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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물 요리의 바이블 같은 여수 섬 안도 맛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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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해산물 요리의 바이블 같은 여수 섬 안도 맛기행

2019월 9월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 <전라도 섬맛기행> 출간기념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의 신간 <전라도 섬맛기행>(21세기북스)이 출간됐습니다. 어느 나라 음식보다 화려하고 품격 있는 우리 음식 문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섬. 여러 해 동안 그 섬들을 다니며 발품 팔아 발굴해낸 섬의 토속음식들에 얽힌 이야기와 레시피까지 수록됐습니다. 전복포, 성게찜, 꽃게회, 복어곰국, 문어김치, 백년손님 밥상, 피굴, 냉연포탕, 시금치꽃동회무침, 산도랏건민어탕....

▲섬학교에서 회원들과 맛보던 섬 음식에 얽힌 이야기가 수록된 <전라도 섬맛기행>Ⓒ섬학교

청년들의 입맛은 이미 외국 음식들에 사로잡혀 버렸지요. 도심에 가면 한 집 건너 한 집이 일본음식점이고 중국음식점 들입니다. 문화의 기본인 음식문화를 안방에서 빼앗기고서 한류 운운하는 것이 안타까웠고 또 보석 같은 토속음식들의 명맥들이 끊기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채록하고 기록한 것입니다. 토속음식이야말로 우리 음식문화의 오래된 미래입니다. 음식 하나가 섬을 살리고, 지역을 살릴 수 있습니다. 9월의 섬학교 제85강은 <전라도 섬맛기행> 출간 기념으로 전라도 섬들 중에서도 토속음식의 원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여수의 안도로 떠납니다. 오로지 백년손님 밥상을 비롯한 안도의 그 귀한 토속음식을 맛보러 가는 것이 그 첫 번째 목적이고, 내내 바다를 보며 걷는 안도 둘레길 트레킹은 덤입니다. 안도 섬맛기행은 9월 7(토)-8(일)일 1박2일 일정으로 떠납니다. 초가을 남도 섬의 아주 특별한 만찬에 함께 하실 분들을 초대합니다. <전라도 섬맛기행>을 들고 오시는 분들께는 저자 사인을 해드립니다^^(섬의 숙식 사정상 참가자 30명 이내로 마감합니다)


▲안도에서 사위들에게 차려주던 백년손님 밥상Ⓒ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의 답사지인 <토속음식의 섬 안도 맛기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도착하면 안도감이 드는 섬
도착하면 안도감이 드는 섬들이 있다. 완도군의 소안도(所安島)처럼 여수의 섬 안도(安島)가 그렇다. 그래서 편안 안(安)자를 이름으로 삼았던 것일까. 안도는 비렁길로 유명한 금오도 곁의 작은 섬인데 두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안도리 마을 앞에는 S자 모양의 작은 바다가 있다. 이 내해를 두멍안이라 부른다. 작은 바다를 품고 있는 섬의 모습이 바로 편안함의 근원이다. 두멍이란 둠벙, 곧 작은 저수지를 뜻한다. 큰 바다에서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데 마을 안쪽으로 가면서 점점 넓어지는 지형이라 물을 가두어 놓은 저수지 같다. 두멍안은 높은 데서 보면 영락없는 한반도 모양이다. 그래서 안도는 한반도를 품에 안은 섬이라 불리기도 한다.

▲안도는 해산물 음식의 보고다. 민박집 밥상이 이 정도로 화려하다.Ⓒ섬학교

두멍안은 내륙으로 쑥 들어가 있어 안도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천혜의 대피항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오랜 옛날에는 해적들의 근거지였다는 설도 있다. 해적선을 숨기기 좋았을 것이다. 인근 소리도에도 해적의 전설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일대 섬들이 해적들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두멍안 때문에 안도는 일제 강점기에 어업 전진기지가 됐다. 일제는 안도에 일본인들을 이주시켜 어업권을 장악했고, 어업조합과 순사 주재소 등을 두고 수산물을 수탈해갔다.

▲제주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보말 고동 무침이 안도에서는 그냥 흔한 밥 반찬이다.Ⓒ섬학교

송아지 한 마리에 17만원 할 때 학꽁치 한 상자에 40만원

1980년대에 안도는 학꽁치 잡이로 많은 수입을 올렸다. 학꽁치는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고가였다. 일본에서 학꽁치는 아이들 성장 단백질로 쓰였고 횟감으로도 쓰였다. 송아지 한 마리에 17만원 할 때 130마리 학꽁치 한 상자에 40만원을 받았으니 금꽁치였다. 선원들이 부족해 선주들이 선불금을 많이 주고 아이들을 데려가기도 했다. 당시 15살짜리 아이의 선불금이 3백만원이었는데 여수 시내 집 한 채 값이었다. 선장은 선불금이 2천만원이나 됐다. 일찍부터 돈을 벌 수 있으니 부모는 자식을 학교에 보낼 이유가 없었다. 1980년대 안도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 가운데 중등 교육을 못 받은 이가 많은 이유다. 그 무렵 안도국민학교 학생이 보통 삼사백 명이었다. 셋방 얻기도 어려웠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살았다. 지금으로서는 번성했던 시절의 풍경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안도는 여전히 인근의 큰 섬인 금오도나 소리도보다 어선이 많다. 안도리 한 마을만 30여 척의 어선이 있는데 겨울에는 아구, 봄에는 갑오징어를 주로 잡는다. 2톤짜리 어선 한척의 연 소득은 보통 8천만-9천만원 선이다.

▲말린 아귀찜을 드셔보셨는가? 그 쫄깃한 맛이 기막히다.Ⓒ섬학교

유구한 안도 역사
면적 3.96km²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안도의 역사는 유구하다. 고대부터 인근의 거문도, 소리도 등과 함께 국제 해상 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 일본 헤이안 시대 승려 엔닌(794- 864) 선사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도 안도의 이름이 등장한다. 838년부터 847년 9월까지 10년 간 당나라 유학 생활을 했던 엔닌 선사는 장보고(?-846) 청해진 대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당시에는 왜인들의 당나라 입국이 금지됐었기에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던 엔닌은 장보고가 당나라 적산에 세운 절 법화원을 피신처 삼아 불법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엔닌은 장보고에게 절절한 감사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엔닌이 당나라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는 장보고가 암살된 뒤라 신라인 무역업자 김진(金眞)의 배를 얻어 탔다. 엔닌은 귀국 길에 고이도와 거차도를 거처 안도에 기항했고 그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던 것이다.

▲묵은지청국장찜은 최고의 밥도둑이다.Ⓒ섬학교

안도 마을 서쪽 이야포 해변은 해수욕하기 좋은 해변이다. 이 아름다운 해변은 현대사의 비극인 양민학살 현장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48년 10월19일 여순사건의 와중에 진압군 김종원 대위가 연락선 동일호를 타고 함포 사격을 하며 이야포로 상륙했다. 일제 패망 후 도주한 일본인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망 어장을 안도마을 공동체에 빼앗긴 이웃 섬 주민의 무고로 진압군이 들어왔다. 진압군은 주민들을 안도국민학교에 집결시킨 후 노인, 어린이, 여자, 청년으로 분류하여 인민군을 찾아내라며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주민 40여 명을 결박하여 둠벙안 입구 안도선착장으로 끌고 가 11명을 처형했다. 좌익과는 무관한 민간인들이었다. 또 한국전쟁 때는 350여 명의 피난민이 배를 타고 이야포로 들어와 주민들의 환대를 받고 있었는데 이때 미군 제트기 4대가 피난선을 폭격해 피난민 150여 명이 몰살당했다. 참으로 아픈 민족사다.

▲꽃게보다 고가인 털게, 털게된장국을 솥째로 끓여주는 민박집 인심Ⓒ섬학교

안도의 최고 보물, 당산
안도의 최고 보물은 당산이다. 안도 당산에는 근래까지도 신당인 당집이 있었는데 모시던 신위가 바로 최초의 입도조 정씨 내외의 위패였다. 지금은 맥이 끊겼지만 안도 마을의 당제는 정월 보름 오후 5시 무렵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열렸다. 제주는 제사 7일 전에 당에 들어가 청소하고 금줄을 친 뒤 출입을 삼가고 매일 목욕재계하면서 신성하게 제를 올렸다. 하지만 당집은 당산 공원 공사 중 허물어져 버렸고 그 자리에는 운동기구가 놓여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상록수 거목이 울창한 당숲은 잘 보존되어 있는데 아직도 신성한 기운이 가득하다.

2019년, 안도에는 4명의 해녀가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18명의 해녀가 있었다. 안도 해녀 중에는 제주 출신보다 토착 해녀가 더 많았다. 수영을 잘하는 이들이 자연스럽게 해녀가 됐다. 안도 해녀는 제주 해녀에 비해 기량이 떨어진다고 스스로들 말씀하신다. “깊은 데는 못 다니고 요량이 벨로요.” 예전에는 전복, 해삼, 소라, 성게, 미역, 천초(우뭇가사리), 합자 등을 따서 제법 벌이가 괜찮았지만 이제는 “바다가 가물어” 벌이도 신통치 않다. “지금은 눈 씻고 보자도 없다.”1995년 7월 23일 인근에서 좌초한 씨프린스호(14만5천톤급) 기름 유출 사고 탓이 크다. 사고 이후부터 수산물이 점점 줄어들었다.

▲청보석처럼 아름다운 안도 동고지 바다Ⓒ섬학교

안도 토속음식, 백년손님 밥상
옛날 안도 인근 해역은 황금어장으로 유명했다. 안도의 수산물도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참담치(조선홍합)도 다른 지역은 때에 따라 살이 차기도 하고 야위기도 하지만 안도 참담치는 늘 알이 꽉 차 있고 안도 소라는 향이 무척 짙다. 그래서일까. 안도에는 전해오는 토속음식들이 많다. 그중 대표는 백년손님 밥상이다. 이런 독특한 이름의 음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육지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지금이야 손님이랄 것도 없는 처지가 된 사위들이지만 사위들도 백년손님으로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그 귀한 사위들이 받던 밥상. 안도에 실존했던 밥상이다. 이름만으로도 행복해지지 않는가.

▲호수처럼 아늑한 안도해수욕장 앞바다Ⓒ섬학교

육지에서는 사위가 오면 씨암탉을 잡아주기도 했었지만 모두가 가난했던 섬에서는 알을 얻어야 하는 씨암탉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사위를 대접할 요량으로 갯가에 나가 온갖 해산물들을 따다가 차려주던 것이 이 밥상의 근원이다. 밥상에는 주로 따개비 종류와 해초들이 올라갔다. 배말, 군봇, 거북손 등 갯바위에 붙어서 살아가는 따개비와 깊은 바다에 살아 해녀만 딸 수 있는 해녀 배말 등을 삶아내고 거기에 세모, 가사리, 미역 등의 해초를 넣어 만든 비빔밥이 백년손님 밥상이다. 여름철엔 뭍의 채소로 상추와 노각을 넣는다. 여름상추는 약간 쓴맛이 나는데 쓴 게 약이다. 노각은 시원한 맛에 곁들인다. 백년손님밥상은 육류가 귀하던 시절 단백질 공급원이었고 잔치음식이기도 했다. 마을의 어느 집에 잔치가 있으면 서로들 품앗이로 함께 채취해다 주곤 했다. 진정한 공동체의 음식이었다.

▲숲 터널을 따라 걷는 안도 상산 둘레길Ⓒ섬학교

피문어죽과 문어김치
백년손님 밥상 말고도 안도에는 특별한 토속음식들이 더 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들은 피문어죽을 끓여먹었다. 껍질 채 말린 문어는 피문어, 껍질을 벗겨 말리면 백문어다. 피문어에 찹쌀, 대추를 넣고 문어가 말랑말랑하게 물러질 때까지 푹 고아 먹는다. 안도에는 또 문어김치란 것도 있다. 문어잡이를 하던 어가에서 주로 담가먹던 김치다. 김장을 할 때 마른 문어를 방아에 찧어서 가루로 만든 뒤 김치 양념에 넣는다. 또 말린 문어를 통째로 넣기도 하는데 김장 할 때 김치 포기 사이에 넣어두면 김칫국물이 배어들면서 촉촉해진다. 문어는 방망이로 두드려서 장작을 때고 남은 숯불에 은근히 구워 김치에 넣는다. 생것은 비리고, 삶은 것은 쉽게 물러지기 때문에 굽는다. 문어는 김치를 먹을 때 꺼내서 잘라 먹는다. 김치 속의 문어는 겨울에 다 먹어야 한다. 날이 따뜻해지면 벌레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신령스런 기운이 감도는 안도 당산, 그 출입구Ⓒ섬학교

성게 알 요리의 천국-성게전, 성게 계란찜, 성게 된장국, 성게 젓갈, 성게 미역국, 성게 식혜(성게냉국), 성게 청각무침, 성게 식혜, 성게 국수
안도 사람들이 가장 좋아했던 음식은 무엇보다 성게 알 요리다. 성게 알은 그 자체로도 아주 특별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성게로는 못 해 먹는 것이 없다.”날것으로 먹기도 아까운 그 귀한 성게 알로 요리라니! 성게전, 성게 계란찜, 성게 된장국, 성게 젓갈, 성게 미역국, 성게 식혜(성게냉국), 성게 청각무침 등 무궁무진 했다. 안도펜션 주인 할머니는 “성게 넣어서 안 맛난 게 없다”고 단언하신다. 무엇보다 당기는 음식은 성게 식혜다.

우선 성게를 끓는 물에 넣어 살짝 데친다. 데친 성게와 데친 물을 함께 냉장고에 보관해서 저녁까지 숙성시킨다. 저녁 밥상 때 오이와 데친 양배추를 채 썰어 넣고 거기에 식초를 약간 곁들인다. 더러 땡초나 정구지(부추)를 다져 넣기도 한다. 그 시원한 맛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흔히 먹는 보라 성게는 4월부터 6월말까지만 알이 나온다. 딱 3개월이다. 이때는 물때에 관계없이 늘 알이 차 있다. 이삼월에는 알이 거의 없고 6월 말이면 알을 모두‘시러(까)’버린다. 산란기에 접어드는 육칠월에는 성게 알이 “허벌허벌 해진다.” 흐물흐물 풀어져버린다는 얘기다. 칠팔월에는 알이 차 있어도 잡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어업을 위한 예의다.

안도에서는 또 성게 국수도 즐겨 해먹었다. 멸치, 무, 다시마를 넣고 끓인 육수에 성게를 듬뿍 넣고 다시 끓인다. 거기에 국수, 호박, 당근, 양파 등의 야채를 넣는다. 기호에 따라 간장이나 소금 간을 한다. 겨울에는 같은 방식으로 홍합 국수도 해먹었다. 음식 좋은 섬들이 많지만 그래도 안도만큼 다양한 해산물 요리가 있던 곳은 드물다. 안도는 가히 미각의 제국이다. 그 귀한 요리들이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면 국가적인 손실이다. 정부차원에서 섬의 토속음식 도서관화 작업을 서둘러야 마땅하다.

9월 섬학교 제85강 <토속음식의 섬 안도 맛기행>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월 7일(토)>
06: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맞추기 위해, 05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5강 여는 모임
-여수 돌산도 도착
-돌산도 신기항 출항
-금오도 여천항 도착(버스 이동)
-점심식사(금오도 섬밥상)
-숙소 도착
-안도 둘레길과 동고지 마을 걷기(6km)
안도리-이야포해변-안도둘레길-동고지-안도리마을-숙소
-저녁식사 겸 뒤풀이(안도해산물 밥상 만찬-자연산 생선회와 백년손님 밥상, 그밖의 안도 토속요리들과 섬 막걸리)
-휴식 및 취침(다인실)

<9월 8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안도식 아구 맑은탕)
-안도 당산 탐방
-금오 여천항 출항
-점심식사(여수에서 장어탕)
-여수 어시장 장보기
13:40 서울 향발. 제85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토속음식의 섬 안도 맛기행> 답사지도Ⓒ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슬리퍼,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환경 살리기의 작은 동행, 내 컵을 준비합시다(일회용 컵 사용 줄이기)^^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 9월 기사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또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4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전라도 섬맛기행>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0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470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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