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조국 대전이 한 고비를 넘긴 뒤에 한국 사회에는 세대론의 태풍이 불고 있다. 대다수 언론은 이번 논란의 대립 구도를 86(민주화)세대와 젊은 세대의 충돌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 불평등을 계급, 계층이 아니라 세대를 중심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주목 받는다.
일단 지금 이 사회의 위기가 뭔가 새 것의 등장을 가로막으면서까지 완강히 지속되는 옛 것 탓이라는 데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여기까지는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를 곧바로 세대에 끼워 맞추는 게 과연 적절한 진단일까? '옛 것'의 자리에 86세대를 넣고 '새 것'에 젊은 세대를 넣기만 하면, 그림이 완성될까?
세대론이 각광받는 요즘, 나는 오히려 이런 시각에 거리감을 느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틀에 들어맞지 않는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86세대에 해당하는 50대에서는 20대와 마찬가지로 정부-여당 지지를 철회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반면 여전히 굳건히 정부-여당을 지지하는 세대는 30대다. 이를 두고도 2002년 월드컵 '붉은 악마' 바람이나 김대중-노무현 정부 경험 등을 들며 세대론에 따라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나는 그냥 세대론(더 정확히는 세대 대립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증거라 본다.
그럼 '새 것의 등장을 가로막으면서까지 완고히 버티는 옛 것'의 핵심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게 단지 '나이 든 세대'로 환원될 수 없다면 말이다.
낡은 세대가 아니라 낡은 상식이 문제다
내 생각에 그것은 '낡은 상식'이다. 우리의 인식과 실천을 좁은 울타리 안에 가두는 특정한 상식 체계가 존재하며 작동한다. 상당 기간 한국 사회를 지배해온 이 상식 체계 탓에 이 사회는 수십 년째 비슷한 일상 속에 맴돌고 있다. 이런 낡은 상식은 계급, 계층을 가리지 않고 세대 경계선까지 넘어 사회 전체에 확산돼 있으며,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상식의 싹이 등장하거나 자라나지 못하게 막는 역할까지 한다. 흔한 사회과학 용어법에 따라 우리는 이를 '이데올로기'라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86세대 논자들 가운데 유독 이 이데올로기를 순수하게 대변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이번 조국 논란에서도 이 세대에 속한 유명 논객들이 낡은 상식의 주요 발화자로 나섰다. 그래서 이는 86세대의 체험이나 속성과 결합된 이데올로기, 즉 '86세대 이데올로기'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작명에 역행하는 현실도 존재한다. 이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단지 86세대 대학졸업자들만이 아니다. 다수의 포스트-86세대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위 여론조사 결과가 말해주듯이 어떤 경우는 그 지배의 강도가 더 세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이 이데올로기에는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나는 홍기빈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을 비롯한 몇 분과 대화하는 가운데, 어울리는 이름 하나를 찾아냈다. 그것은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제6공화국'이란 단지 현행 헌법의 등장과 효력 지속을 나타내는 건조한 시기 구분만은 아니다. 이는 지난 30여 년간 우리가 함께 겪어온 역사 과정이다. 이 기간 내내 86세대가 다른 세대보다 눈에 띄는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분명 이들만 주인공은 아니었다. 그 이전과 이후의 여러 세대가 1987년의 어정쩡한 결말, 타협적 민주화, 외환위기와 신자유주의화, 이명박-박근혜 정권기의 '잃어버린 10여 년'을 함께 겪었다.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란 이 과정에서 다져지고 또한 이 과정을 지배해온 상식 체계다.
새 것을 억압하는 옛 것의 정체 –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는 그럼 우리의 인식과 실천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첫째,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는 1987년에 만들어진 권력 질서 안에 민주주의의 상상력을 가둔다.
6월 항쟁은 위대한 민주주의 (준)혁명이었지만, 민주화를 대통령 직선제와 등치시키는 한계 안에 머물렀다. 숱한 비민주 질서가 도전받지 않은 채 잔존했고, 더 많은 민주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물음들이 생략됐다. 그래서 헌법 위에 선 국가보안법 체제, 비선출직 관료가 주도하는 국가기구, 그 안에서도 독자적 권력으로 똬리 튼 검찰과 사법부가 그대로 남았고, 대중 정치를 활성화하는 정당 제도나 선거 제도(대통령 결선투표제 도입과 비례대표제 확대 등등)는 미래 과제로 넘겨졌다.
이후 한국 사회는 이 질서 안에서 대통령 자리의 주인을 바꾸는 데에만 익숙해졌다. 5년마다 돌아오는 대선이 민주주의의 거의 전부가 됐다. 이 대선에서 리버럴 정당이 승리하게 하거나 이를 통해 청와대에 입성한 세력이 벌이는 권력 투쟁을 응원하는 일이 곧 민주주의 투쟁이 되었다. 기존 정치 질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대개 변방의 목소리에 그쳤다.
둘째,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는 정치와 경제는 별개라는 전제 아래 정치적 민주주의와 사회경제 개혁의 상호작용을 차단한다.
6월 항쟁에 뒤이어 폭발한 노동자 대투쟁은 정치적 민주화가 사회경제 개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대중의 바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투쟁에 내재했던 한계, 즉 정당 정치와 결합하지 못한 '비정치적' 조합주의와 기업별 노동조합이라는 조직 형태 탓에 이런 바람은 대중의 극히 일부(지금 비판 받는 대기업-공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들)에게만 실현됐다. 반면 지난 30여 년간 국가가 추진한 사회경제 개혁은 노태우 정부의 토지공개념 정책이 최대치였다. 이후 이보다 더 멀리 나아가본 적이 없다. 이른바 '민주' 정부의 개혁들 가운데는 이처럼 부분적으로라도 소유 구조까지 손대며 대중의 권리를 개선한 사례가 없다.
제6공화국 질서 안에서 민주주의 투쟁의 '승리'는 이렇게 매번 사회경제 개혁 약속의 배반으로 이어졌다. 이런 경험이 반복될수록 정치적 민주주의는 비정치 영역의 개혁과는 상관없다는 것이 대중의 상식으로 굳어졌다. 정치('민주주의')와 경제('먹고 살기')의 명확한 구별은 이제 모든 계급, 계층에게 불변의 진리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들만의 자원(노동 시장과 자산 시장의 기득권, 주류 정당에 대한 영향력 등등)으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계층을 제외하면, 다수 대중에게 이는 '출구는 없다'는 패배주의의 승인을 뜻한다.
셋째,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는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 지구 생태계 위기 같은 새로운 과제들을 계속 관심과 고민의 사각지대에 가둬 놓는다.
대한민국에서 제6공화국의 시간이 시작될 무렵, 바깥세상에서는 이미 여성 해방의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했고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민 등 소수자의 권리가 부각되는 중이었다. 또한 성장주의와 지구 생태계의 모순과 충돌을 지적하며 대안을 모색하는 흐름도 '녹색 정치'라는 이름으로 벌써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의 한국 사회는 이들 과제를 자신의 급박한 현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와는 상관없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분위기는 지금껏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여성들의 진출과 노력으로 여성 의제가 점차 주목을 받고 있을 뿐, 다양한 소수자들은 여전히 정치 무대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더구나 선진자본주의 국가 중 유독 한국만 인류 문명 전체의 절박한 과제로 떠오른 기후 위기에 기괴할 정도로 태평하기만 하다. 혹한과 혹서도 이 단단한 무관심을 깨기에는 아직 무력하기만 한 것 같다.
탈'제6공화국' 운동이 시작돼야 한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의 포로다. 한국 사회를 전진시키려면, 넘어서야 할 것은 86세대가 아니라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다. 굳이 86세대가 문제라면, 이 세대의 유기적 지식인들(정치인, 언론인, 논객 등등)이 이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유지, 강화에 앞장서왔기 때문이다.
실은 이 이데올로기에 갇혔다는 점에서는 요즘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공정' 담론도 마찬가지다. 공정론은 기존의 부-권력 사다리를 그대로 전제한 채 사다리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경쟁이 공정해야 한다고만 주장한다. 이것은 부-권력 사다리는 결코 바뀔 수 없다는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의 한 파생물이다. 더구나 인류 문명 전체가 일정하게 수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각자의 삶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누락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공정론으로 86세대에 맞서봐야 무력하기만 할 뿐이다. 결국은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의 포로들이 벌이는 수용소 안 다툼이기 때문이다.
낡은 질서를 타파하고 싶다면, 우선 낡은 상식의 바깥에 서야 한다. 거기에서 새로운 상식을 다지고 기존 상식 체계를 안에서부터 흔들며 균열을 일으키고 마침내는 뒤집어야 한다. 감히 나는 그 '바깥'이 민주적이고 생태적인 사회주의의 상상력과 토론, 실험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옛 것 '안에' 이런 새 것을 침투시키고 확산시키는 노력은 탈'제6공화국' 운동, 달리 말해 '제7공화국' 운동이라 하자고 제안한다. 단지 헌법 문안을 바꾸자는 의미가 아니다. 제6공화국 이데올로기를 깨부수자는 의미의 '제7공화국'이다.
이번 소란을 계기로 이러한 '제7공화국' 운동이 시작되기만 한다면, 이 소동도 결코 헛된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현실 정치 세력 가운데 과연 시대의 요청에 부응할 주역들이 나타날 수 있을지, 그것이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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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준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의원은 오랫동안 진보 정당 운동의 정책 및 교육 활동에 참여해왔으며,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진보적 사회과학을 재구성하고자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에서 연구 및 출간 사업을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 세계의 좌파는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나>, <사회주의>, <장석준의 적록 서재>,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국가 대 시장 : 지구 경제의 출현>,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이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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