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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리 갯벌, 경운기 타고 백합 조개잡이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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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0리 갯벌, 경운기 타고 백합 조개잡이 가볼까

2019년 10월 섬학교는 강화도 앞 ‘NLL의 섬’ 볼음도

+강의 마감됐습니다^^


*10월 섬학교가 가기로 한 우이도는 돌아오는 배편에 문제가 생겨 부득이 연기하기로 했습니다. 10월엔 강화도 서쪽 ‘NLL의 섬’ 볼음도로 향합니다. 회원님들께 송구하며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강화도 서북쪽, 북방한계선(NLL) 안의 섬, 볼음도에는 8백여 년 전 고려시대 태풍 때 북한 땅에서 떠내려 온 은행나무가 살아 있습니다. 이 나무는 수나무인데 건너편 북녘 땅 연안군 호남리에는 볼음도 은행나무의 아내인 암나무가 살아 있습니다. 볼음도 은행나무는 남한의 천연기념물 304호이고 호남리 은행나무는 북한의 천연기념물 165호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볼음도 주민들은 풍어제를 지낼 때면 호남리 주민들과 연락을 해서 한 날 한 시에 두 은행나무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합니다. 그날만이라도 부부 은행나무가 만나기를 염원하는 뜻에서 이어져 왔던 행사가 한국전쟁 이후 끊기고 말았습니다.

▲새들처럼 사람들도 자유롭게 뱃길을 따라 남북을 오갈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섬학교

이 사연을 알고 있었던 강제윤 섬학교 교장선생님이 소장으로 일하는 (사)섬연구소에서 문화재청에 행사 복원을 제안했고 작년 칠월칠석날 볼음도 은행나무에 생일상을 차려주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86강은 10월 5(토)-6(일)일, 1박2일 일정으로 이 은행나무를 만나러 갑니다. 또 볼음도는 십리를 걸어 나가야 할 정도로 광활한 갯벌이 있는데 이 갯벌에는 백합조개가 아주 많습니다. 갯벌에 경운기를 타고 나가 백합잡이 체험도 합니다. 잡아온 백합은 볼음도에서 바로 요리해 먹을 예정입니다. 볼음도에는 강화나들길 13코스도 있는데 이번 기행에서는 이 길도 걷습니다. 해변을 따라 이어지는 13km의 나들길은 더없이 평탄하고 평화롭습니다. 무르익은 가을 ‘NLL의 섬’ 기행에 함께 하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경운기 타고 개벌 끝으로 나가 백합을 캐고 돌아오는 여행자들Ⓒ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0월의 답사지인 ‘NLL의 섬, 볼음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8백 살 은행나무 할아버지의 사연
2018년 봄, 역사적인 4.27남북정상회담이 열리던 날 불현듯 볼음도 생각이 났다. 볼음도 은행나무 생각이 났다. NLL의 섬, 볼음도 은행나무골에 사시는 8백 살 은행나무 할아버지는 여전히 정정하실까. 오늘도 푸른 잎 피워 올리고 계실까. 뵙고 온 지가 여러 해 흘렀다. 볼음도의 수호신 은행나무 할아버지도 남북정상회담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계시지 않을까. 직접 찾아뵙고 여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으나 우물쭈물하다 뒤늦게 행장을 꾸려 강화도로 향했다. 볼음도 은행나무 할아버지의 고향은 북녘 땅이다. 8백 년 전 어느 날, 피난민처럼 아내 나무를 북녘에 두고 홀로 볼음도로 이주해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볼음도행 여객선은 하루 단 두 차례. 9시 10분 첫배를 타기 위한 여행객들로 여객선터미널은 붐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외포리 부둣가 상가와 식당들은 한적하다. 주말이고 한참 행락철인데 어찌된 일일까? 도로에 차들은 많은데 수산시장마저도 썰렁하다. 산나물 같은 것들을 팔러 나온 할머니가 궁금증을 풀어주신다.
“다리 놔지고 나서 차는 몇 배 더 댕기는데 여기 오는 사람은 확 줄었어요. 자동차 구경만 실컷 합니다. 정신 사나워.”

▲백합 조개잡이 중인 볼음도 주민, 고단함 속에도 낭만이 있다.Ⓒ섬학교

다리가 문제다
문제는 다리다. 강화도와 석모도를 연결한 다리가 개통되면서부터 여행객들은 자동차로 외포리를 훌쩍 지나가 버린다. 석모도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북적거리던 포구는 다리 개통과 함께 한적해졌다. 가을에는 그나마 젓갈을 구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활기가 돌지만 다른 철에는 활력을 잃었다. 그렇다면 석모도는 사정이 더 좋아졌을까?

석모도는 2017년 6월 다리 개통 후 관광객들은 늘었지만 극심한 교통정체와 주차난에 시달리고 쓰레기 급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게다가 관광객 증가에 따른 이득은 부동산 업자들이나 일부 상인들에게만 돌아갈 뿐 옛 선착장 주변은 관광객 발길이 끊겨 상권이 침체됐다. 관광업에 종사하지 않는 주민들 대다수도 이익은 고사하고 교통난에 고통 받고 있다.

강화도와 불과 10분 거리로 가깝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수시로 배가 다니던 석모도는 교통 불편이랄 게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다리 공사를 한 것은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그리고 여전히 섬들을 잇는 수많은 다리 공사들은 그대로 진행돼도 좋은 걸까? 섬의 가치는 지키면서 교통 불편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들이 있는데도 오로지 다리 공사만 고집해서 섬들을 없애려는 정책이 과연 국토 균형발전에 도움이 되는 걸까? 의문은 끊이지 않는데 한 시간 남짓 운항 끝에 여객선이 볼음도에 기항한다.

▲8백 년을 한결같이 북녘의 암나무를 그리워하며 살아온 볼음도 할아버지 은행나무Ⓒ섬학교

저어새가 들려주는 볼음도 이야기
볼음도 선착장 대합실 옆에는 확 들어오는 입간판이 하나 서있다. 저어새가 들려주는 볼음도 이야기. 볼음도의 역사와 전설, 생태 이야기를 그림과 글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쉽고 위트 있어 간판 앞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신선봉 선녀탕의 물이 마르게 된 이야기 앞에서는 빙그레 미소가 지어진다. 신선이 살았다는 신선봉 정상에는 선녀탕이란 연못이 있었는데 늘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을 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해부턴가 선녀탕의 물이 말라버렸다. 볼음도 마을의 아낙이 선녀탕에서 빨래를 해 더러워진 탓이다. 그 아낙은 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빨래를 했던 것일까? 그림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가정을 위해 너희(선녀)들은 사라져 줘야겠다.”

그런데 길을 걷다보니 십여 년 전 볼음도에 처음 왔을 때와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고 선착장에는 어민들이 운영하는 해산물 포장마차들도 생겼다. 어민들이 관광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된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도 생겼다. 선착장 부근 조개골 해수욕장에서 큰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이 휑해졌다. 마을까지 편도 1차선 도로였던 2백 미터 정도 되는 구간에 왕복 2차선 도로가 뚫린 것이다. 당시에는 조개골 해수욕장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길에 숲 터널이 있었다. 물론 자동차도 다닐 수 있는 포장 도로였지만 그 호젓한 오솔길은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신비감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 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2백 미터 구간 2차선 도로가 생겨서 대체 얼마나 편리해진 것일까. 문득 길을 잃은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2018년 칠석날 열렸던 볼음도 은행나무 밥상 차려주기 행사Ⓒ섬연구소

‘조기의 신’ 임경업 장군
볼음도는 NLL 부근에 있는 섬인지라 선착장 입구에 군인들이 나와 인적사항을 기록하고 방문 목적을 물은 뒤 방문증을 나눠준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지만 여전히 분단은 현재 진행형이다. 볼음도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선착장에서 가까운 큰 마을이 당아촌이다. 마을 앞에 마을의 신전인 당산이 있다. 그 당산 아래 있다 해서 당아촌이다. 또 한 마을은 8백 살 은행나무 어르신이 굽어 살피고 있는 작은 마을, 내촌이다. 은행나무가 있어서 은행나무골, 은행촌이라고도 부른다. 볼음도는 면적 6.57㎢, 해안선 길이 16km의 작은 섬이다. 한때는 초등학생 수만 280명이나 됐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전체 주민이 284명이다. 그 또한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두 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분교도 폐교가 되어 잡초만 무성하다.

섬은 조선시대에는 교동군에 속했다가 1914년 경기도 강화군에, 1995년 인천광역시에 편입됐다. 섬을 둘러싸고 평양금이산, 요옥산, 앞남산, 신선봉 등이 있고 그 안에 마을과 농토가 있다. 이 섬 역시 서해바다 ‘조기의 신’인 임경업 장군의 전설이 전해진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힌 왕자를 구하러 가던 임경업 장군이 풍랑을 피해 볼음도에 들어왔는데 마침 보름달이 떠 있어서 볼음도라 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전설은 아마도 이 근처 바다가 연평바다처럼 조기어장이었던 데서 비롯된 것이지 싶다. 볼음도 옆의 아주 작은 섬 아차도에서도 조기파시가 열렸다. 지금은 40여 명이 살고 면적 0.67km2에 불과한 아차도가 조기파시 때면 1천 명이 넘게 살았고 처마 밑으로만 다녀도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볼음도에도 어업이 번성했고 조기의 신인 임경업 장군을 받들었다. 볼음도에도 기생집이 있을 정도로 흥청거렸었다.

지금은 NLL 부근이라 어로행위가 자유롭지 못해 어로를 하는 가구는 적다. 큰 배 1척, 작은 배 2척뿐이다. 그래서 주민들 다수는 배 없이 조수간만의 차가 큰 갯벌에 건강망(개막이 그물)을 설치해 밴댕이 같은 물고기를 잡는다. 또 갯벌에서는 상합(백합), 가무락(모시조개), 소라 등을 키워 소득을 올린다. 이 갯벌이 천연기념물 419호인 저어새 번식지이기도 하다. 저어새 보호 때문에 주민과 정부 간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한다.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볼음도 은행나무 아래 저수지Ⓒ섬학교

섬이지만 볼음도의 주업은 농사다. 갯벌을 간척해 논을 만든 까닭에 한 가구당 평균 경작 면적이 만 평이 넘는다. 섬은 오랜 옛날부터 나지막한 모래밭에 나무를 심어 방풍림을 조성했다. 그래서 섬의 안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이 방풍림과 산들이 바닷바람을 막아주어 섬은 분지처럼 아늑하고 벼는 해풍의 피해를 입지 않고 튼튼하게 자란다. 섬에는 강화도의 트레일인 나들길 13구간이 13km 남짓 조성되어 있어 걷기에도 좋다.

큰 마을을 지나고 폐교를 지나 내촌에 이르면 바닷가 저수지 옆에 은행나무 어르신이 우뚝 서 계신다. 볼음도 은행나무는 수령 8백 년, 줄기둘레 8m, 밑동둘레 9.7m, 키 25m. 천연기념물 제304호다. 이 나무는 원래 북녘 땅에 살던 것이다. 고려시대, 지금의 연안군 호남리 호남중학교 운동장 자리에 암수 두 그루 은행나무가 살았는데 어느 여름 홍수에 수나무가 뿌리 뽑혀 볼음도 바다로 떠내려 온 것을 주민들이 건져내 다시 심었다고 전해진다. 볼음도에서 연안까지는 불과 8km. 볼음도 주민들은 호남리 주민들에게 연락해 그 나무가 호남리에서 떠내려 온 수나무인 것을 확인했다.

▲볼음도 내촌마을에서 건너다보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북녘 마을Ⓒ섬학교

<아바타>의 한 장면처럼
그래서 매년 정월 초 풍어제를 지낼 때면 볼음도와 호남리 어부들은 서로 날짜를 맞추어 생일을 지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헤어진 두 은행나무 부부의 슬픔을 달래주었던 것이다. 은행나무는 한여름 무더위에 시달리던 섬 주민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찜통 같은 더위에도 은행나무 그늘 아래만 들어가면 냉기가 돌 정도로 서늘했다. 열대야 같은 밤이면 주민들이 은행나무 그늘에 모여 잠을 청했다. 바닥에 거적을 깔고 삼사십 명의 어른들이 시원하게 잠 잘 때 아이들 열댓 명은 은행나무로 올라가 저마다 가지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나무와 한 몸이 된 아이들. 당시 풍경을 떠올려보니 동화 속 세상 같다. 영화 <아바타>의 한 장면처럼, 또 이중섭의 그림 속 아이들처럼 신비로운 모습들, 생각만으로도 세상이 다 환해진다.

하지만 수백 년을 이어오던 남북의 은행나무를 만나게 해주던 행사는 한국전쟁 이후 두 지역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중단됐다. 그 후 볼음도의 수나무는 시름시름 앓더니 점차 말라가기 시작했다. 섬 주민들은 연안에 사는 암나무의 안부를 알 길이 없어지자 수나무가 죽어가는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은행나무 근처에 저수지가 만들어져 해수가 차단되자 볼음도 은행나무는 다시 살아나 푸르름을 되찾게 되었다. 들리는 풍문에는 북한의 암나무도 합동 풍어제가 중단된 후 시름시름 앓았었는데 근래 호남중학교 교직원들의 보살핌을 받아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한다. 호남리 은행나무도 북한의 천연기념물 165호로 보호받고 있다.

남북정상이 합의한 '판문점 선언'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완화와 일체의 적대행위를 멈추기로 했다. 구체적 실행 조치의 하나가 서해 북방한계선(NLL) 평화수역화다. 서해 NLL은 휴전 상태에서 남북간 교전이 수시로 빚어졌던 한반도의 화약고였다. 그런 NLL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 군사 충돌을 방지하고 안전한 어로활동도 보장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사)섬연구소(소장 강제윤)에서는 NLL에 깃든 긴장을 풀고 남북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문화재청에 볼음도 은행나무 생일상 의례 복원을 제안했다. 그리고 마침내 칠월칠석 날인 2018년 8월17일, 문화재청과 섬연구소가 공동으로 볼음도 은행나무 아래서 생일상 차리기 행사를 열었다. 이제 볼음도 은행나무는 평화의 나무, 평화의 수호신으로 세상에 우뚝 서게 됐다.

10월 섬학교 제86강 ‘NLL의 섬, 볼음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0월 5일(토)>
06:30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출발(0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07:00 서울지하철 2호선 합정역 출발(06시 50분까지 서울 마포구 지하철 2호선 합정역 8번출구에서 직진, 홀트아동복지회 앞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6강 여는 모임.
-강화도 외포항 출항
-볼음도 도착
-볼음도 걷기(7km)
선착장-조개골해변-영뜰해변-오리나무골-볼음출장소
-점심식사(볼음도 섬밥상)
-백합캐기 체험
-휴식
-저녁식사 겸 뒤풀이(숭어회 또는 농어회요리)
20:00-자유시간, 취침(<볼음도게스트하우스> 다인실)

<10월 6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볼음도 섬밥상)
-볼음도 걷기(6km)
볼음출장소-봉화산-볼음 저수지-은행나무-오리나무골-처녀골-영뜰해변-출장소(6km)
-점심식사(볼음도 섬밥상)
-볼음도 출항
-외포항 도착
-외포리 젓갈시장 장보기
16:10 서울 향발. 제86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 답사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버프(얼굴가리개),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10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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