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단독'이라는 표시가 붙어 "조국 부인 5억, 사모펀드 운용사 설립 종잣돈으로"라는 제목의 기사는 독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게 될까? 문제의 회사설립 과정에서 5억이라는 돈이 투입되었고 그 돈줄은 조국 법무장관 부인 정경심 교수라는 논지를 보게 된다. 다르게 읽을 도리가 없다.
실제 내용은 어떻게 되어 있었던 걸까? 정 교수가 모씨에게 5억의 돈을 빌려주었고 이 돈은 나중에 돌려받았다고 한다. 돈을 빌려간 쪽에서 해당 기업 설립 자금으로 이 돈의 일부를 썼다고 하는데, 그것도 5억 전부가 아니라 초기 자본금 1억 가운데 1500만 원 가량의 액수라고 한다. 8500만원은 다른 기업이 지출한 자본금이라고 한다.
이 내용과 제목이 일치하는가? 물론 이 기사는 빌려주는 걸로 포장한 차명투자 가능성에 대한 의혹 제기다. 언론은 이런 의혹 제기의 권리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혐의의 가능성을 보도하는 것과 차명투자라고 확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또 하나 우려는 이런 내용이 언론의 독자적인 취재인지, 아니면 검찰의 은밀한 피의사실공표와 이어진 것인가의 문제다. 검찰이 언론의 머리 노릇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매우 나쁜 상태다. 그 순간부터 언론은 검찰의 손과 발이 된다.
언론, '대심문관'의 자리에 앉다
조국 법무부 장관에 대해 언론은 지금 "대심문관"의 자리에 앉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인용할 것도 없이, 대심문관은 사건의 실체보다 사람들의 자각을 두려워한다. 이들은 진상을 바르게 판단하는 정견(正見)의 탄생을 막는 데에 모든 노력을 집중시킨다.
그런 까닭에 특히 '단독'과 '속보'로 지금 한국사회를 인식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언론은 무엇보다도 '무책임'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증거 없는 상태에서 온갖 가설과 정황으로 혐의확증에 힘을 기울인다.
'만일'이라는 단서가 붙은 가설은 어느새 슬그머니 사실이 된다. 그러다가 아니라도 상관이 없다. 일단 여론이 잠시라도 들끓으면 그만큼 성과다. '만일'이 쳐 놓은 그물은 매우 촘촘하면서 크고 넓다. 가상의 논법이 사실을 입증하는 것처럼 통용된다. 이런 식으로는 누구도 무사할 수 없다.
재판도 벌어지기 전에 판결이 나는 꼴이다. 이것은 언론의 자유가 아니라 언론의 공포정치다. 누구도 견제할 길이 없는 권력의 폭주가 된다.
언론이 어떤 범죄 의혹 사건, 그것도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경우 이에 대해 관련 당사자의 혐의를 거론하고 범죄의 가능성을 제기하며 풀리지 않는 퍼즐에 대해 논의를 펼치는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혐의를 보도하는 것과 그것을 사실인양 무분별하게 기사화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이 둘 사이에는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운 근거를 가진 입증이 철저하게 요구된다. 이런 절차 없이 혐의를 곧바로 사실로 확정해버리면 관련 당사자는 '방어권이 없는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진상이 파악되기 전에는 관련 사건에 대한 보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진상에 다가서기 위한 공정한 공론의 장을 펼쳐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는 사람을 죽게 하고 나서 나 몰라라 도망쳐버리는 뺑소니와 다를 바 없다. 조금만 살펴보면 의혹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데도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은 의혹으로 만든다. 검찰과 결론이 이미 같기 때문이다.
검찰과 한 몸이 된 이들 언론은 당사자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는다. 해명이 되어도 묵살해버린다. 또는 대답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가공한다. 억울할 수 있다는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증거 없는 단정을 입증하려는 억지만 무성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작 짚어야 할 문제는 덮고 가며 맥락은 설명하지 않은 채 반증은 누락시키고 혐의로 지목된 사슬만 이어서 범죄를 확정해버리는 보도들이다. 누가 검찰인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신문들을 비롯해 공영방송과 종편TV를 가리지 않고 이런 폭력은 무한히 자행되고 있는 중이다. 반성과 성찰의 기미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다.
단두대 세우고 감옥 자물쇠 만지작거리는 언론
그야말로 "칼을 쥔 언론"이다. 과정을 살피고 본질을 꿰뚫어보는 "정신의 잉크"가 마른지 오래이며, 펜은 이미 녹슬어 박물관 구석에 방치된 유물일 뿐이다. 대신 이들은 자신의 기획으로 이루어질 결과를 예상하고 흐뭇한 표정으로 감옥의 자물쇠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아무도 그 자격을 준 바 없는 '무허가 법정'이 거리에 세워지고, 당사자의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사형 언도가 재빨리 내려진다. 언론은 단두대를 자처하고 있으며, 눈을 가린 채 천칭을 든 여신 디케(Dike)의 법정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디케의 눈이 가려진 것은 불편부당(不偏不黨)의 의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야만의 시대는 처형장에 모여든 사람들의 눈을 찔러 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칼의 난무(亂舞)다.
그러나 눈을 찔린 자들은 기이하게도 그 폭력이 달콤하기만 하다. 매일 그 폭력에 몸을 내맡겨야 하루를 제대로 사는 것처럼 되어가고 있다. 아편쟁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내면의 피골(皮骨)은 날이 갈수록 상접(相接)하고 있다. 이게 지금 한국 언론이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급류가 휘몰아치는 인당수에 심청이가 몸을 던진다. 희생제다. 선주(船主)와 그 무리들은 자기들 살겠다고 목숨 값으로는 돈 몇 푼에 지나지 않는 걸 내놓고 남의 귀한 목숨 빼앗으려 든 것이다. 그런 후에야 가슴을 치며 자기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누구를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비로소 눈 뜨게 되는 심 봉사의 절규는 그 후손들에게 아직도 무의미한가 보다.
그 정치적 암호는 도무지 해독(解讀)되지 못하고 있다. 체제의 본질적인 모순을 은폐하고 모든 죄를 누군가에게 뒤집어 씌워 화살을 쏘게 하고 정작의 주범들을 민중의 공격으로부터 비켜나게 하는 '희생제의 정치학'을 짚어낸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탁견은 낡지 않았다.
아편쟁이를 데리고 파시즘으로 가는 길, 괴벨스의 출현
지금, 한국 언론은 진실로 가는 문이 아니라, 허구로 세워진 분노의 용광로 속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고 있다. 삶에 지친 대중의 심리를 부채질하면서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파시즘 언론'을 연상시킨다. 다음번에는 누가 형장으로 끌려 나오게 될까? 그때도 역시 그의 죄 없음을 변호할 목소리는 '죄수'를 향한 군중의 욕설과 무허가 법정의 판결에 묻히고 말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오늘의 한국 언론에 의해 머리가 잘리는 것은 단두대에 올라서게 된 '죄수'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바로 자신의 머리가 잘려 굴러 떨어지고 있는 것을 모른다. 광장에 모여 단두대의 처형에 환호를 보내는 군중은 점점 더 극적인 드라마를 요구하고 있으며, 시신이 참혹하게 절단되기까지 그 욕망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로써 나치스의 선전상 괴벨스의 무대가 열린다. 괴벨스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그 누구보다 <조선일보>의 본명이자 정체다. 이로써 자신의 압제자를 구원자로 아는 대중들의 갈채가 끊이지 않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한겨레와 경향마저 언론으로서는 위태로운 지경에 있다.
검찰 권력의 개혁, 국지전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이 검찰 개혁 하나가 결코 아니다. 전 지구적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기후위기에 대한 비상행동이 요청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돼지열병에 대한 급속한 대처가 필요한 상황이다.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는 우리 사회의 계급적 특권을 타파하고 공정한 사회경제적 구조를 만드는 일과 한반도의 평화, 한일관계의 재구축에 따른 동아시아 신질서구성이 절실한 상황이다.
의회정치의 몰락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정국에 대한 총체적 개혁을 위한 선거법 마련,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와 사유체계의 깊이를 마련해야 할 책임 있는 교육의 변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이 모든 우리 사회의 모순이 "검찰 권력의 혁파"라는 최전선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의 역사적 진전에 반기를 들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는 세력 모두가 바로 이 전선에 집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하자면, 역사의 진로를 가늠 할 결정적 전선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것의 실마리가 풀리는 지점이 된 것이다. 언론의 머리가 된 검찰의 개혁, 검찰의 손발이 된 언론의 개혁은 너무도 절박한 과제다.
이것을 부차적으로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국지전의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 치열한 정치적 내전의 본질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게 된다. 혁명은 그 속도나 강도, 또는 방식이 어떠하든 정치적 내전을 피해갈 수 없다.
상대는 이 과정이 모든 영역에서 그들의 특권체제를 허무는 혁명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이쪽은 그걸 모르고 있다면 어떻게 하자는 건가? 한국사회의 권력 카르텔은 이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촛불시민혁명의 승리를 위해
윤석열 검찰은 바로 이 최전선에서 촛불시민혁명의 예봉을 꺾으려는 권력 카르텔 전체의 의지가 응집된 존재다. 이미 시작된 이들의 쿠데타는 때로 빠르게, 때로 그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천천히 그러나 목표물을 향해서는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정체는 끊임없이 폭로되어야 하며, 이들의 수사논리는 단호하게 격파되어야 한다. 아니면 이들의 손에 우리의 권력이 넘어가게 될 것이다.
법무부 장관이 가족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인권유린적 수사와 피의사실공표에 제동을 거는 것은 수사에 대한 압박이라는 논리는 가당치 않다. 대상이 그 누구든 헌법적 권리가 묵살되는 수사는 당연하게 제지되어야 한다. 검찰권력 개혁의 시동은 이렇게 걸린다.
그것이 이왕에 중단할 수 없는 수사가 되었다면, 그 수사의 결과를 올바르게 만드는 절차다. 우리는 그동안 검찰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을 "죄수"로 엮어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고통의 세월을 보내게 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검찰개혁은 계속 실패해왔다. 이번에는 결코 실패할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건 민주주의에 대한 보복이 시작되는 재앙이다. 이들 검찰과 한 몸이 된 권력 카르텔의 총반격은 지금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게 전선을 펼치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이 분명하지 않은가? 집결이다, 권력 카르텔을 압도하는 힘으로. 우리에게는 그 뜻이 아무리 선의라 해도 적전분열(敵前分裂)의 여유가 없다. 정세에 대한 안이한 판단은 깊고 긴 후회를 남길 것이다.
촛불시민혁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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