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에 대한 미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는 대략 한국전쟁이 끝나는 1953년부터 미 지상군이 베트남전쟁에 투입되는 1965년까지 지속됐다. 이 시기동안 미국은 소련과 중국, 동유럽 등 공산주의권을 제외한 세계 모든 지역에서 완벽한 행동의 자유를 갖게 됐다.
그 결과는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전 방위적 군사개입으로 나타난다. 1953년 미 CIA는 비밀공작에 의해 이란의 모사데크정부를 붕괴시킨다. 미국 최초의 외국 정부 전복 공작이다. 1954년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물러난 후에는 남베트남에 친미 분단정권을 세우고 이를 지탱하기 위해 이후 20년 가까이 베트남 인민과 전쟁을 벌인다. 1962년에는 케네디 행정부의 집요한 카스트로 정부 전복 공작과 소련의 핵전력 열세가 맞물려 쿠바 미사일 위기, 즉 미소 핵대결을 초래한다. 이 모두는 미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에 의한 일방적 군사주의가 불러온 일이다.
미국의 독립연구자 가레쓰 포터(Gareth Porter)는 2005년 저서 <압도적 우위의 위험들>(Perils of Dominance)에서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벌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미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 때문이었음을 논증한다. 197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가에서 독립연구자로 변신한 그는 25년간의 연구 끝에 1953-65년 미국의 군사력은 소련을 압도했고, 양국 지도자와 군부 모두 이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일방적 군사주의가 가능했다고 밝힌다.
군사력의 우위에 따른 행동의 자유를 갖게 된 미국은 남베트남에 친미 정권을 수립,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활용했고 소련과 중국은 이를 묵인했다.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에 대항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독립전쟁은 1954년 제네바합의에 따라 1956년 남북 총선거로 진즉에 끝났어야 했지만, 미국의 군사 개입으로 20년 가까이 더 지속된다. 1953-1965년 미국과 소련 간 군사력의 불균형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포터의 저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공포의 균형'이라는 신화
냉전 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 상황은 어땠을까? 미국 정부와 학계, 나아가 미국 국민을 비롯한 일반적 견해는 힘의 균형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즉 미국과 소련이 가공할 위력의 핵무기로 무장한 채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 또는 케네디 행정부가 정식화한 상호확증파괴(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에 의해 어느 일방의 군사력의 우위가 전략적 우세로 연결되지 않았다고 본다. 즉 핵전력에 의한 상호 억지가 성립돼 어느 한 쪽이 군사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의지를 상대방에 관철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비밀문서들이 기밀해제 되고 1990년 이후 소련, 중국 등의 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견해는 실제 현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난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2년여의 대대적 재무장으로 적어도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에 대해 군사력의 모든 부문에서 절대적 우위를 누렸고 이에 따라 미국은 소련의 반대나 견제 없이 일방적 군사 개입을 감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말부터 마크 트라텐버그, 멜빈 레플러, 프랜시스 개빈 등 일단의 미국 역사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소련에 대한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를 확보했으며 이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은 미 냉전정책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그 원인은 전략무기, 즉 핵전력에서의 미국의 압도적 우위 달성이었으며 그 결과는 대외 군사 개입이었다.
소련이 미국의 핵공격에 대한 신뢰할 만한 핵억지력을 갖게 된 것은 1966년이었다고 한다. 즉 미소 간에 핵무기에 의한 상호 억지가 성립된 것은 1966년 이후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 1960년대 중반까지 소련은 미국의 선제 핵공격에 의한 국가 전멸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국은 1952년 말부터 전략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확신했으며 이후 군사개입주의에 나섰다. 소련이 도전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1953년 초 덜레스 국무장관은 "미국의 압도적 우위, 소련의 취약함"을 언급했고, 한국전쟁 종전 직전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자들은 (미국의 핵위협에) 정말 겁 먹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55년 국가정보평가(NIE)에서는 소련 지도부는 "미국의 핵 능력이 소련을 훨씬 크게 압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이러한 힘의 격차가 유지되는 한 전면전의 위험을 피하려 할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실제로 미국 군부는 1953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소련이라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끊임없이 기획, 입안, 제안해 왔다. 특히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에는 케네디 대통령이 참가한 가운데 소련과 쿠바에 대한 전면적 핵공격 계획을 논의하기까지 했다. 미국의 핵공격이 실현되지 않은 것은 대통령의 결단 때문이었다. 핵전쟁이 초래할 인류 전멸의 책임을 대통령 혼자 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 군부가 여러 차례 소련에 대한 핵공격을 주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얘기다. 미국의 핵전력을 키워온 커티스 르메이 전략공군사령관은 1950년대에는 미군 정찰기가 백주 대낮에 블라디보스토크 상공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면서 핵공격 명령만 내려진다면 "우리 병사 단 한 명도 잃지 않고"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을 완전히 무력화 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CIA가 1955년 개발한 U-2 정찰기는 소련 상공을 제 집 드나들 듯이 비행하면서 소련 곳곳을 샅샅이 촬영했다. 이 정찰 임무는 1960년 5월 U-2기 한 대가 소련에 의해 격추되면서 중단된다).
핵전력
1980년대 미국에서 개발된 군사력의 양적 비교에(화력과 병력 규모, 재래식 병력의 기동성, 전략무기의 정확도 등을 지수화해 비교) 따르면 1955년 미국의 군사력은 소련의 40배에 이른다. 10년 후인 1965년에는 9배로 그 격차가 줄어들었다. 이러한 차이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근대 국가간 체제가 성립된 이래 패권 국가와 차상위 경쟁 국가 간의 격차가 가장 큰 것이었다.
그런데 전략무기, 즉 핵전력의 질적 차이는 이보다 더 컸다. 무엇보다 소련은 핵탄두의 운반 능력에서 미국에 현저하게 뒤떨어졌다. 핵전쟁에서 억지력이란 2차 보복 핵공격(second strike) 능력을 확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즉 적의 1차 핵공격(first strike)으로 아군의 핵전력이 일부 파괴된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핵전력으로 적에게 궤멸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면 억지력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적국이 2차 핵공격 능력을 확보한 것이 확실하다면 1차 핵 공격을 감행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련은 1965년에 이르기까지 신뢰할 만한 최소한의 2차 핵공격 능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1차 핵공격 능력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핵무기 숫자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핵무기 운반 능력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즉 1965년까지는 상호 억지가 성립되지 못한 것이다.
우선 소련은 장거리 전략폭격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개발 수준에서 미국에 한참 뒤떨어졌다. 또한 미국은 서유럽에서 중동, 일본에 이르기까지 소련을 포위한 동맹국의 미군기지에서 핵공격을 가할 수 있었던 반면 소련은 자국과 동유럽 국가 영토에서 서유럽에 대해서만 핵공격이 가능했다.
미국은 1953년 현재 비행거리 3000마일 이상의 B-47 폭격기를 329대 보유하고 있었다. 이 폭격기로는 유럽과 일본의 미군기지에서 소련을 타격할 수 있다. 1955년에는 공중 급유가 가능한 B-52가 배치됐고 이로써 미 본토에서 소련에 대한 핵공격이 가능해졌다. B-52는 1955년 18대에서 1960년에는 538대로 늘어났다. 1960년 소련에 대한 핵공격이 가능한 미국의 전략폭격기는 1735대였다. 또한 유럽, 일본 등의 미군 기지에서 B-47이 허술한 소련 방공망을 뚫고 소련을 드나들 수 있었다.
반면 소련은 1955년까지 미국을 타격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서유럽에 대해서만 핵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소련의 전략폭격기 Tu-4는 미국에서 가장 가까운 북극 기지에서 출발해도 미국 영토까지 왕복 비행이 불가능했다. 귀환을 포기한 자살 공습을 각오하더라도 미국까지 가는 데만 13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비행 도중 미군 전투기에 격추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1955-1959년 장거리 폭격기 비손과 베어, 중거리 폭격기 배져 등을 개발했지만 이들 폭격기 역시 미국으로의 왕복 비행이 거의 불가능했다.
흐류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1950년대 초 소련의 폭격기 설계기사가 "미국을 폭격한 후에 멕시코에 착륙하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이라고 말하자 소련 지도자들은 "멕시코가 우리 장모라도 되냐? 우리가 원하면 아무 때나 멕시코에 착륙할 수 있냐고"라고 대답했다.
소련은 1960년대 초부터 ICBM을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1962년 말까지 24기 미만이 실전 배치됐다. 반면 미국은 284기였다. 1961년 9월 현재 미 정보기관은 소련 미사일 기지의 위치를 매우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소련은 재급유를 통해 북극 기지에서 미 본토까지 왕복비행이 가능한 폭격기 약 100대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이들 소련의 ICBM과 전략폭격기는 모두 미국의 1차 핵공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핵전력의 3대 축(Triad)은 전략폭격기와 ICBM, 그리고 잠수함 발사 미사일(SLBM)로 구성된다. 그러나 1960년대 초까지 소련의 잠수함 전력 역시 핵 억지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잠수함 발사 핵미사일의 3분의 2가 디젤추진 잠수함에 배치됐는데, 디젤추진 잠수함은 소음이 너무 커 미국 잠수함에 쉽게 발각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핵추진 잠수함의 무기시스템이 너무도 불안정해 초기 수년간은 핵미사일 대신 재래식 미사일을 탑재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의 핵전력을 평가한 미군 보고서는 "소련의 전략적 상황은 사실상 절망적"이라고 평가했다. 소련은 1963-64년 미사일 격납고를 강화하고 발사 시간을 단축하며 미사일 기지를 분산 배치함으로써 적의 1차 핵 공격으로부터 자체 핵전력의 생존 가능성을 높였다. 신형 핵미사일 SS-9 42기의 실제 배치는 1964년 말에야 시작됐다. 소련 측 정보 등을 종합해보면 소련이 신뢰할 만한 최소한의 핵 억지력을 확보한 것은 1966년이었다.
한편 미국은 1955년 처음으로 서유럽의 나토 동맹국에 자국 핵무기를 배치했으며 그 숫자는 1960년 3000기, 1965년 6000기, 그리고 1971년에 7300기로 최대치를 기록했다. 유럽의 미국 핵무기 중 약 절반은 서독에 배치됐다.
동아시아의 경우 1954년부터 1972년까지 오키나와에 핵무기를 배치했는데 1967년의 1287기가 최대치였다. 이후 미국은 한국, 대만, 필리핀 등에도 핵무기를 배치했다. 1961년 초 동아시아 배치 핵무기는 1700기였으며 1963년 2300기, 1967년 3200기로 최대치였다. 핵무기가 가장 많이 배치된 곳은 오키나와였고 그 다음이 한국이었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면서 이곳의 핵무기는 모두 철수됐고 대만에서는 1974년, 필리핀 1977년, 그리고 한국에서는 1991년에 철수됐다.
1990년대 말 기밀해제된 미 국방부의 1978년 극비문서에 따르면 냉전 기간 중 38종의 미국 핵무기가 27곳의 해외지역에 배치돼 있었다. 이중 18곳은 주권국가였고 나머지 9곳은 미국의 보호령이었다.
반면 소련은 1962년 10월 쿠바에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를 시도했으나 미국의 반대로 실패했다. 소련은 동유럽을 제외한 해외 지역에 핵무기를 배치할 수 없었다.
군사력 투사 능력
핵전력은 미국과 소련 두 초강대국이 재래식 군사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 행동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궁극적 기반이다. 핵전력의 우위를 확신할 수 없다면 상대방의 반격을 무릅쓰고 해외 군사 개입을 감행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전면 핵전쟁을 통해 전멸의 위기를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1953-65년, 미국은 핵전력에서 소련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유지했다.
또한 재래식 군사력을 해외에 파견할 수 있는 능력, 즉 전력 투사 능력에서도 미국은 소련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차지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지상군은 물론 해군과 공군을 세계 어디에나 파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반면 소련은 자국 영토와 동유럽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군사력을 투사할 능력이 없었다. 즉 미국은 해외에서 군사력을 활용할 능력을 갖고 있었던 반면 소련은 군사력을 해외에 파견할 능력이 거의 없었다.
1953-65년은 중동과 동남아 지역에 분쟁과 위기가 만연한 시절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1950년대 중반까지 전 세계에 수 십 개의 대규모 군사기지를 포함한 약 3천여 개의 군사시설을 확보해 언제, 어디에라도 군사력을 보낼 준비가 돼있었다. 미 본토에는 6개 육군 보병 사단이 해외 파병을 위해 상시 대기 중이었다. 이와는 별도로 3개 사단 및 자체 항공단을 보유한 해병은 세계 어디든 병력을 파견할 수 있었다. C-124 수송기 59대로 구성된 해병 수송단은 수 만 명의 병력을 짧은 시간에 원거리에 보낼 수 있었다.
해군의 경우, 6함대는 지중해 해역을 완전 장악했으며 그리스,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에 있는 미군기지로부터 중동지역 어디든 1800명의 해병을 즉각 파병할 준비가 돼있었다. 동아시아에서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 남한, 대만 등에 45개의 주요 군사기지를 확보했다. 한편 7척의 항공모함을 비롯해 140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7함대는 서태평양 해역을 순찰하면서 여하한 지역분쟁에도 개입할 태세였다.
케네디행정부 당시 미국은 아시아와 유럽에서 2개의 대규모 전쟁과 카리브해 지역의 소규모 전쟁 등 2.5개의 전쟁을 동시에 치를 수 있는 군사력 증강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기존 해외 병력(유럽 5개 사단, 한국 2개 사단) 외에 '전략 예비 병력'을 3개 사단에서 8개 사단으로 대폭 증강하고 중동 또는 동남아 지역에 2개 사단 병력을 3주일 내에 파병할 수 있는 공중 수송 능력을 확보했다. 또한 1961-64년 태국에 베트남과 중국을 겨냥한 공군기지를 건설했다.
반면 소련은 자국의 세력권인 동유럽을 제외하고는 군사력을 투사할 능력이 없었다. 1959년까지 소련은 중동 지역에 병력을 공중 수송할 수 없었다. 1959년 배치된 수송기 An-12는 병력 65명에 20톤의 보급품을 싣고 이라크, 시리아까지 갈 수 있었으나 수에즈운하에는 미치지 못했다. 또한 소련은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에 군사기지를 갖지 못했다.
해병의 경우 당초 10만 명이었던 병력 규모가 흐류쇼프 시절 1만 5000명으로 감축됐다가 급기야 해체됐으며 1960년대 초 6000명 규모로 복원됐다. 그나마 해외 파병이 아니라 국경 부근에서의 방어가 소련 해병의 임무였다.
소련이 동유럽을 제외한 해외에 자체 병력을 파견한 것은 1962년 쿠바가 처음이었다. 4만 병력과 경폭격기 IL-28 42대를 파병했다. 케네디 행정부의 쿠바 정부 전복 공작에 불안을 느낀 카스트로의 간청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보급품 수송에 애로를 겪었다. 미사일 위기 당시 소련은 수송기의 중간 급유를 위해 기니아와 세네갈에 중간 기착을 요청했으나 이들 국가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바람에 보급품을 공중 수송할 수 없었다. 결국 해상 수송에 의존했지만 미국의 해상 봉쇄에 속수무책이었다.
해상에서도 소련의 군사력은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당초 스탈린은 원대한 대양함대 건설을 추진했으나 1953년 3월 그의 사망 이후 계획은 크게 축소됐다. 항공모함과 순양함 등 군함 375척의 건조가 취소됐고 13개 주요 군함 조선소가 어선 및 상선 제작으로 용도 변경됐다. 소련 군함에 함대함 미사일이 장착된 것은 1957-64년이었는데 이는 오로지 미 항공모함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방어용이었지 해외 진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실정이었다. 항공모함도 갖지 못했다.
1956년 수에즈 위기 당시 미 정보당국은 소련의 해군력에 대해 "전통적으로 해양 강국에 필요한 기동성을 결여"했다고 평가했다. 소련 해군의 60%가 발트해 및 흑해에 밀집해 있었는데, 이들 함대가 대서양이나 지중해로 진출하려면 나토의 승인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1964년 처음으로 소련 흑해함대가 지중해에 진출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까지 군사전문가들은 소련함대가 5분 내에 미 6함대에 의해 격침될 것으로 예상했다.
1958년 흐류쇼프는 마오쩌둥에게 중국 항구를 본거지로 하는 중.소 연합 잠수함함대 창설을 제안했다. 소련 해군의 동아시아 및 동남아 진출을 노린 것이었지만 이 제안은 거부당했다. 소련 해군이 강대국 위상에 걸맞은 위상을 확보한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1960년대 후반이었다.
경제력과 동맹세력
미국은 군사력에서만 압도적 우위를 누린 것이 아니었다. 경제력과 동맹세력의 측면에서도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우선 경제력의 경우, 미국은 2차 대전을 거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됐다. 전쟁 직후 미국의 GNP는 세계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다. 미국은 물론 영국과 소련 등 전시 동맹국의 전쟁 물자를 도맡아 생산한 덕택이었다. 미국이 2차 대전을 '좋은 전쟁(Good War)'이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반면 소련은 인구 약 3천만 명을 잃고 국토 대부분이 파괴됐으며 GNP의 약 20%가 감소하는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따라서 소련으로서는 경제 재건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미국과의 핵군비 경쟁이 소련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말렌코프, 흐류쇼프 등 소련 지도자들이 미국과의 평화 공존을 주창한 것은 군비 경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민생경제 회복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흐류쇼프는 집권 초기 4년간(1955-59년) 군사비 지출을 억제했다가 이후 4년간은(1960-63년) 33% 이상 증가시켜야 했다. 미국에 대항할 핵전력 건설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련의 경제성장률은 1958-61년 6.6%에서 1962년에는 2.2%로 뚝 떨어졌다.
군비경쟁의 부담 때문이 아니라도 소련 경제는 규모나 효율성, 기술 수준에서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1953년 미국의 GNP는 소련의 2.6배였고 10년 후인 1963년에도 2.2배였다. 특히 생산성 측면에서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단위 노동 및 자본 투하량 대비 산출량은 소련이 미국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경제 전반에 걸친 소련의 기술 수준은 미국은 25년 정도 뒤졌으며 그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1950-60년대 미국의 경제력은 소련의 수 배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됐다.
경제력의 열세보다 소련에게 뼈아팠던 것은 중소 동맹의 파탄이었다. 소련은 중국과의 이념대립으로 1958년 중국에 대한 경제지원을 철회하고 중국에 파견했던 소련 기술자들을 철수시켰는데, 1961년이 되면 미국은 이러한 속사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1961년 초 케네디 대통령 취임 직후 안보보좌관들은 중국과 소련 간 대립이 심화됐으며 이는 미국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환경이라고 보고했다. 1961년 말 CIA는 세계정세를 양자 대립(미국 대 중‧소)이 아닌 3자 관계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1962년 2월에는 중‧소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났다"고 결론 내렸다.
1962년 초 의회 청문회에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중.소 대립으로 인해 소련은 중국의 핵무기 획득을 원치 않는 것으로 보인다면서 중.소 경쟁은 미국에 유리하다고 증언했다. 그해 5월 국가정보평가(NIE)는 "그동안 서방측(과의 대결)에 집중됐던 소련의 에너지가 중국과의 대결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면서 중‧소 간의 전면적 경쟁을 이용해 소련을 서방측으로 유도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보다 유화적인 소련을 이용해 호전적인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구상이다.
한편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미국은 소련의 경제적 곤경도 간파했다. 1963년 열린 국방부 전략세미나에서 윌리엄 번디 국방부 차관보는 소련이 "매우 심각한 자원 고갈"에 직면해 있으며 미국과의 군비 경쟁을 계속한다면 경제에 치명적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1964년 초 CIA는 사상 처음으로 경제적 요인을 미소 간 전력 균형의 중대 변수로 주목했다. CIA는 흐류쇼프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힘의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군비경쟁을 제한하고 군비경쟁이 소련 경제에 미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면서 1963년 8월 체결된 부분핵실험금지조약 체결은 이러한 소련 외교 노선의 전환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해석했다.
1963년 중반 작성된 CIA의 정보 평가는 소련 지도자들이 "현재는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미국은 강한 시기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며, 쿠바 미사일 배치는 "상당 부분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책략"이었고, 이제 "소련 외교의 기본 임무는 미소간 힘의 관계가 소련에 유리하게 변화할 때까지 방어적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사일 격차(missile gap)'라는 허구
1953-65년 미국과 소련 간의 극단적인 힘의 불균형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즉 일방적 군사주의로 흐르게 했다는 것이 가레쓰 포터의 논지다. 이 기간 동안 미국과 소련은 힘의 불균형을 명백히 알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소련은 마치 미국의 하위국가처럼 처신했다는 것이다. 즉 미국의 대외 군사 개입을 저지하거나 견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겠다. 1957년 10월 소련의 '스푸트니크 충격'이나 1960년 미국 대선 과정에서 제기된 '미사일 격차' 논쟁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즉 1957년 이후 소련과의 핵전력 경쟁에서 뒤지고 있다는 미국의 여론이 잘못된 현실 인식이냐는 반론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당시 미소 핵군비 경쟁에 관한 미국 지도부와 일반 국민들의 현실 인식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정치지도자와 군부는 미 군사력의 압도적 우위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반면 일반 국민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의 불균형이야말로 미국의 군사주의를 유지시키는 비결이었다. 정치지도자와 군부는 '군사력의 열세'를 이유로 군비 증강을 계속했고, '빨갱이 공포'를 내면화한 일반 국민들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소련은 1957년 8월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시험에 성공한 데 이어 10월에는 인류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지구궤도 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핵무기 운반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이에 고무된 마오쩌둥은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고 발언했고, 1959년 미국을 방문한 흐류쇼프는 소련이 핵미사일을 소시지 뽑아내듯이 만들어내고 있다고 큰 소리를 쳤다. 또한 1960년 대선 과정에서 케네디 후보는 미국의 미사일 개발 경쟁에서 소련에 뒤지고 있다며 이의 만회를 촉구했다.
이러한 발언만 놓고 보면 마치 소련이 핵미사일 경쟁에서 앞섰으며 미국과 소련 지도자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소련은 ICBM의 최초 개발에서만 앞섰을 뿐, 실제 전력화에서는 한참 뒤졌다. 산업 역량의 격차 때문이었다. 1962년 말까지 소련은 24기 미만의 ICBM을 실전 배치한 반면, 미국은 284기였다. 즉 실제의 미사일 격차는 미국에 유리한 것이었고, 이후에도 격차는 더욱 벌어졌으며, 미국 지도부는 이러한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선 1960년 8월 알렌 덜레스 CIA 국장은 대선 후보인 케네디에게 극비 브리핑을 통해 거듭된 U-2 정찰 비행에도 불구하고 소련에서 단 하나의 미사일기지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알렸다.
케네디 행정부 취임 직후인 1961년 1월 말에서 2월 초에 걸쳐 맥나마라 국방장관은 1960년 8월 이후의 소련 정찰 사진을 직접 열람한 결과 ICBM 능력에서 미국이 소련을 압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2월 초 케네디 대통령은 랜드연구소 소속 한 연구원과의 대화에서 '미사일 격차는 없다'는 점을 인정했다.
같은 해 7월 소련 군부 내 CIA 첩자인 올레그 펜코프스키 중령은 소련군 고위 장성(원수)과의 대화에서 소련은 사실상 미사일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소시지 뽑아내듯이 미사일을 생산한다'는 흐류쇼프의 큰소리는 허풍이었던 것이다.
당시는 소련의 베를린 장벽 건설로 미소간 긴장이 고조되던 때였다. 7월 25일 케네디의 베를린 연설 직후 국방부는 제1격으로 소련의 모든 지상 핵무기를 파괴할 수 있다며 구체적 전면 핵공격 계획을 제출했다. 이 공격 계획은 케네디의 거부로 실행되지는 않았다.
11월 11일 맥나마라는 "전면 핵전쟁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소련"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듬해 2월 상원 군사위와 외교위 합동청문회에 나와 소련 핵전력은 "미국의 공격에 취약"하다고 증언했다. 미국은 소련 핵무기 기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으며 소련 방공망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이다. 이어 9월에는 미국 전략 핵전력의 우위는 앞으로 "최소한 수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케네디 대통령의 군사보좌관 맥스웰 테일러는 1962년 8월 소련 지도자들은 "핵무기 숫자와 운반수단, 그리고 조기경보 시스템 측면에서 자신들의 열세를 알고 있음이 분명하며" 특히 "미국 정찰능력의 탁월함은 그들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인 1962년 10월 26일 쿠바에 대한 전면 핵공격을 주장하며 "우리는 전면전에서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 지금은 전혀 걱정할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러한 정권 내부의 정확한 현실 인식을 일반 국민과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케네디 후보의 '미사일 격차' 주장을 공개적으로 부인하지 않았다. 사실상 인정한 셈이다. 또한 케네디는 취임 첫 해 국방비를 15%나 늘리면서 핵전력은 물론 재래식 군사력의 증강에도 박차를 가했다. 미국의 일반 국민에게는 미국의 군사력이 여전히 소련에 뒤지는 것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다.
흐류쇼프의 불안과 허풍
소련 역시 자신의 절대적 열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허장성세를 통해 자신의 군사력이 미국에 뒤지지 않는 체 했다. 스푸트니크 성공은 좋은 빌미가 됐다. 말하자면 미국과 소련의 지도자들은 압도적 힘의 불균형이라는 실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공포의 균형'이라는 허구를 유지한 것이다.
1950년대 중반 아이젠하워는 핵 군비통제를 위한 핵무기 현장 검증을 제의했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 후에 흐류쇼프는 미국이 "소련의 상대적 약세를 발견하고 공격해올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핵전력의 실상이 밝혀지는 것을 우려했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당시 "미국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 실제보다 소련의 핵능력을 과장해야만 했다고 털어놓았다.
소련은 중동 등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무력 과시에도 속수무책이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에서 압둘 카림 카셈 장군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미군을 레바논에 상륙시켰다. 혁명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무력 과시였다.
이에 대해 이집트 지도자 나세르는 소련에게 미국에 대한 핵억지 경고를 요청했다. 그러나 흐류쇼프는 "미국 놈들은 제 정신이 아닐세. 솔직히 말해서 우린 아직 싸울 준비가 안 돼 있네. 3차 대전을 치를 준비가 안 돼 있다는 말일세"라며 꼬리를 내렸다.
몇 달 후 대만해협에서 진먼-마쯔(金門-馬祖) 위기가 발생했다. 중국이 진먼섬 등을 향해 포격을 가한 데 대해 미국은 핵보복을 경고했다. 당시 흐류쇼프는 주소련 중국 대사에게 미국의 핵벼랑 전술은 "지극히 위험하며" 어쩌면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침략전쟁을 단행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1956년 소련공산당 20차 대회 이후 흐류쇼프의 국제정책은 '평화 유지'였다. 제3세계 공산세력에 대해 폭력혁명을 포기하고 오직 의회주의적 방법, 즉 선거에만 의존할 것을 지시했다. "작은 제국주의 전쟁이 세계적 핵전쟁으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주변부 국가의 혁명적 변화가 "적대하는 두 진영 간의 군사충돌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즉 미국과의 핵대결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는 얘기다.
1980년대 전반 미 국방부 분석에 따르면 흐류쇼프는 1961-65년 미국의 핵전력 배치와 미래 계획을 매우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미 핵전력에 대한 소련 측 평가와 실제 상황이 거의 일치했다는 것이다.
1960년 5월 격추된 U-2 정찰기의 필름을 분석한 결과 소련은 미국의 사진 정찰이 매우 정확했음을 알아냈다. 6월 알렉산드르 셀레핀 KGB 국장은 흐류쇼프에게 미국이 자신의 1격 능력을 확신하고 있다고 최초 보고했다. 즉 선제 핵공격으로 소련의 핵전력을 완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1962년 흐류쇼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미국이 소련 핵전력의 취약함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판단했다. 1962년 4월 소련 정보기관은 미국이 1961년 6월 소련의 전략폭격기와 미사일 등 지상 핵전력에 대한 전면 핵공격 계획을 수립했으나 그해 가을 소련이 50메가톤 수소탄을 실험한 후 공격 계획을 취소했다고 보고했다.
결국 1962년 가을 흐류쇼프의 쿠바 핵미사일 배치는 절대적으로 취약했던 소련의 핵억지력을 보강하기 위한 필사적 자구책이었던 셈이다. 흐류쇼프는 당시 상황에 대해 "진실을 말하자면, 만일 당시 핵전쟁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미국을 공격할 준비가 돼있지 않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 발언은 1974년의 초판 회고록에는 없었으나 냉전이 끝난 후인 1990년의 개정판에 실려 있다. 미소 핵전력의 '공포의 균형'이란 신화는 냉전 기간 내내 유지됐던 셈이다.
지속되는 미 군사력의 우위
가레쓰 포터에 따르면 1950년 미국의 군비 증강 이전까지 미국과 소련 간 힘의 균형은 애매하고 불안정한 것이었다. 게다가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했던 1945-49년 힘의 균형에서 핵무기의 역할은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또한 1949년까지만 해도 많은 미국 관리들은 소련과의 전쟁을 위해, 또는 소련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핵전력을 중심으로 대대적 군비 강화를 추진한다. 명분은 미국의 군사력이 소련에 크게 뒤진다는 것이었다. 이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을까?
소련 외교부에서 미국 전문가로 41년간 근무한 게오르기 코르니엔코는 1990년대 초, 다음과 같이 밝혔다. 냉전이 끝난 후 NSC-68의 소련 군사능력 평가를 소련 합참 간부들에게 보여주었더니 "미국 합참이 소련의 군사 능력을 이렇게 과대평가했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1950년 당시 미국 정보기관은 소련의 전쟁능력을 터무니없이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압도적 군사력의 소련'이라는 허구가 미국의 대대적 군사력 강화를 정당화한 셈이다.
사실 미국의 군사력은 핵군비 통제가 시작된 1970년대 일시적으로 소련과 균형을 이루었을 뿐 소련에 밀린 적은 결코 없었다. 특히 1981년 레이건 행정부가 대대적 군비 증강에 나서면서 미국은 다시 한 번 상대적 우위를 달성한다. 이와 함께 미국의 군사주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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