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중의 소련, 냉전 후의 러시아가 그랬듯이 미국 역시 대리전이나 무기판매, 독재정권에 대한 원조를 통해 폭력을 조장했는데, 하나같이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많은 경우 이러한 개입주의가 반미라는 역풍을 불러왔고, 지금도 역시 그러하다."
미국 역사가 존 다우어는 2017년 저서 <폭력적인 미국의 세기>(The Violent American Century, 한국어판은 2018년 창비 발간) 서문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군사주의가 미 대외정책의 주요 수단이었다는 얘기다.
두 가지가 주목된다. 첫째, 대부분의 미국인은 미국이 해외에서 벌인 군사 개입의 실상을 잘 모른다. 둘째, 미국(의 위정자들)은 평화와 자유,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대외 군사 개입을 해왔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주의가, 숱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지속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즉 베트남전쟁의 패배, 그리고 2001년 아프간전쟁 이후 대중동지역의 혼란을 통해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이 대외정책의 효율적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계, 학계, 언론 등 제도권이 여전히 군사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이유 말이다.
그 이유는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은 세계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는 지배계층의 뿌리 깊은 믿음 또는 허위의식, 그리고 이러한 합리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미국 국민의 무지와 무관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군사주의가 오히려 미국의 안보와 세계 평화를 해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군사주의는 지속되고 있다. 미국 지도자들이 미국은 세계를 이끌 특권을 갖고 있으며 군사주의는 이를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군사역사가 앤드류 바세비치는 이러한 믿음의 체계를 '워싱턴 룰(Washington Rules)'이라고 부른다. 2차 대전 직후 국민적 합의로 굳어진 이 믿음의 체계는 오늘날까지도 흔들리지 않고 있다. 정치인들은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과 이를 위한 군사주의를 확신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미국인들도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군사주의가 지속되는 이유다.
그에 따르면 2001년 9.11테러 이전 미국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에서의 국방부가 없었다. 2차 대전 이후 2001년까지의 국방부는 세계에 대해 미국의 군사력을 행사하는 지구경찰부(Ministry of Global Policing)였다. 실제로 미국은 80개 국가 약 800개의 해외 미군기지에 15만 명의 미군 병사를 파견해 놓았으며 전 세계가 자신의 작전구역이다. 미국 방어의 임무를 가진 국토안보부는 2002년 11월 창설됐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은 지속되고 있다.
오직 미국만이 세계를 운영할 특권과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대외 군사 개입이 필요하다는 게 '워싱턴 룰'의 요체다. 바세비치의 2010년 저서 <워싱턴 룰 ; 영구전쟁으로의 길>Washington Rules: America's Path to Permanent War, 한국어판은 2013년 '오월의 봄' 발간)을 바탕으로 미국의 군사주의가 국민적 합의로 정착되고 지속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워싱턴 룰
1941년 2월, 출판인 헨리 루스는 자신이 소유한 <라이프>에 '미국의 세기'라는 글을 싣는다. 그는 20세기가 '미국의 세기'가 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가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목적을 위해, 나아가 우리가 적절하다고 믿는 수단으로 전 세계에 우리의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하자. 그리고 이런 우리의 의무를 전폭적으로 수락하자."
미국이 원하는 목표대로, 미국이 택한 수단으로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가자는 얘기다. 그것이 바로 미국의 의무이자 특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루스의 주장은 꿈같은 얘기로 받아들여졌다. 2차 대전 참전 10개월 전, 미국 내에 고립주의 정서가 팽배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대부분의 미국인은 바깥 세계의 전쟁에 연루되기를 원치 않았다.
바세비치에 따르면 트루먼 대통령 이후 미국 정치권에서는 국가안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합의가 형성됐다.
첫째, 누군가 세계를 조직해야만 한다. 조직하지 않는다면 혼란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오직 미국만이 세계 질서를 처방하고 집행할 능력이 있다. 다른 나라, 유엔 등 국제기구에게도 그럴 능력이 없다. 세계를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비전과 의지, 지혜가 없다. 셋째, 국제 질서를 규정할 원칙을 만드는 것도 미국의 임무다. 그 원칙들은 당연히 미국적 원칙이며 이는 보편적 타당성을 지닌다. 넷째, 극소수 깡패국가들을 제외하고 이러한 미국의 역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은 미국이 지도자의 역할을 맡아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를 미국의 신조(American Credo)라 한다. 오직 미국만이 세계를 이끌고 구원하며 해방하고 궁극적으로 변형시킬 임무와 특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국제질서가 어떻게 작동돼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을 제시하는 동시에 이 규범을 집행할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믿음이다. 그 규범은 당연히 미국적 원칙이어야 한다. 즉 다른 나라들은 미국적 가치와 제도를 따라야 한다.
사실 이러한 믿음은 미국의 역사 속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초창기 이주민들은 전쟁과 음모로 얼룩진 유럽과는 다른 자유의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각오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각오는 1845년 멕시코전쟁 당시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말로 정식화됐다. 미국의 팽창은 바로 자유의 확대라는 믿음이다.
즉 미국은 세계를 이끌어갈 책무를 부여받은 선택된, 예외적 국가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2차 대전의 승리를 통해 미국은 세계를 이끌 수 있다는 현실적 가능성을 확인했다. 유엔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의 설립은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또한 미국의 지도자들은 세계를 이끌기 위해 군사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현존하는, 또는 앞으로 예상되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세계적 개입주의(global interventionism)를 유지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미 군사력을 전 세계에 주둔시키고(global military presence), 필요한 경우 군사력에 의한 세계적 힘의 투사(global power projection)를 실천해야 한다. 바세비치는 이를 미 군사주의의 성 삼위일체라고 부른다.
이러한 군사주의는 2차 대전의 경험과 전쟁 이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대공황을 벗어났고 자유세계의 지도자가 됐다. 이제 미국인에게 전쟁은 좋은 것이었다.
전쟁 후에는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과 신생 독립국가들의 사회주의, 민족주의 운동에 맞서기 위해 군사력이 필요했다. 미국은 세계를 미국의 이미지대로, 즉 자본주의적 질서로 재편하려 했지만 제3세계 국가들의 지향은 그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미국의 군사력은 소련의 팽창을 봉쇄하는 한편 서유럽, 일본 등 핵심 동맹국들을 자국의 세력권에 묶어두며 제3세계의 혁명을 저지하는 데 사용됐다.
또한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군수산업은 미국 경제의 필수 요소가 됐다. 미국 경제의 작동을 위해서는 군사 수요가 필요했다. 군산복합체가 형성된 이유다.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고 국내 경제의 작동을 위해서는 군사주의가 필요했다. 미국은 자신의 군사주의를 세계 평화를 위한 것으로 포장했다. 즉 '미국에 좋은 것은 세계에 좋은 것'이라는 논리다.
미국만이 세계를 이끌 수 있다는 미국의 신조와 세계적 군사 개입을 위한 성 삼위일체, 이것이 워싱턴 룰이다. 이는 2차 대전 이후 미국 정계의 초당적 합의이자 국민적 합의이다. 대다수 미국인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워싱턴 룰이 실제로 미국의 안보와 세계의 평화에 기여했는지 묻지 않는다. 또한 미국의 정치인에게 워싱턴 룰은 금기의 성역이다. 그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간 제도 정치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미국의 판단에 따르면, 미국의 목표는 인류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워싱턴은 다른 국가들이 미국의 군사력, 군사력의 세계적 주둔, 미국의 개입주의적 성향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편안함과 보증의 원천으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했다. 미국의 세계적 리더십이라는 미국의 신조에는 기본적으로 선의가 깔려 있으므로 미국의 군사행동을 규정하는 성 삼위일체도 좋은 것이라는 논리다. 적어도 미국 지도자와 국민은 그렇게 믿고 있다. 베트남전쟁을 비롯한 숱한 실패에도 과연 군사주의가 미국 안보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은 제기되지 않고 있다.
제국의 건설자들 : 커티스 르메이와 앨런 덜레스
워싱턴 룰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국민적 합의로 정착된다. 우선 외부 공산주의야말로 미국에 대한 최대 위협이라는 점을 국민들에 각인시켰다. 초대 국방부 장관 제임스 포레스탈은 공산주의가 미국을 위협하고 있으며 이 거대한 위협은 무한정 지속된다고 선언했다. 즉 미국은 공산주의와의 무기한 준전쟁(semi-war)에 돌입한 것이다. 국무장관 딘 애치슨 등은 NSC-68을 통해 미국의 대대적 재무장만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과 선언은 미국의 석학들에 의해 정당한 것으로 국민들에게 선전됐다.
이들 냉전의 전사는 공산주의를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지목했고 국내에서 직면하는 불확실성보다는 외부의 위협에 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점을 국민에게 설득시켰다. '저기 바깥에' 있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지금 여기서 닥친 문제들을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이다. 국가안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점을 미국 국민에게 설득시킨 것이야말로 이들의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리고 1940년대 말에서 1950년대에 걸쳐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위한 두 개의 강력한 안보기구가 자라난다. 핵전쟁을 담당하는 전략공군사령부(SAC)와 제3세계 등에 대한 비밀공작을 위주로 하는 중앙정보국(CIA)이 그것이다. 커티스 르메이와 앨런 덜레스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두 인물은 각각 10년 가까이 SAC와 CIA를 이끌면서 무소불위의 안보기구로 성장시킨다. 특히 1950년대 말까지 두 조직은 의회와 국민의 감시는 물론 대통령의 통제도 받지 않은 채 거의 무한대로 성장한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전략공군사령관을 역임한 커티스 르메이는 '전략폭격의 달인'이다. 그는 1942년 8월부터 약 2년간 나치 독일에 대한 공중 폭격을 지휘했으며 1944년 7월부터는 일본의 64개 도시를 초토화 시켰다.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의 사망자만 10만 명이 넘는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투하도 지휘했다. 1948년 6월부터 1년간 지속된 베를린 공수도 그의 작품이다.
전략폭격이란 적의 산업시설과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으로 전쟁 의지를 꺾겠다는 전략이다. 말이 좋아 전략폭격이지, 실상은 대규모 살육이다. 그런데 미국은 2차 대전부터 전략폭격을 전쟁의 핵심수단으로 삼아왔고, 그 방식을 정교화한 인물이 바로 르메이다.
1948년 10월 그가 전략공군사령관에 취임했을 때 SAC의 폭격 수행 능력은 보잘 것 없었다. 2차 대전 때 사용됐던 B-29 폭격기 30대가 전부였고 폭격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승무원은 고작 6명이었다. 1948년 7월 현재 보유 핵폭탄은 50개였다. 그나마 1945년 말 2개, 1946년 7월 9개, 1947년 7월 13개에서 크게 늘어난 것이었다. 당시 원폭 한 개를 조립하려면 기술자 39명이 이틀 이상 걸려야 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이 되면 SAC는 55개 기지에 20만 명의 병력을 거느린 거대한 부대로 탈바꿈한다. 뿐만 아니다. SAC의 초기 전쟁계획은 소련의 수십 개 도시에 핵폭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르메이가 퇴임할 즈음인 1957년에는 소련 내 공격 목표가 32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1963년에는 8400개, 1970년 1만 개를 초과한다) 특히 '확증 파괴'를 보장하기 위해 각 공격목표 당 여러 발의 핵폭탄을 투하하게 돼있었다. 실제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수 천만 명이 희생될 터였다. 당시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이렇게 불평했다.
"그들은 전 세계의 인지 가능한 모든 공격 목표를 파괴하기에 충분한 군사력과 그 전력의 세 배에 해당되는 예비 군사력까지 확보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자신의 부하가 작성한 전쟁계획에 불만을 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핵전쟁 계획에 관한 통제권을 대통령이 아닌 르메이가 가졌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까지 미국의 핵전쟁 계획은 전적으로 전략공군사령관 소관이었다.
소련의 침공을 억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공격력이 필요한가, 또는 억지가 실패해서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 전쟁을 이기기 위해서는 소련에 어느 정도의 타격을 가해야 하는가를 계산하는 것은 대통령, 국방 장관, 합참의장이 아니라 르메이였다.
르메이가 전쟁계획에 관한 완벽한 통제권을 가지면서 생겨난 문제가 바로 조직이기주의다. 전략공군사령관으로서 르메이는 "누구도 미국에 도전할 생각을 품지 못할 정도의" 강력한 핵공격 능력 구축을 자신의 목표로 내세웠고 이를 외골수로 추진했다. 과도한 군비 증강이 미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소련은 반응은 어떨지, 또 실제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그의 관심 밖이었다.
1953년 국방부 장관에 지명된 제너럴 모터스(GM) 사장 찰스 윌슨은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 좋은 것이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르메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SAC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는 얘기다. 그런데 SAC의 위상과 비중은 소련의 위협을 강조할수록 커지기 마련이다. 실제로 르메이는 그렇게 행동했다.
1956년 5월 르메이는 의회에 출석해 소련의 항공기 생산이 미국을 추월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그러자 미국 조야에서는 이른바 '폭격기 격차(Bomber Gap)' 논쟁이 벌어졌고 즉각 폭격기 성능 향상과 생산 증대에 나섰다. 사실 미국 의회는 르메이가 요구하는 모든 군비 예산을 기꺼이 승인했는데 SAC에 대한 투자는 엄청난 경기 부양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의 대중들은 르메이의 대대적 군비 증강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이로써 미국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믿었다. 1953년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SAC에 관한 최초의 독점 공개 기사에서 "자유세계는 우리의 훌륭한 원폭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손에 모자를 들고 경의를 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SAC에 대해 "3차 세계 대전 발발을 막을 유일한 힘"이라고 치켜세웠고 <뉴욕타임스>는 "SAC 승무원들이야말로 크렘린에 대한 서방 최고의 억지력"이라고 상찬했다. 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 월드 리포트>는 SAC에 대해 "서방을 지키는 요새" "크렘린의 핵 정복 야욕으로부터 세계를 지킬 유일한 힘" "SAC의 목표는 평화"라고 밝혔다.
이것이 1950년대 당시 미국의 분위기였다. 실제로는 소련의 수십 배에 이르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소련의 군사 정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끝없는 군비 증강을 추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1953년부터 1961년까지 CIA 국장을 맡았던 앨런 덜레스는 정치 명문가 출신이다. 외할아버지(존 포스터)와 이모부(로버트 랜싱)가 국무 장관을 역임했고, 형 존 포스터 덜레스는 같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국무 장관으로 일했다.
외할아버지 존 포스터는 1893년 국무장관으로서 미국인 정착민들의 하와이왕국 전복을 승인하고 도왔다. 미국 최초의 해외 정부 전복이다. 그는 장관 퇴임 후 워싱턴에서 대기업을 위한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로버트 랜싱은 윌슨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냈으며 대통령 야심을 가졌던 인물이다. 덜레스 형제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의 미국 대표단에 참여했다. 이들은 일찍부터 외할아버지와 이모부를 통해 미국 및 국제 정치의 실상을 배울 수 있었다.
1930년대 형 존 포스터와 함께 뉴욕의 유명 로펌 설리번앤크롬웰에서 대기업을 위한 국제변호사로 일했던 그는 2차 대전 중 스위스 베른에서 전략첩보국(OSS) 지휘관으로 일했고 1947년 CIA 창설에 깊숙이 관여한 창립 멤버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물론 연방수사국(FBI)과 군 정보부대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설립된 CIA는 기본적으로 월스트리트에 의한, 월스트리트를 위한 비밀공작기관이었다. 미국 정부나 대기업이 합법적으로 수행할 수 없는 더러운 공작을 대행하는 것이 사실상 핵심 임무였다.
비우호적 정부를 전복하고, 외국 관리를 매수하며, 사보타지와 암살을 지시하고, 거짓 정보를 흘리는 일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앨런 덜레스가 국장이던 시절 CIA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두 외국 정부를 비밀공작으로 전복시키면서 성가를 드높인다. 1953년 이란의 모사데크 정부와 1954년 과테말라의 야코보 아르벤즈 정부다. 전자는 자기 땅의 석유 자원을 국유화 했다는 이유로, 후자는 자국 내 미국 기업(유나이티드 프루츠)의 토지를 국유화 했다는(대가를 지불했다) 이유에서였다.
이 두 번의 비밀공작 성공에 미국 위정자들은 크게 기뻐했다. 그토록 적은 비용으로 그토록 대단한 일을 해낸 데 대한 흐뭇함이었다. 미국 정부가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공개적, 합법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CIA가 해치운 것이다.
하지만 CIA의 비밀공작은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았다. 1950년대 내내 동유럽과 중국 대륙에 비밀 요원을 침투시켰으나 거의 모두 발각돼 처형된 것이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임기 말년에 CIA 활동에 대해 '잿더미의 유산(legacy of ashes)'라고 개탄했다.
하지만 미국의 일반 국민은 CIA 활동의 실상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의회도 대통령도 감시하거나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CIA 활동이 일반에 알려진 것은 1961년 쿠바 피그만 침공 이후였다. (이 사건 직후 앨런 덜레스는 CIA 국장에서 해임된다) 그리고 1970년대 닉슨 행정부 이후에야 비로소 CIA 활동에 대한 대대적인 의회 조사가 이루어진다. 이란, 과테말라 정부 전복의 전모가 알려진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50년대는 CIA의 전성기였고 CIA는 의회나 국민의 감시 바깥에 있었다. 또한 조직이기주의가 작동했다. 즉 CIA에 좋은 것이 미국에 좋다는 논리다. 덜레스가 보기에 CIA에 해를 끼치는 것은 미국에 해로운 것이고, CIA를 위협하는 것은 곧 미국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또한 소련의 위협을 강조할수록 CIA는 얻는 것이 많았다. CIA의 권력을 영속화하기 위해서는 정보 독점을 유지해야 했다.
덜레스가 가장 걱정했던 것은 대통령이나 의회, 언론의 감시가 아니라 일반 국민의 감시였다. 그는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은 우리 정보기관이 아니라 우리에게 닥친 위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우리 정보기관을 명령 계통의 사슬 속에 집어넣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강조했다. 즉 CIA에 대한 민주적 감시와 통제를 거부한 것이다.
르메이의 SAC와 덜레스의 CIA는 상호보완적 관계였다. SAC는 가공할 핵전력으로 CIA 비밀공작에 대한 소련의 방해와 반대를 원천 봉쇄했고, CIA는 비밀공작을 통해 SAC가 할 수 없는 미 대외정책의 구체적 행동 목표를 수행한 것이다.
또한 르메이와 덜레스는 겉으로는 소련과의 대결을 피하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했지만 실제로는 대결의 가능성을 높이는 쪽으로 행동했다. 덜레스가 비밀작전을 통해 소련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면 르메이는 소련이 미국의 핵공격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SAC 정찰기들이 소련 영공을 정기적으로 비행했고, SAC 폭격기들은 블라디보스토크 등 소련 연해 도시들의 상공을 비행했다. SAC의 공식 모토는 '우리의 임무는 평화'였으나 실제로는 끊임없는 무력 과시로 평화를 위협한 것이다.
케네디, 워싱턴 룰을 강화하다
아이젠하워 행정부 말기가 되면 워싱턴 룰의 모든 요소들이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다. 가공할 핵무력의 SAC와 비밀공작의 CIA를 정점으로 세계적 군사 개입을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1950년 이후 계속된 군비 증강의 향연에서 소외된 집단이 하나 있었다. 바로 육군이었다. 1959년 국방예산 중 육군 몫은 23%에 불과했다. 해군에 배정된 예산은 28%, 공군이 46%로 거의 절반을 쓸어갔다. 육군은 공군의 딱 절반이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전쟁에 따른 대대적 군비 증강 이후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국방 예산의 추가 증액을 억제했다. 미국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핵무기를 군사전략의 핵심으로 삼았다. 핵무기 의존이 가장 돈이 덜 드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대량보복전략이 그것이다. 핵무기를 위주로 하는 군사전략에서는 운반 수단이 핵심이다. 운반 수단의 3대 축 가운데 장거리 폭격기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 공군 소관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조직이기주의가 작동했다. 국방 예산 배정에서 소외된 육군은 미국의 군사전략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입증하기 위해 유연대응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들고 나온 것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1955-59년)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맥스웰 테일러는 1960년 <불확실한 트럼펫>(The Uncertain Trumpet)이란 책을 펴냈다.
핵전력과 비밀공작에 의존하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군사전략으로는 미국의 안보 공약을 완수할 수 없다는 게 핵심 요지였다. 그는 대량보복전략은 "전면적 핵전쟁, 또는 타협과 퇴각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을 제공할 뿐" 제대로 된 안보전략이라면 "가능한 모든 범위의 도발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제 어디서든 특정 상황에 대해 적절한 무기와 군사력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주는" 새롭고 다양한 힘의 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른바 유연대응(Flexible Response) 전략이다. 유연대응을 위해서는 육군의 전력 증강이 필수적이다. 테일러가 노린 것은 바로 이 부분이었다.
테일러의 이 책은 7주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그리고 그해 대선에 도전한 케네디 후보의 눈에 띄었다. 케네디는 미국의 군사력 수준을 선거운동의 주요 쟁점으로 삼았다.
그는 선거 유세를 통해 "미국의 군사력은 소련에 비해 상대적으로 계속 약화되고 있으며 전 세계 모든 곳에서 공산주의가 전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이 당선된다면 이러한 '쇠락'을 역전시킬 것이며 "군사력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세계 최강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재래식 군사력에 "더 많은 기능과 신속성"을 부여함으로써 "재래식 군사력을 확대하고 현대화 하겠다"고 다짐했다. 재래식 군사력의 핵심은 육군이다.
케네디 취임 첫 해 미국의 국방비는 15% 증가했다. ICBM 생산은 월 30기에서 60기로, 당초 29척이었던 폴라리스 핵잠수함(핵미사일 16기 장착) 건조 계획도 41척으로 늘어났다. 최대 수혜자는 육군이었다. 1962년 육군 병력은 20만 7천명이 증가했으며 실전 배치사단은 11개에서 16개로, 육군 특수전 병력은 2배 늘어났다. 1950년 이후 대대적 재무장 과정에서 의붓자식 취급을 받았던 육군도 그 혜택을 입게 된 것이다.
당시 케네디 행정부의 안보 전략가와 군부 지도자들은 미국의 군사전략이 전임 행정부의 대량보복에서 유연대응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됐다고 자랑했다. 즉 핵무기와 비밀공작에만 의존했던 군사전략에 재래식 전쟁과 비정규전, 반란진압작전 등 새로운 선택지(option)들이 추가됨으로써 세계 도처의 어떤 위기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군사능력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아직도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량보복 전략과 케네디 행정부의 유연대응 전략에 대단한 질적인 차이가 있는 듯이 설명한다. 그러나 미국 역사가 프랜시스 개빈은 기밀 해제된 비밀 자료 검증을 통해 케네디와 맥나마라 국방 장관 등 정책결정자들은 유연대응 전략의 가치의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밝힌다. (Nuclear Statecraft, p.4)
그는 또 아이젠하워에서 케네디, 존슨에 이르는 역대 대통령들은 핵무기의 정치적 효용성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국의 공격적 핵정책이 초래할 수도 있는 핵전쟁의 위험을 우려했다고 전한다.(같은 책 p.9)
아이젠하워의 고별연설 :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고
실제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퇴임 하루 직전(1961년 1월 19일) 고별연설을 통해 미국의 과도한 군비 증강이 초래한 폐해를 지적했다. 군산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란 용어가 처음 등장한 연설이다.
그는 "국가의 거대한 군부집단이 엄청난 힘을 지닌 영구적 군수산업과 결탁해 모든 도시, 모든 지방의회, 연방정부의 모든 부서에 경제적, 정치적, 정신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고발했다. 국가안보를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취해진 여러 조치들이 미국의 전통적 가치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새로운 기구와 관습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침해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군산복합체를 비판하면서 명목상 공동선을 위한 공동의 비전을 진전시킬 의무를 지닌 정치기구와 제도들이 어떻게 남용되고 있는가를 고발했다. 고발의 핵심은 미국 국민이 정치라고 착각하는 것-민주당과 공화당의 경쟁, 의회와 백악관의 다툼-이 사실은 연극에 불과하다는 것, 실상은 군산복합체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아이젠하워는 냉전의 전사들과 한패였으며 실행책임자였다. NSC-68 추진 과정에서 소련의 군사적 위협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것도 그였으며 취임 이후 핵 군비 강화를 관장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그는 유능한 장군이었으며 양심적인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1950년대 내내 이루어진 미국의 군비 강화는 미국의 방어에 필요한 수준을 훨씬 초과했으며 오히려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과도한 군비 강화를 막지 못한 것은 군산복합체의 힘이 대통령의 통제 밖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정도로 미국의 군사주의는 강력하게 정착됐다. 하지만 퇴임 직전 이러한 실상을 고발한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부적절한 권력이 재앙적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현존하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라면서 오직 깨어있고 양식 있는 시민들만이 이러한 위협을 막고 "안보와 자유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소했다. 안보를 이유로 자유가 침해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오직 깨어있는 시민뿐이라는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고별연설은 1950년 이후 지속돼온 군비 강화의 실상과 폐해에 대한 제도권 내부 최초의 진지한 문제 제기였다. 그의 경고는 주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것이었으나 가망 없는 대외 군사 개입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경고와 호소는 쇠귀에 경 읽기였다. 젊고 매력적인 케네디가 주창하는 새롭고 강력한 대외 군사개입주의에 미국은 빨려 들어갔다. 베트남전쟁이 그것이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