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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똘레랑스'의 '한계'를 말할 단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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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똘레랑스'의 '한계'를 말할 단계가 아니다"

[화제의 책]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

10년 만이다. 누군가는 '잃어버린 10년'이라 부르는 그 시기, 잊혔던 언어가 되돌아왔다. '똘레랑스'도 그 중 하나다.

잊혀진 언어의 부활은 역설적으로 그 언어에 대한 현실의 결핍을 방증한다. 2000년, 홍세화가 국내에 처음 소개한 필리프 사시에의 <왜 똘레랑스인가>가 10년이 지난 지금 재출간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필리프 사시에 지음, 홍세화 번역, 이상북스 펴냄)는 국내에서 '똘레랑스의 대명사'로 통하는 홍세화가 10년 만에 다시 번역해 내놓은 책이다. 원서의 내용에 대한 보충 설명이 더 담겼고, 똘레랑스에 대한 홍세화의 고민이 담긴 인터뷰도 함께 실렸다.

"똘레랑스는 차이를 용인하는 자세"

▲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필리프 사시에 지음, 홍세화 번역, 이상북스 펴냄). ⓒ프레시안
책은 지난 5세기 동안 유럽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온 똘레랑스에 대한 분석을 담았다. 사시에는 '참다, 견디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tolerare'에서 출발해 "참된 똘레랑스는 나의 자유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남의 자유를 인정하는 하나의 윤리이며, 각 개인이 보다 우월한 원칙을 위해 자신의 이해 관계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게 하는 덕목"이라고 정의한다.

역자 홍세화는 여기에 '차이에 대한 용인'이라는, 한국 사회에 더 요구되는 개념을 강조한다. 그가 생각하는 똘레랑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에 가깝다.

"가장 간단하게 줄인다면 '관용'보다는 '용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 관용이라는 말에는 아랫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해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똘레랑스는 그런 게 아니라 '차이'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용보다는 용인이라고 얘기하고 싶고, 더 나아가서는 '화이부동'에 아주 가깝거나 거의 같다고 생각합니다. 논어에 '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君子 和而不同, 小人 同而不和)라고 쓰여 있습니다. 군자는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서로 평화롭다는, 그러니까 다른 것을 그대로 놔둔 채 평화롭게 공존한다면, 소인은 같으면서 불화한다는, 그러니까 별 차이 없으면서 불화한다는 거죠."


엥똘레랑스에 대한 '저항의 무기'로써 똘레랑스

'타인의 자유에 대한 인정'. 그렇기 때문에 똘레랑스는 때로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홍세화가 강조하는 '차이에 대한 용인'을 두고, '누가, 어디까지 용인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차이'를 그대로 '용인'하며 똘레랑스의 범위를 무제한으로 확장하기엔, 이미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자본과 권력의 불균형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대해 홍세화는 "똘레랑스가 이야기하는 '자유'라는 측면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나칠 정도로 경제적인 부분에 귀속돼 있다"고 지적한다. 물질 중심의 삶,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빼앗는 '제로섬 게임'의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맘껏 자유하지만,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말라'는 똘레랑스의 정신 역시 협소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동시에 그는 "'차이를 용인하라'는 주장은 차이를 용인하지 않아온, 그래서 억압하고 배제하고 차별하는 인간의 정신 자세와 행동에 대해 단호한 반대를 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엥똘레랑스(불용인)'에 대한 '저항의 무기'로써 똘레랑스인 셈이다.

홍세화는 "똘레랑스는 소수자, 약자를 위한 사상적 무기이자 민주주의 성숙의 무기"라며 "우리는 아직 똘레랑스의 한계에 대해 말할 단계가 아니다"고 말한다. 그가 '차이에 대한 용인'을 강조하면서도, 철저히 '지금, 여기'의 현실 위에 서 있는 이유다.

"'차이를 용인하라'는 주장은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그래서 억압하고 배제하고 차별하는 인간의 정신 자세와 행동에 대해 단호한 반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똘레랑스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문제, 국가보안법의 문제, 지역 문제, 종교의 엥똘레랑스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할 것을 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제가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은 <조선일보>라는 신문이 저와 생각이 달라서가 아니고, 조선일보라는 집단이 차이를 이유로 차별하고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을 합리화함으로써 기득권을 계속 강화시키고 유지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왜 다시 똘레랑스를 말하는가

그렇다면 왜 다시 똘레랑스인가. 역자 홍세화는 재출간의 의미를 "오히려 현 정권이나 뉴라이트들이 주장한 '잃어버린 10년'이 거꾸로 증언해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존의 가치가 조금이나마 열리는 것 같다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주장하는 세력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차이에 대한 불관용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엥똘레랑스의 두 가지 관점이 그들의 가장 강력한 권력 기반이라고 봐요. 하나는 "너 빨갱이지?"이고, 또 하나는 "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물음입니다. 다시 말해, "너 빨갱이지?"라는 물음으로 표상되는 국가보안법과 "너 전라도 사람이지?"에 담겨 있는 공격적 지역주의가 그것입니다.

그는 낫과 곡괭이를 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소을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했던 극우단체를 예로 들면서 "정상적인 나라에도 그런 극단적인 사람들이 간혹 있을 수 있지만, 한국 사회의 비극은 집권 우파 세력이 이런 극단주의 세력의 엥똘레랑스 행위를 제어하지 않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홍세화는 '엥똘레랑스에 대한 반대'로서의 똘레랑스에는 '일상에서의 적극성'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똘레랑스는 민주주의 성숙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됩니다. (…) 역사적으로 볼 때에도 똘레랑스 사상이 먼저 제기됐다기 보다는 그 반대였다고 봐야 합니다. 지배 세력이 성찰 이성이 성숙되지 못한 사회 구성원들의 비교 우위를 통해 자기만족하려는 저급한 속성을 이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낳는 엥똘레랑스 행위를 반대하기 위해서 똘레랑스 사상이 강조됐다는 것입니다.

(…) 용산 참사 같은 상황을 보면서도, 일부 사람만 의사 표현을 하거나 이웃의 아픔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정의구현사제단에서도 이런 표어가 나왔는데요. 악인(惡人)이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데, 선인(善人)들이 너무 침묵하는 게 아니냐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똘레랑스가 요구하는 것이 엥똘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반대로서의 적극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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