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9월 22~25일까지 유엔 총회에 참석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고 한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가동하기 위한 중요한 회담이 될 거라는 보도가 줄을 잇는다. 그런데 이번 유엔 정상회의은 '기후행동 정상회의'이다. 유엔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레스가 파리 기후협정 이행을 위해 2050년까지 온실가스 순배출을 제로로 만들 각국 계획을 요청했고, 이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로 열린 것이다.
청와대는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사무총장과 만나고 기후행동 정상회의에도 참석한다고 밝혔지만, 한국이 기후위기와 관련해서 어떤 계획을 내놓을 것인지는 알려진 게 없다. 유엔 총회 참석을 보도한 언론들은 정작 이번 정상회의의 원래 목적인 '기후위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날씨는 갈수록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지만, 기후는 여전히 먼 이야기다. 심해지는 미세먼지, 폭염과 폭우, 한파는 우리에게 기후위기의 신호가 될 수 있을까? 혹여나 모두들 신호를 듣고 있지만 못들은 척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수많은 신호들
우리도 이제 지난 10여 년 사이 더욱 심해지는 이상기후의 원인을 지구온난화로 꼽길 주저하지 않는다. 사실 이 곳의 기후가 바뀌기 전부터 우리는 기후위기 소식을 들어왔다. 기후과학자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졌던 지구온난화라는 현상이 80년대 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오존층 구멍에 이어 지구온난화는 지구적 환경문제의 대명사가 되었다. 빙하가 녹으면서 멸종위기에 처한 북극곰 이미지로 말이다.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남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이 조만간 잠기게 될 거라는 소식,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이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면서 식량위기를 겪고 있다는 소식들이 '국제뉴스'로 우리에게 전달됐다. 사상 최대의 허리케인과 태풍이 오고 있다는 뉴스는 매년 반복됐고, 중남미와 동남아의 가난한 지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래도 여전히 '국제뉴스'일 뿐이었다. 기후변화로 생존위기를 겪고 있는 남반구의 소식들은 가난한 나라들이 겪는 여러 문제들 중 하나로 이해될 뿐, 지구적 위기라고 인식되진 않았다.
북반구에 사는 우리들에겐 너무 먼 나라 이야기였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이미 1997년에 선진국들의 탄소배출량 감축의무를 부과한 교토의정서가 채택되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가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것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온난화를 초래한 원인이 과도한 탄소배출에 있음을 직시하고, 배출 책임이 큰 선진국들이 먼저 의무감축을 합의했다. 기후 위기의 원인이 사회에 있다면 그 해결책도 사회에 있다는 기후정치가 이미 활발히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 한국 정부는 세계화를 슬로건으로 내걸며 신자유주의를 수입하기 바빴다. 너무 지구적이라서, 세계적인 사안이라서 관심을 두기 어려웠던 게 아니다. 한국 정부와 사회는 기후위기를 정치의 문제가 아닌 자연의 문제, 지구 반대편 나라들의 안타까운 현실이라는 틀에 가둬버렸다.
기후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화석연료에 기초한 산업구조부터 일상 생활방식까지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이는 몇몇 기업들의 저탄소 녹색성장 마케팅이나 환경부 정책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묻는 가장 '정치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 기후정치가 작동한다면 그건 기후위기를 정치적 의제에서 삭제하는 '탈정치화'로서 작동했다.
개인적 실천과 근대 문명 사이
그렇게 30여 년이 흘렀다. 친환경을 내걸지 않는 상품을 찾기 어려울 정도이고, 전기차를 비롯한 친환경 교통수단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아파트 베란다나 관공서 지붕에 있는 태양광 패널은 이제 흔한 풍경이 되었다. 자전거를 이용하고, 육식을 줄이고,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기 위한 다양한 개인적 실천들도 이어진다. 그런데 지난 30여 년 동안 온실가스 배출량은 오히려 크게 늘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지속가능한 성장, 녹색 자본주의를 실천한 30년의 결과다. 2000년에 1206만 대였던 한국의 등록차량은 2018년 2320만 대가 되었다.
온실가스를 비롯한 각종 오염물질 배출산업과 각종 산업, 생활폐기물은 대체되거나 줄어드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필리핀 재활용 쓰레기 반송 사건에서 드러났듯이 많은 폐기물들이 제3세계로 재활용이라는 이름으로 수출된다. 중국의 공장과 토지에서 생산된 소비재와 식재료가 집을 가득 채운 지 오래다. 신자유주의라는 지구화된 자본주의 시스템은 생산, 유통, 소비를 지구적 차원에서 실행한다. 시장 경쟁은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고,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더 저렴하게 시장에 쏟아낸다. 이 모든 과정은 지구적 유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산업, 전력생산, 운송의 대부분이 화석연료에 기초한 현실에서 이는 엄청난 탄소배출 증가로 이어졌다.
이런 현실에 절망한 이들은 인류가 근대 문명을 포기하거나 않는 한 기후위기는 불가피하다는 비관론에 빠지기도 한다. 화석연료에 기초한 근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는 별개로 이러한 비관론은 우리가 바로 그 근대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에서 출발하지 못한다. 근대 문명은 누군가가 취사선택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미 우리 모두가 속해 있는 세계이며, 이 곳에서 누군가는 탄소배출을 더 열심히 해서 이윤을 얻고, 누군가는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한 생존 투쟁을 하며, 누군가는 탄소 체제가 강요하는 선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개인적 실천들을 한다. 그리고 이 세계가 기후위기를 초래했다. 이 세계를 바꾸기 위한 투쟁, 정치에서 출발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시작된 기후위기 속에서 개인적 실천과 비관을 집단적 행동으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결국 '정치'다.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던 시장이 만들어낸 거대한 불평등 앞에 우리는 분노하고 있다. 탄소배출권 시장, 녹색 상품 시장, 녹색 자본 투자 시장이 해결할 것이라던 기후위기는 더 큰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 시장은 정치가 배제되는 장소다. 그 곳에서 우리는 정치적 권리 주체가 아닌 재화 소유자에 불과하며, 모든 행위는 이윤추구로 정당화된다. 자본주의의 무분별한 이윤추구만이 승인되는 시장에서는 우리의 삶과 미래에 대한 권리마저 그렇게 거래됐고 그 결과는 기후위기, 생존위기다.
이제 기후정치를 시작하자
지금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기후정치는 온실가스 배출제로 '정책'이 아니다. 설령 정부가 배출제로 정책을 수립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상황에서는 실행될 리 없다. 한국 사회가 한 번도 직면해 본 적 없는 '기후위기'의 진실과 마주하는 게 먼저다. 유엔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는 향후 10년 안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절반 이상 줄이지 못하면 심각한 수준의 기후위기를 겪게 될 것임을 경고했다. 정부는 이런 엄중한 현실을 인정하고 국가적 대응과 논의에 당장 나서야 한다. 이미 영국, 프랑스, 캐나다를 비롯한 18개국과 900여개 지방정부가 기후위기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국제뉴스'로만 전달되는 기후위기 소식은 바로 지금 한국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의제가 되어야 하며, 그 일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후행동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기후위기'의 진실을 인정하는 대국민 담화부터 발표해야 한다.
'기후행동 정상회의'를 앞두고 9월 20일부터 전세계 수백만 명이 거리에 나선다. 한국에서도 9월 21일 서울 대학로에서 기후위기에 맞선 비상행동이 펼쳐진다. 9월 21일 비상행동이 한국 기후정치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날로 기억되길 바라며 함께 하려 한다.
인권운동사랑방이 발행하는 '인권으로 읽는 세상'은 <프레시안>과 <비마이너>에 공동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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