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하는 술 담배는 내 속을 아는데 말 잘하는 당신은 내 속을 모르네/ 남남이 만나서 부부라 치고, 수십년 배싹 없이 내배를 탓네/ 신작로 복판에 솥 때운 사람아 정떨어진 것은 때울 수가 없나/ 삼각산 몰랑에 비오나 마나, 어린 낭군 품안에 잠자나마나“
거문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여수의 섬 손죽도에서 전해오는 화전놀이 노래입니다. 입에 착착 감기는 민요뿐일까요. 손죽도에는 ‘제주년 배 떨어진디’ ‘독 보듬고 돈디’ ‘손잡고 돈디’ ‘처녀 배 짠디’ ‘지지미’ ‘날나리’ 같은 순 우리말 지명들이 아직도 그대로 불려지는 드문 섬입니다. 워낙 외딴 섬이다 보니 도시 문명의 영향을 덜 받고 섬의 고유한 문화를 간직할 수 있었던 덕분이지요. 손죽도는 한때 여러 말기암 환자들이 찾아들어가 살면서 완치 되어나간 섬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래서 ‘치유의 섬’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87강은 11월 2(토)-3(일)일, 1박2일 일정으로 여수의 섬 손죽도로 갑니다. 깊어가는 가을, 도시의 삶에 지치고 아픈 심신에 잠깐이라도 치유의 시간을 주고 싶은 분들을 초대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의 답사지인 <여수의 섬 손죽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언어의 보고’ 손죽도
‘제주년 배 떨어진디’ ‘독 보듬고 돈디’ ‘손잡고 돈디’ ‘처녀 배 짠디’ ‘지지미’ ‘날나리’...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이 생각나게 하는 지명들이다. 한자 지명 투성이인 나라에 이토록 쉬운 우리 말 지명들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이 몇이나 될까. 손죽도는 언어의 보고다. ‘독 보듬고 돈디’는 암벽 해안에서 돌을 보듬고 돌아야만 지날 수 있는 험한 곳의 지명이고, ‘손잡고 돈디’는 비탈진 암벽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 주어야만 건널 수 있는 곳이다. ‘처녀 배 짠디’는 처녀들이 모여서 베를 짜던 곳이고, ‘지지미’는 섬사람들이 봄이면 몇날 며칠씩 진달래 화전도 지저 먹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놀던 곳이다. ‘날나리’는 험한 길이 계속되다 걷기 좋은 평지가 나타나자 날아갈 듯 좋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제주년 배 떨어진디’는 물질 왔던 제주해녀가 물질하러 배에서 떨어지던 곳이다. 섬에는 화전놀이 때 불렀던 노래도 구전되고 있는데 섬사람들의 생활사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말 못하는 술 담배는 내 속을 아는데 말 잘하는 당신은 내 속을 모르네
이 아래 갱번에 굴까는 처녀야, 언제나 다 깨고 내 사람이 될래
남남이 만나서 부부라 치고, 수십년 배싹 없이 내배를 탓네
신작로 복판에 솥 때운 사람아 정떨어진 것은 때울 수가 없나
삼각산 몰랑에 비오나 마나, 어린 낭군 품안에 잠자나마나“
(여수 손죽도 화전놀이 노래 중 일부)
손죽도 사람들이 지지미 언덕에서 화전 지저 먹으며 즐겨 부르던 노래다. 역시 민요에 견줄 만한 시는 흔치 않다. 손죽도 화전놀이 노래 가사도 진짜 시다. 감탄이 절로 난다.
청년 장수 이대원
손죽도의 수호신은 청년 장수 이대원(1566-1587) 장군이다. 손죽도에는 이대원 장군의 사당이 있다. 그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긴 절명시가 심금을 울린다.
"진중에 해 저무는데 바다 건너와 슬프다
군사는 외롭고 세력은 부쳐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나라와 어버이 은혜 못 갚아 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릴 길 없네" (이대원 <절명시>)
이대원 장군은 평택에서 태어나 18살에 무과에 급제했다. 1586년 21살 약관의 나이에 흥양(고흥)의 녹도만호(종4품)가 됐다. 녹도는 지금의 녹동이다. 1587년 2월 녹도 앞바다에 왜구가 출몰하자 전함을 이끌고 출전해 왜구들을 섬멸했다.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적장을 생포해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넘겼다. 수사는 장군의 공을 자신의 것으로 하자 했으나 장군은 이를 거절했다. 왜구 토벌의 공을 가로채 출세하려다 실패한 수사는 장군에게 깊은 원한을 품었다. 2월 17일, 대규모 왜구들이 다시 손죽도를 침략했다. 수사는 수적 열세를 알고도 단지 100여 명의 병사만을 내주며 장군의 출병을 재촉했다. 장군은 이미 날이 저물고 군사도 적은데 덮어놓고 출정하는 것은 무모하니 내일 아침 날이 밝으면 군사를 더 모아 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간언했다. 하지만 좌수사는 장군을 강제로 출병시켰다. 장군을 사지로 몰아넣으려 작정한 행위였다.
장군은 출병하며 수사가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와 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수사는 출병하지 않았고 장군과 병사들은 3일 밤낮을 격렬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다시 병력 지원을 요청했으나 끝내 좌수사는 지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결국 장군은 혈서로 <절명시>를 쓴 뒤 왜구에게 사로잡혔다. 왜구는 장군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으나 거절당하자 돛대에 매달아 찔러 죽였다. 약관 21세의 청년 장수가 질투에 눈이 먼 직속상관의 계략에 희생된 것이다.
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덮어질 뻔했으나 전투에서 살아남은 장군의 부하 손대남이 살아 돌아가 진상이 밝혀졌다. 1587년 선조는 전라좌수사 심암을 참수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심암은 한양으로 압송돼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사건의 전말은 송강 정철의 아들 화곡 정기명이 지은 <녹도가>를 통해 전해진다. 그후 손죽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대원 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지극정성으로 올린 제사
할머니 한 분 우체국 담장에 기댄 채 여수 나갔다오는 아들을 기다리신다. 손죽도 주민들은 올해도 지난 음력 3월 3일, 이대원 장군 사당인 충렬사에 제사를 모셨다. 제를 지내는 날은 평택에 사는 장군의 후손들도 왔다. 사당의 담장 안에는 팽나무 고목이 세 그루나 서 있다. 처음 사당은 초가로 지어져 퇴락을 거듭하다 1983년 마음 주민들이 정성을 모아 지금처럼 기와로 다시 지었다.
"삼월 삼짇날 제사 지내라우. 사흘 동안 정신 바치고 지내라우."
사흘 동안 정성을 드린 뒤에서 제를 지낸다는 말씀이다.
"산물 떠다 바치고, 메지고, 깨끗한 사람만 궂은 디 안보고 그란 사람한티만 맺겨라우."
마을에서는 부정한 일을 겪지 않은 깨끗한 사람을 제주로 뽑아 제를 주관하게 한다. 깊은 산속의 맑은 물을 떠다 바치고 그물로 밥을 지어 올린다. 그 기간에는 사당에 금줄을 처서 사람이 함부로 출입하는 것도 금한다. 할머니가 처녀시절에는 동짓달과 삼월 삼짇날 한 해에 두 번씩 제를 올렸지만 지금은 음력 삼월 삼짇날 한 차례만 제를 올린다. 할머니는 처녀 시절 제를 올리던 어느 해 삼월 삼짇날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기신다. "눈은 많이 와서 좋습디다. 제를 올리고 나오는 디 함박눈이 쏟아져서 기분이 좋습디다."
당시에는 제를 모시는 사람은 신발도 두 켤레를 신었을 정도로 엄격했다.
"신도 두 컬레 놓고 신어라우. 정신 디린 신 벗어놓고 따로 신고 다니고. 밤중에 가서 물 떠다 바치고, 사람 안 본디 바치고. 궂은 사람은 안 가요. 음식도 안 묵고. 내 자신의 정신을 디린디 데고 어치고 묵어 지꺼요."
금식까지 해가며 그만큼 정성을 드렸으니 장군은 섬사람들의 수호신이었다. 많은 섬들이 교회가 들어온 뒤 당제가 없어지고 굿들도 사라졌지만 손죽도 사람들은 여전히 장군에 대한 정성이 지극하다. 왜구로부터 섬 주민들을 지키다 전사한 젊은 장군에 대한 고마움과 믿음이 그만큼 큰 까닭이리라.
세월도 쉬어가는 우리 집
손죽도에는 정원이 예쁜 집들이 많다. 아무리 허름한 집일망정 나무나 꽃을 가꾼다. 어떤 집은 ‘세월도 쉬어가고 나도 쉬어 가는 섬마을 우리집’이란 예쁜 문패를 달기도 했다. 골목을 오르는데 유달리 정원이 아름다운 집이 있다. 마당을 기웃거리자 안주인이 나와서 반긴다. 정원은 같은 동네 사는 친정어머니 솜씨란다. 어머니는 나무 가꾸는 것을 돈보다 좋아 하신단다. 다른 할머니들이 밭일 할 때 나무 가꾸는데 열성이란다. 안주인은 친정어머니 집으로 나그네를 안내한다. 마을과 바다와 산들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 손죽도에서 최고로 전망 좋은 집이다. 마당에 들어서자 할머니 집 마당은 의외로 소박하다. 잘 가꿔온 나무들은 모두 딸에게 줘버린 탓이다. 할머니는 나그네를 반기신다.
"오늘 연락선으로 들어오셨습니까. 우리 손죽도가 훤합니다."
할머니는 손죽도를 찾아와준 나그네에게 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창졸간에 나그네는 귀인이 돼버렸다.
"가실 곳이 없어서 이곳에 와주셨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우리 손죽도에 와주셔서."
할머니는 처녀시절부터 나무며 돌들을 좋아했다.
"처녀 때부터 나무도 좋고, 남들은 갯바위 김 뜯으러 가지만, 김 그런 거 덜 뜯고 나는 갯바위 근처에서 나무 하나씩 미고 왔습니다."
결혼한 뒤에도 나무와 돌들을 수집하는 취미는 계속됐다. 나무나 돌들을 봐놓고 와서 남편에게 부탁하면 "자네는 그런 취미나 하고 사소 나는 필요 없네." 하면서도 들어다 주곤 했다.
지금 시각으로 보자면 나무를 캐고 돌을 집어오는 것이 자연 훼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문화 혜택도 받을 수 없는 이 절해 고도에서 그런 취미라도 없었다면 그 모진 세월을 어찌 견뎠을까. 나무나 돌들을 캐다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집을 가꾼 것뿐이니, 그걸 너무 탓하지는 말자. 할머니는 손죽도가 고향이다. 선원으로 여지껏 여객선에 근무하는 할아버지는 여수 개도가 고향이다. 남편을 처음 만난 것은 처녀시절 여객선을 타고 다닐 때였다.
"객선을 타고 가다가 인연이 될라께 만났지요."
말 잘하고 넉살좋고 친절한 여객선 선원 총각은 손죽도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겨 여객선 안에서 연애를 걸었다.
"점잖은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객선을 타고 여수를 오가며 처녀도 차츰 선원 총각에게 마음을 열었다.
"잘해주니까 점차 정이 가더라고."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처녀의 친정집에 살림을 차렸다.
"아저씨가 성격 쾌활하고 인정 많아서 아들보다 잘 했어라우. 배에 다니면서 열심히 해서 상도 받고."
선창가에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 테니 한 번 찾아보라신다.
"어벌쩡하고 말씀 잘 하는 분이 아저씨요."
할머니는 무언가 먹을 거라도 내놓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와주십시오 해도 안 오실텐데 이렇게 와주시고. 여수서 안사다 놓으면 과일 하나 없어요. 과일이라도 있을 때는 손님이 안 오시고."
괜찮다고 말씀드려도 할머니는 내내 미안해하신다.
"우리 집이라고 왔는데 돌김이라도 있으면 디릴 텐데."
과일 없고 돌김 말려놓은 것도 없는 것이 잘못이라도 되는 양 할머니는 내내 어쩔 줄 몰라 하신다. 할머니 그 마음이 눈물겹다.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섬의 풍습
옛날 어릴 적 내가 섬에 살 때도 그랬다. 나그네의 할머니는 육지서 오는 박물장수며 엿장수들을 먹이고 재워 보내셨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손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섬의 풍습이고 인정이었다. 관광지가 된 섬들에는 사라진 풍습이지만 아직도 인적이 드문 외딴 섬에서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풍습이 남아 있다. 뭍에서 먼 섬이지만 손죽도에는 뭍에서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대부분은 고향으로 돌아온 은퇴자들이지만 그 중에는 친구 따라 낚시 왔다가 눌러앉아 사는 이도 있다. 서울 살다온 40대 부부도 최근 이주해 낚시 배를 운영하며 산다.
"얼마나 이쁩니까. 밥 먹고 살면 되죠."
그렇다. 다 밥 먹고 살자고 사는 세상 아닌가. 밥 먹고 살수만 있다면 섬이라고 무엇이 다르랴.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지만 그들 또한 밥벌이를 위해 직장이라는 섬에 갇혀 살지 않는가.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할머니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신다.
"진짜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실 수 있으면 와주세요."
할머니 환대의 인사가 벚꽃처럼 환하다. 꽃시절은 짧아도 삶은 매 순간이 꽃이다.
11월 섬학교 제87강 <여수의 섬 손죽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1월 2일(토)>
07: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맞추기 위해,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7강 여는 모임
-고흥 도착
-점심식사(고흥읍에서 남도밥상)
-남성항 출항
-손죽도 도착
-손죽도 둘레길 걷기(5km)
손죽도선착장-이대원장군동상-팔각정전망대-노랑바위-봉화산(162m)-분교-해수욕장-선착장
-저녁식사 겸 뒤풀이(자연산회와 섬밥상, 손죽도 수제막걸리)
20:00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11월 3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손죽도 섬밥상)
-마을산책
-손죽도 출항
-남성항 도착
-점심식사(벌교에서 쭈꾸미볶음)
14:30 서울 향발. 제87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11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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