으며…" "차체공장 통행로를 순회하던 도중 잠시 멈추어 통행로를 점거한 채 구호를 외치며 업무를 방해한 바…"

이미 자본가들은 오래 전부터 사업장 내 모든 쟁의행위를 ‘점거·점유’라고 주장해왔다. 만일 저 개악안이 통과된다면 수억~수십억 자문료를 받은 김&장을 비롯한 대형 로펌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사업장 내 집회도, 현장 순회도, 출퇴근 선전전도, 식당 선전전도, 모조리 사업장 ‘일부를 점거’한 불법행위라고 말이다.

제안 취지와 설명조차 없는 노동개악안

정부 개악안에는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을 기존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는 내용도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연장해야 한다는 것인지, 그동안 2년의 유효기간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고쳐야 한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체의 설명이 없다. 사실 사업장 점거 금지 관련 개악안에 대해서도 단 한마디의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10월 4일에 국회로 보낸 입법안 자료를 아무리 읽어봐도, 그동안 나온 고용노동부 보도자료를 모조리 뒤져봐도 아무런 설명이 없다. 국회에 보낸 입법안 자료에 ‘제안 이유’에는 △사업장 점거 금지나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의 내용이 일체 담겨 있지 않다. (아래 내용)

■ 문재인 정부 노동조합법 개정안(10월 4일)에 명시된 '제안 이유'
국제노동기구의 핵심협약인 “결사의 자유에 관한 협약”의 비준을 추진하면서 해당 협약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법률을 개정하기 위하여, 사업 또는 사업장에 종사하지 아니하는 근로자에 대하여 기업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노동조합의 업무에만 종사하는 근로자에 대한 급여지급 금지 규정을 삭제하는 등 근로자의 단결권 보장의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 현행 제도의 운영상 나타난 일부 미비점을 개선·보완하려는 것임.

이건 당연한 얘기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사업장 점거 금지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 등의 내용을 들으면 ILO 전문가들 모조리 목 잡고 쓰러진다. 이건 ILO 협약과 관계없는 내용일 뿐만 아니라, ILO 협약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내용들이다.

그러니 개정안의 ‘제안 이유’에 ILO 협약에 부합하는 법률 개정을 얘기하면서 △사업장 점거 금지나 △단체협약 유효기간 연장을 명시하는 건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도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랬다면 아예 빼야지 왜 슬그머니 집어넣은 걸까? 다른 이유가 없다. 경총과 전경련 등 자본가들이 요구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계급적 성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국제 망신 감수하고 자본에 봉사

문재인 정부는 자신의 개악안에 대해 단 한 줄도 설명하지 못하지만, ILO는 지난 100년 동안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본협약들의 원리를 설명해왔다. 이를테면 단체협약 유효기간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진정·제소 사건들을 다루면서 아래와 같은 원리를 결정한 바 있다.

▪ 단체협약 유효기간에 대해 3년간의 법령상 제한을 부과하는 것은 결사의 자유에 대한 상당한 제한임(Case No.2467,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 344차 보고서 제572항)
물론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단체협약 유효기간의 상한선을 3년으로 정하는 것이지, 하한선을 3년으로 정하려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이다. 현행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선은 2년이다. 그런데 현존하는 노동조합들의 단체협약 중에 유효기간이 2년보다 짧은 단협이 존재하는가?

한국의 경우 교섭과 대화를 죽도록 싫어하는 자본가들, 그리고 사용자단체들 때문에 단체협약 유효기간은 상한선을 정하는 순간 곧장 하한선이 된다. 최저임금이 곧 최고임금이 되는 원리와 똑같이, 유효기간 상한선이 3년으로 연장되는 순간 공공부문부터 시작해 당장 내년부터 모든 사업장에서 유효기간을 연장하는 개악안을 밀어붙일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ILO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분명한 원칙을 이미 선언하고 있다. 정부 개악안을 ILO에 진정·제소하면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자세히 볼 것도 없이 ‘협약 위반’으로 판정할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개악안 입법발의는 노동후진국이라는 국제 망신을 당할지언정 자본가에게 봉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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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민규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연구실장입니다. 2008년부터 <프레시안>에 글을 써 오고 있습니다. 주로 자동차산업의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다뤘습니다. 지금은 [인사이드경제]로 정부 통계와 기업 회계자료의 숨은 디테일을 찾아내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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