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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꿈꾸던 도시에서 실존하기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파주 사회복지책마을

"아침이면 머리맡에 놓인 별사탕에 라면땅에 / 새벽마다 퇴근하신 아버지 주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를 기억하네 /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자이언티의 노래 '양화대교' )

양화대교 북단의 합정동은 우리 근현대사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합정동 사거리를 중심으로 한강 변에는 가톨릭 절두산 순교성지가 있다. 절두산으로 가는 길에 기독교 100주년 기념교회가 있고, 그 옆에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이 있다. 최근 흔적으로는 합정동에서 양화대교로 진입하는 위치에 (당시에는 '제2한강교'로 명명) 6.25한국전쟁 유엔군참전기념탑이 1981년까지 있었다. 20세기 말 역사의 이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자유로 북쪽으로 30분을 가면 21세기 역사를 만드는 파주출판도시에 도착한다.

우리는 가끔 특별한 공간을 찾는다. 깊은 산 속의 절이나 오래된 느티나무 옆 성당 같은 '종교 공간'을 찾아간다. 청년들이 많이 가는 스페인 산티아고길이나 올레길 등 '길 공간’으로 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산동네나 구도심의 꼬불꼬불 골목길을 찾아 사람 냄새나 그림자를 만나러 가기도 한다.

매일 출퇴근하는 도시의 공간과는 다른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인간의 존재는 무의미에 가깝다. 그곳엔 높은 빌딩과 자동차로 상징되는 자본과 물질과 경쟁이 지배하여 도시 속의 인간은 그것에 위축되고 종속되어 왜소해지거나 생존 본능으로 전투적이기 쉽다.

버스에서 내린 파주출판도시가 신기한 것은 '파주'라는 접두사에 걸맞지 않게 서울에서 의외로 가깝다는 점이고, '도시'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건물들이 모두 낮고 거리의 차량이 한산한 모습이다. 몇 걸음 걷다 보면 서울에서는 보지 못했던 건물들 모습에 호기심이 생긴다. 건물들이 낮으니 어디서나 하늘이 보이는 가슴 트임과, 건물마다 자기 공간을 채우기보다는 비워놓은 여백의 넉넉함이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다 보면 이곳의 건물들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고 건축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별다른 소음이 없으니 발을 옮길 때마다 들리는 건 내 발소리뿐이다.

10년 전 이 도시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그저 놀라기만 했을 뿐이다. 높지 않은 건물, 곳곳에 빈 공간, 어디에 있던 반경 100m 이내에 공원과 샛강과 갈대밭이 나오고, 5분마다 독특한 북카페를 만나고, 다듬어지지 않은 길과 문득문득 만나는 적막. 사람들은 이곳에서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물질도시의 노예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자연과 건축과 인간과 책이 공존하는 이상 도시에서…. 한국 사람이 이 도시를 만들었다? 믿어지지 않기에, 칠흑같이 깊은 밤에 외계인들이 먼 우주에서 이 도시를 갖고 와 소리 없이 파주 문발리(文發里) 벌판에 내려놓고 가지 않았을까? 이래야 내 눈앞에 있는 이 도시의 존재가 납득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도시의 적막감은 무엇일까. 독일 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살아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고 했다. 많은 도시가 아우성을 낼 때 이 도시는 살아있는 침묵을 선택했다.

나는 공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족에게는 아파트나 주택의 주거 공간, 청소년에게는 학교 공간, 성인들에겐 일상의 노동 공간이 그럴 것이다. 좀 더 넓혀보면 도시 공간이 도시민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럴 것이다.

파주출판도시를 꿈꿔온 사람들은 이 도시가 인간성 회복으로 공동선을 실천하길 약속했다. 그것을 이들은 선한 약속, 위대한 약속이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도시에 와보길 바라는 것은 이러한 정신의 실천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이 도시의 곳곳을 천천히 거니는 것만으로도 쉼과 회복이 되고, 도시의 역사를 읽으면서 각자의 상상이 촉진되고, 멈춰진 현실이 도전받을 것이다.

▲ '지혜의숲'에 있는 파주출판도시 미니어처 앞에서 사회복지책마을 방문자들에게 도시의 이야기를 전하는 필자. ⓒ이명묵

파주출판도시에는 '지혜의숲'을 품은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가 있다. 건축가 김병윤은 지어진 공간에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들어온 사람들이 저마다의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했다. 지혜의숲과 센터는 출판도시의 '비움, 침묵, 마당’을 잘 구현하고 있다. 이렇게 특별한 도시에 사회복지사나 시민단체 활동가와 청소년들이 함께 공부하고 교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사회복지책마을'을 마련했다.

사회복지책마을은 이들을 위한 공부방이고 사랑방이다. 바라기는 책마을 이용 못지않게 출판도시의 역사를 체험하고 각자 나름의 꿈을 상상하시라. 출판도시를 지휘한 이기웅 선생님은 이 도시를 '떠오르는 대지'라 칭하면서 생태를 아끼고 공공의 큰 뜻을 우선하는 건축과 책의 문화가 인간의 삶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꿈의 도시를 지향한다고 했다. 사회적 활동가들이 이 도시에서, 사회복지책마을에서 한국 사회와 인류 사회의 떠오르는 대지 큰 그림을 함께 그리는 상상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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