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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탈북했는데 남한에서 겪은 건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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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탈북했는데 남한에서 겪은 건 차별"

[먼저 온 통일은 왜 남한을 떠났나] 네덜란드에 거주하는 김민재 씨 上

<프레시안>은 지난 7월 말, '북도 남도 아닌' 유럽으로 간 '조난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기존 미디어에 등장하는 탈북민과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북한이 아닌, 남한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한 정부와 사회가 통일을 말하기 전에 탈북민에 대한 처우와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3, 4편에 걸쳐 소개할 이는 네덜란드에 사는 김민재(가명) 씨다. 북한에서 운전병으로 10년 넘게 군 복무를 했던 김 씨는 고난의 행군 시절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고 2000년도에 남한으로 넘어왔다. 남한에 와서 신문배달부터 시작해 감자탕 가게에서 석쇠 닦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일을 했다. 가장 보통의 한국 사회를 마주한 그는 일상에서 겪었던 차별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희망을 찾아 남쪽으로 온 그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네덜란드 한 소도시에 위치한 그의 집을 찾아 이틀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를 갈무리해 전한다.

"나는 나를 가르쳐준 내 조국을 배신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김 씨는 인터뷰에 앞서 다짐하듯 말했다. 그의 말과 눈빛에서 한국의 언론에 대한 강한 불신이 느껴졌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왜 대뜸 그런 말부터 했는지 김 씨의 다음 말에서 알 수 있었다.

"남한 정부에서는 북의 나쁜 점을 말해야 하는 기회를 만들고, 그런(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말) 말을 하면 금전적인 보상을 했다. 나는 그런 언변을 하지 않았지만, 조선 사람들에게 언변술로 조국을 팔아 돈을 벌게 했다. 그런 인터뷰는 하고 싶지 않다."

ⓒ프레시안(박정연)


북한 정부를 비판해오던 탈북민만을 조명해온 한국 미디어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 기존 미디어가 비춰온 북한을 악마화하거나 적대감을 품고있던 탈북민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는 북한을 '조선' 혹은 '북'으로, 자신을 북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조선인' 혹은 '조선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북을 떠나 남한에 왔지만, 또다시 남한을 떠나게 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설명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말고, 그가 목숨을 걸고 넘어왔던 한국을 떠나 멀고 먼 네덜란드에 정착하게 됐는지. 그는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평범한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었다"

1967년 청진에서 태어난 김 씨는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어려움 없이 자랐다고 했다.

"남한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출신' 혹은 '출신 성분'이라는 말을 쓰는데, 우리 조선인은 출신이라는 말을 안 쓴다. 모두가 노동자 농민의 아들 딸이라고 한다. 공부한 사람들은 인테리라고 하고. 나는 남한이 말하는 '출신성분'을 따지자면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 북한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김민재 씨 그리고 가족의 모습이 담긴 사진 ⓒ프레시안(박정연)
그 나이 때 여느 동무와 다름없이 개울에 빠질땐 빠져 놀고, 깡통차기도 하고 술래잡기도 하고 놀았다. 학교 다닐 때는 교복 같은 것도, 학용품도 일체 다 무료로 주니 걱정이 없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도 무료였고, 줄 서는 게 문제였을 뿐이다. 사람이 많고 아직 사회주의가 완성된 게 아니니까. 다 무료는 무료였다.

시내에서 사니까 배는 곯아보지 않았는데 양이 부족한 적은 있었다. 가정마다 배급날짜가 다르니까 배급날짜가 다른 엄마들끼리 배급을 꿔오고, 갚아주고 그런 적은 있었어도 굶진 않았다. 어렸을 때는 사탕과자도 원없이 먹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나름대로 어려움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가족이 끼니를 거르기 시작했던 것은 그가 군대에 가면서부터였다. 1990년대 초반 전조가 있던 '고난의 행군'은 그가 제대할 1994년경부터 잔혹하게 북한 주민들을 덮쳐왔다. 가족은 끼니를 제때 챙기지 못하니 장티푸스 같은 질병이 생겼다. 운전병으로 근무했던 그는, 운전할 차는 많았지만, 차에 넣을 기름이 없어서 차를 움직일 수가 없다고 회고했다.

"군대에서 여러 병정에 다녔다. 제대할 나이 때에는 사회주의 건설장이라든지 지방에 조직해놓은 돌격대에 선발되어 가는데, 나는 제대해서 청진의 '516 주택건설사업소'라고 사회주의 건설장에 배정을 받았다. 청진시의 주택을 책임지고 건설하는 곳이었다. 그곳 운수대에서 근무했다.

어려운 시기니까 원래는 제대군인에게 차를 하나씩 다 지급했는데, 차가 많이 있어도 기름이 없어서 차를 운전할 수가 없었다. 소련이 붕괴되고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외교관계도 무너지고 하니 나라사정이 어떻게 됐겠냐. 그러니 나와 같은 불상사가 생긴 것이다."

치르지 못한 어머니와 여동생의 장례식


김 씨는 제대한 뒤 '516 주택건설사업소'에서 근무를 할 때 결혼을 했다. 귀여운 아들도 태어났다. 하지만 1996년 아들이 두 살이 되었을 때, 사정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김 씨의 배우자는 아들과 함께 친정집인 황해도로 잠시 떠났다. 곡창지대인 황해도는 사정이 나을 거라고 생각하며 가족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김 씨는 중국에 가서 식량을 가져오겠다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청진에 남아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았다.

"많이 어려웠을 때다. 청진에서는 도무지 못 살겠는 거다. 식량이 나올 곳이 없어. 일을 해도 나올 데가 없고, 직장도 어렵고. 니나 내나 다 어렵게 사는데 특히 어머니가 막내를 낳고 병을 얻었다. 간염도 있었고. 허리도 다 꼬부라지고, 이빨도 빠지고. 어머니를 먹여야 했다. 그래서 단천에 있는 어머니 사촌을 뵈러 갔다. 하지만 모두가 어렵게 사니까 친척들도 돌아보지 않더라.

사촌 집에서 냉대를 당하고 나와서 그날 저녁 단천역으로 나왔다. 어머니가 너무 상태가 안 좋으셔서 단천역사 앞 기둥에 어머니를 앉혀놓고 장마당에서 어머니가 좋아하는 '속도전 가루떡'(옥수수 가루를 물에 개어 반죽해서 바로 만들어낸 떡)을 사러 갔다. 없는 돈을 다 털어서 그 떡을 사와보니 어머니는 앉은 상태에서 가버리셨더라.

돌아가신 엄마를 업고 역 분주소(역 내의 질서유지를 하는 경찰서와 비슷한 곳)에 엄마를 눕혀놨는데, 그 옆에 시체가 6구가 있었다. 엄마를 그 옆에 눕혀 놓는데, 장례라도 치러야 할 것 아니냐. 하지만 내가 그때 가진 것이 없어서, 우리 동네 청진이라도 들어갔다 와야 뭐라도 해드릴 사정이었다. 그래서 분주소장한테 '청진에 갔다 올 테니까 이 시신을 잘 봐달라고' 했어. 그때가 겨울이라 시체가 부패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 하지만 청진에서 다시 단천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어머니 장례식을 치르지 못했지."

ⓒ프레시안(박정연)

김 씨는 허공을 잠시 응시하다 말을 이어갔다. 어머니에 이어 막내 동생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개월 뒤 김 씨는 동생의 죽음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막내는 병원에서 죽었는데 나도 그때 몸이 많이 쇠약해서 같이 누워있었다. 어느 날은 눈을 떴는데 막내가 죽어가는 게 보였다. 막내가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손으로 못 묻어주고 병원에 '사체실'이라고 시체 쌓아놨다가 밤에 나가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보냈지. 장례도 못 해줬다."

어머니와 동생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그는 "가족의 죽음을 통해 조선사회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며 "조선사회를 비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그런 그가 탈북을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체제가 나쁘다고까지는 생각이 안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으니까. 그때는, 내 동생이 죽고 엄마가 죽어도 체제가 나빠서 떠야겠다고 생각은 못 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먹을 것은 쟁취해야 하나. 이런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오로지 살기위해, 생존을 위해 조선을 떠나게 됐다."

"'북한 인권' 외치며 입으로 돈 벌어먹기 싫었다"

김 씨는 기적적으로 아버지를 만나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배우자와 아들과 잠시 떨어져 지낸다는 게 영영 이별일 줄은 그때는 몰랐다. 아른거리는 아들의 얼굴을 뒤로한 채 김 씨는 목숨을 걸고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진, 목 밑까지 강물이 넘실거리는 두만강을 건넜다. 김 씨는 운이 좋게 중국에서 한국 기독교 선교사들을 만났다. 안전한 곳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2년을 중국에서 보내다 2002년 2월 27일 한국으로 넘어왔다.

남한으로 넘어오자마자 그는 현재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로 이름을 바꾼 중앙합동신문센터의 전신인 '대성공사'에서 신문을 받았다. 대성공사의 정식 명칭은 국군정보사령부 소속의 6073부대다. 당시 중앙정보부·국군정보사령부·국군기무사령부·국방정보본부·경찰 5개 기관이 이곳에서 탈북자를 합동으로 신문했다.

▲ 하나원 동기들과 찍은 사진. 손이 가리키는 곳에 김민재 씨가 있다. ⓒ프레시안(박정연)

대성공사에서 한 달, 하나원에서 두 달을 보내고 나니 5월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는 '전주 김' 씨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첫 둥지를 전주에 틀게 된다. 신문 배달부터 감자탕 가게의 석쇠 닦는 일까지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일을 했다. 몸을 움직이는 노동을 택한 이유는 말로 조국을 팔기 싫었다고 했다.

"우리가 하나원을 나왔을 때 (탈북자 커뮤니티가) '탈북자 동지회'밖에 없었다. 서로 사단법인을 만드려고 아우성이었다. 사단법인을 만들면 국가에서 돈이 나왔다. 입으로 조선에 대해 나쁜 말 하면서, '북한인권' 외치고 돈 벌어 먹고 산다. 나는 그런 사람들 보면 사람처럼 안 보이더라고, 그런 사람들하고는 일체 수교를 안 했다."

말로 조국을 파는 일 대신 그는 몸을 움직였다.


▲ 전주에서 지내던 시절 김민재씨와 친구가 함께 찍은 사진 ⓒ프레시안(박정연)

"전주 내려와 처음 한 일은 신문 배달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는데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배달했다. 사람들이 오죽하면 이게 석간인가 주간인가 혼동할 때도 있을 정도로 너무 느리게 배달을 했던 적도 있다.

결국 70만 원짜리 중고 오토바이를 사서 배달을 하는데, 전주 시내의 코아백화점에서 사고가 났다. 오토바이가 가고 있는데 택시가 급정거를 해서 그걸 피하려고 택시는 안 박고 나 혼자 나뒹굴어진 적도 있다. 내 오토바이 유리창 앞창만 깨졌는데도, 사람들이 볼까 봐 도망갔다. 이거 차도 안쳤으니까 빨리 달아나야겠구나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물정을 잘 몰랐다."

한 순간에 자본주의 사회에 던져진 김 씨는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교통사고를 유발한 차량에게 보험금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뭐가 무서웠던 건지 그는 자신이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다는 사실에 놀라 달아나고 말았다.

"나는 남한에서 잘 살 수 없겠구나, 뭘 해도 이 상태구나 싶었다"

김 씨는 얼마 안 가 신문 배달 일을 그만뒀고, 평화동 앞 감자탕 가게에서 일을 하며 석쇠를 씻고 고기를 끓이는 일을 했다. 하지만 곧 그는 감자탕 일도 그만두고 전주 하이트 맥주 공장에서 경비를 섰다. 나이도 많고 탈북자 신분인 김 씨는 하청업체를 통해 취직이 됐다. 정직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이트 맥주 공장에서 아직도 생각하면 열받는 일이 있다. 하이트 맥주 공장 소장이라는 사람이 정직원을 시켜줄 테니까 술을 여러 번 사라고 그랬다. 술도 한 번 먹으면 5만 원 이상이었다. 정직원이 되고 싶어서 소장이라는 사람에게 술을 여러 번 샀다. 하지만 말뿐이었지 순 사기꾼이었다. 나중에 일 그만두고 고소하려고 보니 증거가 없었다. 그 사람을 어떻게 하고 나올까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프레시안(박정연)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그는 일상에서 크고 작게 사기를 당했다. 동네 술집과 같은 공간에서조차 그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서도 차별을 당해야 했다. 북한 말투'를 썼다는 게 이유였다.

"전주 호프집에서 술을 먹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내가 조선 말투를 써서 '탈북자'란 것을 인지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은 야비한 언행으로 시비를 걸었다. 그 사람들이 '탈북자들 안 좋다'는 식으로 말했고 결국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런 차별은 남한 사회에 항상 내재돼 있다. 나 같은 경우 말투를 고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로 알아본다. 그렇기 때문에 말 안 해도 차별이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어떤 때는 직접적으로 내게 '북한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아니라고 말할 때가 많았다. 왜? 북한 사람이라고 하면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이 쳐다보거든. '저 거지 같은 것' 속으로 그럴 거란 말이다. 똑같은 사람인데.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특히 한국 사람들이 그렇다."

결국 그는 하이트 공장을 그만뒀고 운전병 경력을 살려 큰 트럭을 몰며 수산물 납품을 하는 일을 했다. 야근 수당을 받지 못한 채 새벽 3시까지 마트 수족관을 청소했다. 하지만 사측은 새벽에 일한 시간을 노동시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과도한 노동과 자신의 실수로 어느 날 차 사고를 냈다.

"11시에 마트의 영업이 끝나는데 그때 들어가서 수족관을 청소해야 한다. 청소하고 올라오는 시간이 새벽 3, 4시 쯤이다. 근데 회사가 그 돈을 안 준다. 후에 가서 내가 꼭 이 돈을 받는다고 하고 수첩에 계속 적어뒀다.

ⓒ프레시안(서어리)

어느 날 평택과 오산 사이 고속도로에서. 1, 2초 깜빡 졸았는데, 카메라가 설치된 전신대를 들이받고 차가 거꾸로 넘어졌다. 새벽 두시니까 차가 한 대도 없어서 다행이지. 나는 차에서 벌벌 기어 나왔는데, 유리창이 다 나갔다. 회사에서 나보고 차 수리비를 1500만 원을 내라고 했다. 내가 사고 낸 건 실수가 맞지만 너네가 나한테 여태까지 줄 것을 안 줬기 때문에 사고비를 못 낸다고 했다. 법대로 하자 해서 노동부에 제기했다."

노동부는 그동안의 무임금 노동에 대해 회사에 합의 할 것 제안했고, 회사 측은 200만 원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2년 간 야간 수당을 받지 않고 일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결국 김 씨는 사측으로부터 400만 원 합의금을 받았지만 결국 일자리 잃었다.

"남한에서 일자리를 찾아 아무리 이것 저것 해봐도 보람이 없었다. 결국 나는 남한에서 잘 살 수 있는 뭔가가 없겠더라고, 뭘 해도 계속 이 상태구나 싶었다. 그래서 한국을 떠났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을 지원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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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연 기자
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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