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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전재산 털어 독립운동했지만, 우리는..."

해외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위한 정착지원법 절실

영주귀국독립운동가유공자유족회(이하 유족회)의 최연희 대표(54)는 간도 일대에서 활약한 최운산 독립운동가의 외손녀다. 중국에 남겨진 최운산 후손들의 삶은 한반도와 중국의 현대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최연희 대표는 중국 길림성 용정시에서 태어나 자랐다. 용정시는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최 대표의 외할아버지인 최운산은 길림성(간도)에서 많은 땅과 재산을 가지고, 목장과 생필품 공장을 운영하던 그야말로 재벌이었다. 그런 그의 재산은 모두 북간도 일대 독립군 양성에 쓰였다. 그의 지원에 창설된 독립군 연합부대가 대한북로독군부, 바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승리의 주역이었다.

문화대혁명의 직격탄...지독했던 공산당

중국에서 나고 자란 최 대표였으나, 그곳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 자체를 중국 정부에서 달가워하지 않았다. 중국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 시기를 겪었다. 당시 마오쩌둥이 내세운 목표는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을 버리고 새로운 공산주의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대규모 숙청과 문화 파괴가 자행됐다. 당시, 독립운동가 일가는 중국 정부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았다. 최 대표는 "아마 일본군한테 죽은 숫자보다 공산당한테 죽은 사람이 더 많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독립운동가 일가는 민족주의자, 반역자 이런 걸로 몰려서 숙청당했어요. 어떤 분은 아버지, 오빠 등 가족 7명을 한 번에 잃기도 했죠. 한겨울에 남은 여자들끼리 그 추운 땅에서 시신을 수습해야 하기도 했어요. 그분이 지금 80세가 넘은 고령이신데 아직도 그 때 이야기를 하시면 손을 덜덜 떠세요. 정부 차원의 실태 조사 같은, 우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창구도 없었어요."
익명을 요구한 유족회의 한 회원은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며 "반혁명 진압만 수차례 겪었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는 "광복 후 1978년 중국 개혁개방 때까지 30여 년 동안 만주의 동포들은 북한보다 더 힘든 나날들을 보냈다"며 "반우파 투쟁, 사청, 문화혁명 등 격변기를 겪어야 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반혁명'은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약 30년 동안 중국 내에서 '4류 분자'로 구분짓던 적대 계급 중 하나다. 4류 분자는 지주, 부농, 반혁명분자, 범죄자 등이다. 이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선거권과 피선거권 등의 정치권리를 박탈당하고 인신의 자유, 거주지 등에 제한이 있었다.

A씨는 "박해를 받아 자살하는 사람이 참 많았다"며 "중국에서는 자살도 사회 불만의 표출이라 여겨 자살자의 가족들이 큰 고초를 겪게 되는데도 끝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8월 7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최연희 영주귀국독립유공자유족회 대표가 정착지원법 제정을 촉구했다. ⓒ프레시안(조성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도 쉽지 않은 현실

최 대표의 가족이 처음 한국에 오기 시작한 것은 1986년부터였다. 최운산은 6.25 전쟁 때 한국으로 돌아와 북한에서 사망했다. 최 대표의 큰외삼촌은 전쟁 후 부산에 정착했다. 최운산과 그 큰아들이 한반도에 돌아온 이유도 기구했다. 큰외삼촌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공산당으로부터 간첩으로 몰렸다. 감옥에 갇혀 거의 죽게 된 걸 겨우 빼내어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밤에 몰래 강을 건너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최운산의 딸이자 최 대표 어머니는 북한으로 간 아버지와 연락이 끊긴 채 중국에 남아 있다가 KBS의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한국에 있는 오빠를 찾았다. 당시는 중국과 수교를 맺지 않았을 때라 편지를 써서 방송국에 보냈다.

그렇게 1986년이 되어야 헤어진 남매는 다시 만났다. 이후 최 대표의 삼촌이 어머니를 초청하는 식으로 2005년 어머니가 한국에 들어와 2007년 국적을 취득했다. 그 후 어머니가 최 대표를 포함한 다섯 자녀를 차례로 초청해 귀화가 이뤄졌다. 귀화를 하면 1년에 2명밖에 초청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중국 동포에게 적용되는 것과 같았다. 최 대표는 그렇게 2008년 한국에 들어왔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그였으니 '돌아왔다' 보다 '들어왔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귀화했다고 끝이 아니었다. '특별귀화'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었지만, 그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국적이 안 나온 몇 년 동안은 불법체류자로 있어야 했다. 최 대표는 "탈북자들은 집부터 정착지원이 되는데 우리 유공자 유족들은 한국에 오는 것부터 너무 어렵다"며 "차별당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

너무나 절실한 정착지원법

중국식 억양이 남아있는 최 대표는 현재 중국어 강사로 일을 하고 있다. 그나마 최 대표 상황은 나은 편이다. 최 대표와 같은 영주귀국 독립유공자 유족 대부분은 70세 이상 고령이며 대부분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고 있다.

영주귀국 유공자들에게는 처음 귀국할 때 정착지원금이 지급된다. 가족의 수에 따라 4500만 원에서 7000만 원 수준이다. 이 금액으로는 조그마한 전셋집도 구입하기 어렵다. 20여 년 전, 전세 시세를 반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대표는 "작년부터 임대주택을 분양해주고 있는데 실제로 분양받는 것이 쉽지는 않다"며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데 유족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아 기다리다가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다"고 전했다. 최 대표의 어머니도 임대주택을 신청했지만 들어가지 못하고 월 20만 원 월세방에서 거주하다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임대주택조차 받기도 힘든 것이 현실"

일제강점기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국을 떠나 중국과 러시아 일대에서 활동했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이들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도 많다. 시간이 흐른 뒤, 자신들이 머물던 국가가 공산화 되고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이들의 귀환은 더욱 불가능해졌다.

1989년 이들 해외 독립유공자 유족들의 귀환이 시작됐다. 이들은 ‘영주귀국자’라고 불렸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해외 이민자라는 뜻의 일반명사다. 현재 사할린 동포, 국군 포로, 탈북자 등 역사의 아픔으로 한국에 올 수 없었던 피해자들 중 유일하게 사단법인이나 정착지원법도 없다.

최 대표는 "우리 외할아버지도 그렇지만 대부분 전 재산을 다 바치고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며 "그런데 지금 그 유족들은 임대주택조차도 받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독립운동을 하면 후손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최 대표에 따르면 영주귀국 유공자들 대다수 남성들은 건설현장의 일용직, 여성들은 식당 아르바이트나 파출부를 하며 그나마 살아가고 있다.

최 대표는 "영주귀국 유공자들이 자립할 수 있는 정착지원법은 커녕 후원단체조차 없는 게 현실"이라며 "이들 법과 제도가 마련돼, 살아계신 분들이 남은 여생이라도 덜 힘들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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