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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 태생과 고락을 함께한 '형제적'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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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중국, 태생과 고락을 함께한 '형제적' 관계

[원광대 '한중관계 브리핑'] 현대 북한­중국 관계의 기원

오는 10월 6일은 북·중 수교 70주년 기념일이다. 양국은 이미 기념행사 준비로 분주하다. 10월과 11월에는 베이징과 평양에서 각각 북·중 국제영화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북한 대외경제성 대표단은 최근 중국 창춘(長春)에서 열린 제12회 동북아 박람회에 참석해 양국 간 경제협력을 모색했다. 북한 중앙재판소 대표단과 조선로동당 국제부 대표단,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대표단 등 사실상 거의 모든 분야의 각급 기관이 중국을 찾고 있다.

9월 초에는 왕이 중국 공산당 외교부장이 평양을 방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수교 70주년에 맞춰 정상회담이 열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었지만, 북·미 대화의 재개와 맞물려 예단하기는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중국이 수교 70주년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흔히 북한과 중국의 '혈맹' 관계는 한국전쟁, 즉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10월, 절멸의 위기에 놓은 북한을 중국인민지원군이 구원했기 때문이다. 미국과의 일전 없이 중국혁명도 완수되기 어렵다고 본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상황 인식과 결합하여 이때부터 양 측 사이에는 이른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가 성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더 따지고 들어가 보면, 북·중 관계의 기원은 중국혁명과 보다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항일전쟁에서 국공내전으로 이어진 중국혁명에는 조선의용군과 동북항일연군 등 다수의 조선인들이 참여하였다. 중국혁명에 참여했던 김일성, 무정, 최용건, 김책, 박일우, 리상조 등은 해방 후 조선에 돌아와 북한 정권 수립의 주역이 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넘어 중국과 전 아시아를 침략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들 조선인 혁명가들은 중국혁명에 참여하는 것이 결국 조선의 해방, 나아가 조선혁명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들은 조선과 중국의 해방·혁명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상호 연결된 공동의 과제로 만들고, 북·중관계를 '혈맹'으로 정초시킨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국공내전 당시 중국공산당에 대한 북한의 지원이었다. 사실 국공내전에서 북한이 취할 태도는 자명했다. 국민당이 만주를 장악하게 될 경우 안게 될 지정학적 부담, 중국혁명이 한반도 통일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하면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북한에게도 절실한 문제였다. 김일성은 당시 지원 요청을 위해 온 중국공산당 간부에게 "중국의 사정은 곧 우리의 사정"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1946년 여름 국민당이 창춘(長春)과 선양(瀋陽)을 점령하자 공산당은 어려움에 처하였다. 국민당에 의해 남만주와 북만주가 사실상 분단되어 인력 및 자원 수송에 곤란을 겪었다. 이에 중국공산당 동북국은 안둥(安東)과 퉁화(通化)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되자, 북한 지역을 은폐된 후방으로 삼아 남만주 지역 작전을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7월 주리즈(朱理治)와 샤오징광(肖勁光)을 북한으로 보내 평양에 동북국판사처를 설치하였다. 판사처는 중국공산당이 정부 수립 전의 특수한 상황에서 국가 간 외교사무와 동일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만든 특별 기구였다. 이 기구는 약 2년 6개월 동안 존속하면서 중국공산당이 만주에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국공내전 당시 북한이 중국공산당을 지원한 내용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북한은 자신의 북부 지역을 후방기지로 중국공산당에 내주었다. 1946년 하반기 국민당 군대가 남만주 깊숙이 진격해 오자, 중공군은 안둥・퉁화에서 철수하면서 1만 8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북한 영내로 철수시켰다. 이렇게 철수한 중공 병력 중에는 북한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은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중공 동북국은 남만주 전체 전략물자의 85%에 달하는 2만여 톤의 물자를 북한 지역으로 옮겼다.

북한 지역은 만주에 있던 중공측 무기공장의 피난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46년 초와 1947년 초 중국 동북국은 훈춘(琿春)에 있던 탄환・제강・화학공장과 잉안(英安)의 주물・화학공장을 북한의 아오지인조석유공장 부지로 옮겼다. 이 공장들은 전세가 호전된 후 다시 만주의 안전지대로 옮겨졌다.

둘째, 북한은 중공 측에 전략적 교통로를 제공하였다. 1946년 국민당이 선양・창춘 등 대도시와 주요 교통로를 장악하게 되자 중공은 남만주와 북만주 사이에 각종 물자는 물론 병력도 이동시킬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중공 동북국은 북한 북부 지역의 길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당시 중공 측이 이용한 북한 내 교통로는 육상과 해상으로 나뉘었다.

먼저 육상 교통로로는 안둥→신의주→남양→투먼(圖們)으로 이어지는 선과 퉁화→지안(集安)→만포→투먼으로 이어지는 두 가지 선이 있었다. 해상 교통선은 다롄(大連)→남포 선과 다롄→라진 선 두 가지가 있었다. 특히 이 해상선은 남북만과 마찬가지로 분단되어 있던 북만과 중국 관내의 중공 점령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들 교통로를 통해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300만 톤이 넘는 물자와 1만 명이 넘는 병력이 이동하였다.

셋째, 당시 북한은 중공 측에 물자를 직접 지원하기도 하였다. 북한의 물자 지원은 무상 지원과 물물 교환, 판매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북한은 1946년 하반기부터 약 2년 반 동안 2천여 화차분의 물자를 중공에 제공하였다. 또한 북한은 중공 측에 교역을 통해 유산(硫酸)·질산·글리세린 폭약과 같은 전략물자를 제공하였다.

마지막으로, 북한은 중공에 병력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국공내전 시기 북한의 중공 지원과 관련한 사항은 학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김일성이 1947년 초 수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중공군과 함께 싸우게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당시 미군 정보보고를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개진하였는데, 이 보고서 자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 인근 주민들의 목격담이나 소문을 근거로 작성된 이 보고서 외에는 북한이 직접 부대를 파견하였다는 어떤 자료로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김선호에 따르면 북한 지역 청년들은 해방 직후부터 개인이나 무장대 단위로 만주 지역에 건너가 중국공산당이 만주 지역에 창설한 '동북민주연군'에 입대하였다. 이들이 입대한 부대는 대부분 남만주의 조선의용군 부대를 개편한 '리홍광 지대'였다. 1946년에서 47년까지 만주로 넘어가 동북민주연군에 입대한 북한 청년의 수는 1개 연대 규모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들의 중공군 입대가 완전한 개별적 입대가 아니라 중국공산당과 조선로동당 사이의 긴밀한 협조에 따른 것임을 보여준다. 해방 후 항일투쟁에 참여한 조선의용군 부대가 입북하여 조선인민군 창설의 한 축을 이루었고, 국공내전 시기에는 북한 청년들이 중국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동북민주연군에 입대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로동당과 중국공산당이 두 나라의 혁명과 양당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두 당은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분리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실제 그 과정도 국가와 민족이라는 경계를 구분하여 전개되지 않았다. 특히 만주라는 경계적 공간에서 두 당의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우며 하나의 혁명을 수행하였다. 항일전쟁 시기에는 일본군, 국공내전 시기에는 국민당군,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미군으로 공동투쟁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은 둘이면서도 하나의 혁명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양국의 관계가 '순망치한'으로 상징되는 단순한 지정학적 이해관계의 산물이 아닌, 태생과 고락을 함께한 형제적 관계임을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혈맹'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북핵 문제, 북·미, 미·중 관계의 변화 등 다양한 변수들이 작용하면서 북·중 관계는 부침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양국이 사회주의라는 기존의 체제를 고수하는 한 양국 관계의 근본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 북·중 관계는 국가 간 관계 이전에 공동의 혁명을 수행한 당 대 당 관계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1. 이종석, <북한­중국관계 1945~2000>, 중심, 2000

2. Cumings, Bruce,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The roaring of the cataract, 1947-1950, Princeton University, 1990

3. 김선호, 「해방 이후 북·중 군사협력관계의 형성과 '혁명'의 경계: 북한의 중국내전 지원과 군대창설을 중심으로」, <軍史> 1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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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문제특성화' 대학을 지향하면서 2013년 3월 설립된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국내외 정세 변화에 대처하고, 바람직한 한중관계와 양국의 공동발전을 위한 실질적 방안의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산하에 한중법률, 한중역사문화, 한중정치외교, 한중통상산업 분야의 전문연구소를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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