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발명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 이 대회들이 4년 주기라는 점이다.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 올림픽을 원용해 4년 주기를 택했고, 월드컵은 프랑스인 앙리 들로네의 제안에 따라 역시 4년 주기로 치러지게 됐다.
비즈니스적 측면에서 4년 주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하는 데 적합하다는 의견이 있다. 잊혀질 만 할 때 행사가 열려야 효과가 극대화 된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출전할 기회를 잡지 못한 선수에게는 4년이 너무 길다. 4년 주기 올림픽과 월드컵의 잔인함이다.
발리 슛으로 부활한 이동국, 안정환과 경쟁구도
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와의 경기. 3-0으로 뒤지던 한국의 차범근 감독은 19살의 신예 이동국을 투입한다. 승부를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그는 과감한 플레이로 한국 축구의 희망을 보여줬다. 한국 축구 역대 최연소 월드컵 출장 기록도 세웠다.
거칠 것 없던 이동국은 2002년 큰 좌절을 맛봤다. 히딩크 감독은 이동국을 중용하지 않았다. '공격수가 1차 수비라인'이 돼야 한다는 히딩크의 축구 철학과 이동국이 맞지 않아서다. 최전방에서 어슬렁대다 월드컵 출전기회를 놓친 이동국은 한국의 월드컵 경기를 TV로도 보지 않았다. 온 국민이 4강 신화에 취해 있을 때 그는 슬픔과 술에 취해 있었다.
애타게 기다린 2006년 월드컵. 그는 월드컵 예선에서 폭발적인 득점행진을 이어갔다. 본프레레 감독시절 그는 대표팀 내 최다인 11골을 넣었다. 독일과의 친선경기에서 넣은 환상적인 발리 슛은 2004년 한국 축구 대표팀 최고의 골로 평가 받았다. 하지만 월드컵은 이번에도 그의 편이 아니었다. 월드컵을 2개월 앞둔 상황에서 그는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으로 또 꿈을 접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지난 시즌 이동국은 득점왕에 오르며 전북 현대를 창단 15년 만에 처음으로 K리그 정상에 올려 놓았다. 하지만 대표팀에서 활약은 신통치 않았다. 올해 초 스페인, 남아공 전지훈련과 동아시아 대회에서 이동국은 '허심(許心)'을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이동국은 지난 3일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 희망의 발리 슛을 쏘아 올렸다. 기성용의 프리킥이 상대 선수 머리에 맞고 떨어질 때, 이동국은 동물적으로 가볍게 발을 갖다 댔다.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발리 슛을 성공시킨 그의 '킬러 본능'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절대 운으로 만든 골이 아니었다. 준비된 선수만이 성공시킬 수 있는 골이었다.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명을 선택해야 하는 허정무 감독은 고민에 빠져 있다. 그 고민 중 하나가 바로 이동국의 선발 여부다. 특별한 돌발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최전방 공격수 박주영과 이근호는 무조건 월드컵에 나간다는 분석이 지배적.
하지만 이동국에게는 아직 물음표가 붙어 있다. 2002년부터 월드컵에 나갔다 하면 골을 넣었던 안정환이 있어서다. 두 선수 모두 부름을 받을 가능성은 적다. 중요한 순간 교체 카드로는 안정환이 더 효과적이다. 반대로 선발용으로는 이동국이 앞서 있다.
▲ 지난 3일 영국에서 열린 코트디부아르와의 친선경기에서 골을 터트린 이동국이 동료선수와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
차두리는 더 이상 육상선수가 아니다
차두리의 아버지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은 "2002년 월드컵 때 두리가 대표팀에 들어갈 것으로 봤다. 기술적으로는 아직 모자란 점이 있다 해도 체격과 체력이 갖춰져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차두리의 무한 질주는 늘 소나기처럼 시원했다.
그런데 어느 틈엔가 세밀한 기술적 문제가 그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뛰기만 잘 뛰지 크로스가 정교하지 않다는 비난이었다. 그를 가리켜 '축구선수'가 아닌 '육상선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2005년 차두리가 우즈베키스탄과의 월드컵 예선전을 앞두고 입국했을 때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나를 알아보고 등을 두드려 주는 팬들이 생겼고, 공짜 커피도 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늘도 있었다. "내가 축구를 하는 동안 아버지만큼 잘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아버지의 존재가 내겐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의 솔직한 한 마디는 유럽을 호령한 대형스타였던 아버지 차범근의 존재가 부담스럽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차두리는 지난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소속팀에서 수비수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하지만 이 부분은 대표팀에 마이너스 요소였다. 수비수로 쓰자니 아직 경험이 일천하고, 원 포지션인 윙포워드 자리에는 좋은 경쟁자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차두리는 선택 받지 못했다. 아드보카트 감독은 월드컵 대표팀 엔트리 발표 뒤 탈락한 선수들을 향해 "그게 축구고 인생"이라는 짧은 말을 남겼다. 차두리는 그라운드 대신 카메라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깜짝 해설가 데뷔를 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코트디부아르 경기에서 오른쪽 측면 수비수로 뛴 차두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우선 세계 최고 수준의 중앙 공격수 드로그바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공격에도 적극 가담하며 숨통을 트이는 역할도 해줬다. 분데스리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강약 조절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한국은 수비가 문제였다. 예선 경기 모두 선제골을 내주면서 어려운 경기를 했다. 프랑스 전까지는 그래도 운이 따라 줬지만 마지막 스위스 경기에서 드라마를 연출하지는 못했다.
2002년 월드컵 성공의 비결은 매우 많다. 하지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이영표, 송종국, 이을용이 맡았던 측면 미드필더들의 활동량이다. 이들은 수비 시에 3명의 수비수와 힘을 합쳐 '파이브 백'을 형성하며 상대 공격을 궤멸시켰다. 이런 유기적 수비가 2006년에는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2010년에도 '팀 전원이 같이 하는 수비'가 한국 축구의 성적을 좌우할지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차두리의 역할은 중요하다. 수비와 공격 시에 한국이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역동적 축구를 하려면 차두리 같은 측면 수비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의 성적을 수비가 죄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두리의 역할은 중요하다. ⓒ연합뉴스 |
'잃어버린 월드컵'의 상처와 회한
'잃어버린 월드컵'의 상처는 크다. 본프레레는 독일 월드컵 본선 진출을 했지만 지도력 부재로 한국 대표팀 감독자리를 떠나며 "한국 감독직은 독이 든 성배"라고 꼬집었다.
월드컵이 열린 독일에서 그를 봤을 때 그의 얼굴엔 분명 아쉬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아마도 그가 최근 "(새 감독을 물색하던) 나이지리아의 대표팀 감독에 내가 적임자"라고 말한 것도 4년 전의 상처를 씻기 위한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 요한 크루이프는 소중한 월드컵 출전 기회를 버렸다. 그는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불참을 선언했다. 군사 독재 정권의 선전용 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게 불참 이유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지난 2008년 그 보다 더 직접적이고 중대한 불참 사유를 밝혔다. 이유는 가족의 안전. 77년 그는 부인과 함께 유괴될 뻔 했다. 그 뒤 바르셀로나에 위치한 그의 집은 4달 동안 경찰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그는 이 상황에서 네덜란드를 위해 더 이상 뛰기가 힘들다는 판단을 했고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가 참가하지 못한 78년 월드컵 결승에서 네덜란드는 아르헨티나에 아쉽게 졌다. 그는 이때부터 조금씩 축구에 대해 다시 생각했고, 79년 재정 상황까지 안 좋아지자 다시 현역으로 복귀했다.
'제2의 황선홍'을 보는 기쁨
월드컵을 앞두고 좌절을 경험한 선수들에게 영원한 스승은 황선홍이다. 그는 1998년 월드컵 직전 중국과의 경기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그런데도 황선홍은 프랑스에 갔다. 마지막 벨기에와의 경기에 진통제를 맞고 출전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지만 결국 그는 부상 때문에 월드컵을 잃어버렸다.
그는 "94년 월드컵 때 자주 득점 기회를 놓쳐 팬들로부터 받은 비난보다 아예 뛰지 못했던 98년 월드컵이 더 힘들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2002년 월드컵 폴란드 전에서 그림 같은 첫 골로 부활했고 명예롭게 대표팀을 떠났다.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는 이르면 4월 말 이뤄질 전망이다. 이동국은 안정환 뿐 아니라 염기훈, 설기현, 이승렬 등과 선의의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월드컵에 나갈 수 있다. 차두리도 이런 경쟁구도를 피할 수 없다. 최종 명단에 든다 해도 주전으로 뛰려면 경쟁자 오범석에 확실한 우위를 보여야 한다.
'잃어버린 월드컵'은 이동국, 차두리를 얼마나 키웠을까? '제2의 황선홍'을 볼 수 있을까?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할 한국 대표팀을 보는 또 하나의 감상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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