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도 일본의 경제 보복 철회 시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재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지소미아의 공식적인 종료일이 11월 22일인 만큼 그 전에 상호 만족할 수 있는 해법을 추진해보자는 취지로 읽힌다.
이에 따라 관심은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와 한국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 번복이 이뤄질지에 모아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이를 희망하는 것으로 보이고, 상당수 언론과 전문가들도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게 가능한 최선으로 보일 수 있다. 한일 관계의 지속적인 악화와 이에 따른 한국 경제의 어려움 가중, 그리고 미국의 입장을 두루 고려할 때는 그렇다. 하지만 미국이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지소미아는 한일관계의 정상화 수준을 넘어선 것이다. 한미일 삼각동맹을 구축해 북한, 중국, 러시아를 상대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일 삼각동맹은 애초부터 없었다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본래 한미일 삼각동맹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냉전 시대 때부터 한미·미일 양자동맹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미국은 1960년대 들어 삼자 협력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소련의 팽창과 더불어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베트남 전쟁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말이다. 1965년 한일협정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그런데 "국제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일이 벌어졌다. 베트남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상대로 동시에 데탕트에 나섰다. 이를 간파한 일본은 미국보다 앞선 1972년에 중국과 수교를 맺었고 1979년에는 소련과 관계를 정상화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중소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고 북한은 등거리 외교를 통해 실리를 극대화하려고 했다. 흔히 말하는 한미일 남방 삼각동맹과 북중소 북방 삼각동맹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한미일 삼각동맹에 대한 미국의 미련이 되살아난 시점은 1990년대 말이었다. 미국이 미사일 방어체제(MD)를 군사패권전략의 핵심으로 삼으면서 효과적인 MD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한국과 일본의 선택은 엇갈렸다. 일본은 MD에 참여키로 한 반면에 김대중 정부는 불참을 선언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는 한일관계 개선을 추구하면서 일본의 군사대국화 움직임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했다. 무엇보다도 김대중 정부는 한미일 군사협력의 대안으로 외교협력을 강조했다. 포용정책에 기반을 둔 한미일의 대북정책을 고안했고, 중국 및 러시아도 참여하는 동북아 평화체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노무현 정부의 대외정책도 이와 흡사했다.
그런데 2009년 들어 미국의 한미일 삼각동맹 구상은 더욱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새롭게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보다는 한미일 군사협력에 방점을 찍었다. 여기에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및 이라크 전쟁에 허덕이고 2008년 금융위기에 휩싸이던 와중에 중국이 급부상을 한 것이 주효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각동맹이 필요하다고 여긴 것이다.
"좋은 기회"를 잡은 미일동맹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동참이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2008년에 집권한 이명박 정부는 엉뚱한 꿈에 휩싸여 있었다. 그해 8월에 김정일 위원장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곤 '통일을 이룰 날이 멀지 않았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는 미국에게 김정일 유고시 벌어질 북한 급변사태 및 통일에 대비하자고 요구했다. 미국은 이를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할 기회로 간주했다. 한국 주도의 통일을 이루려면 일본의 지지와 협력이 대단히 중요하다며 한일간의 군사 협력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에 북한은 한미일 삼각동맹파들에게 좋은 구실을 선사했다. 2009년 4월에 장거리 로켓을 발사한 데 이어 5월에는 핵실험마저 강행한 것이다. 이에 대한 미국 강경파들의 본심은 어땠을까? 공개적으로는 맹렬히 비난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반겼다.
이걸 너무나도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2009년 7월 16~17일 도쿄에서 열린 차관보급 한-미-일 3자 국방회담에서 에드워드 라이스 주일미군 사령관은 북한의 로켓 발사 및 핵실험을 두고 "3자 협력을 제고할 수 있는 좋은 기회(good chance)"라고 말했다. 한미일간에 밀실에서 지소미아 논의가 시작된 시점도 이때부터였다.
그리고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은 장관직을 마치고 가진 2013년 5월 골드만삭스 임원들을 상대로 한 비공개 강연에서 "북한이 주기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만 이는 굳이 나쁘게 볼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미국의 입장에서는 반길 만합니다"라고 말했다.
'보이지 않는 전쟁'에서 '보이는 전쟁'으로
나는 졸저 <비핵화의 최후>에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세력과 현상을 변경하려는 세력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전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앞서 소개한 주일미군 사령관과 힐러리 클린턴의 발언은 이를 너무나도 잘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북핵 문제는 외교적 노력을 통해 풀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군사전략적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꽃놀이패'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류는 여전히, 아니 어쩌면 과거보다 더 심해졌을 수도 있다.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쪽에는 한국의 극우 보수 진영 및 미국의 주류와 일본의 우익이 포진하고 있다. 그런데 '하노이 노딜'을 계기로 보이지 않던 전쟁은 그 윤곽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하노이 노딜을 환영한 세력들이 다름 아닌 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계기로 보이지 않는 전쟁은 보이는 전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결정을 비난하면서 재연장을 촉구하는 세력과 하노이 노딜을 환영한 세력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더 주목해야 할 점도 있다. 미국은 2016년에 사드 배치를 밀어붙이고 한일 지소미아 체결을 압박하면서 이러한 조치는 중국과 무관하고 오로지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 고위 당국자들은 중국을 직접 거명하고 있고 지소미아의 핵심 목적은 한미일 MD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동안 감춰왔던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안타까운 점도 있다. 하노이 노딜과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계기로 한반도 현상 유지 및 이를 통한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하려는 세력의 결속은 강해졌다. 반면 작년 한행동안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주도해왔던 세력들의 결속은 눈에 띠게 약해졌다. 남북관계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악이고 북미협상 재개도 짙은 안개 속에 머물러 있다.
하여 문재인 정부는 지소미아 종료 결정을 유지해야 한다. 일본의 성의 있는 조치도 없지만, 무엇보다도 종료 결정 번복은 한반도 현상 유지 및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구하려는 세력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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