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 용산 재개발로 당장 삶의 뿌리가 흔들릴 사람들이 또 있다. 아직 용산 참사의 잔해가 남아있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 맞은 편 골목에는 성매매 집결지의 붉은 등빛이 아직 용산의 밤을 비추고 있다. 이제 재개발이 시작되면 이곳 여성들 역시 용산을 떠나 또 다른 삶을 고민하고 준비해야 한다.
그런 이곳에, 과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조금은 특별한' 국수집이 문을 연다. 25년 전, 용산 집결지 내 성매매 여성의 아픔을 보듬고 이들의 자립을 돕고자 설립된 사단법인 '막달레나공동체'는 오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이들의 새 직장이 될 '동고리 국수집'을 열 계획이다.
25년 동안 성매매 집결지의 현장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동고동락해온 이 단체의 이옥정 대표를 26일 오후 용산구 효창동 막달레나공동체 사무실에서 만났다.
▲ 과거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조금은 특별한 국수집이 문을 연다. 25년 동안 용산 지역 성매매 여성들의 삶의 보듬어온 '막달레나공동체'는 오는 4일 용산구 원효로에 이들 여성의 새 직장이 될 '동고리 국수집'을 열 계획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용산에 밀어닥친 '재개발의 광풍'
재개발의 광풍은 성매매 여성에게도 몰아닥쳤다. 재개발로 땅값이 크게 올라 건물주들에게는 '대박'이 터졌지만, 성매매 여성에게는 또 다른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용산 일대는 재개발로 인해 당장 철거가 진행될 예정이지만, 이곳에서 일하던 성매매 여성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상황이다.
이옥정 대표는 이 여성들이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보듬어볼 기회조차 없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이곳 여성들은 몇십 년을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과도 같다. 이들은 성매매 여성이라는 사회적 낙인 속에서 서로 외로움을 나누고 사회적 관계를 맺어왔다. 용산의 기억이 좋았든 싫었든, 이 지역이 고향 같은 사람들이다. 긴 시간 함께 해온 이웃과 헤어져 낯선 곳에 홀로 정착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들이다."
▲ 이옥정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그러나 막달레나공동체 상근 활동가들이 지속적으로 입주 자격, 입주 시기, 임대료 등의 정보를 제공한 끝에,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임대 아파트를 신청했다. 현재는 열 명 가량의 여성이 서울 근교 임대 아파트에 당첨돼 입주를 기다리고 있다.
이들은 새로운 동네에서도 용산에서 어울렸던 '친구들'과 함께 모여 새로운 삶을 꾸릴 생각에 들떠있다. 입주 예정자 박현선(가명·49) 씨는 "친구들과 모여서 살 생각을 하니 든든하고, 너무 기대가 된다"고 말했다.
이옥정 대표는 재개발로 '철거 벼랑'에 몰렸으나,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성매매 여성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지적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집주인과 제대로 된 월세 계약을 맺지 않았거나, 거주지를 다른 곳에 두고 출퇴근 식으로 성매매를 하고 있는 여성들이다. 이들에겐 이주비 지원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당장의 주거 문제나 생계가 막막하게 됐다.
아직 성매매를 하고 있는 여성의 경우, 용산이 재개발되면 생계 수단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 여성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더라도, 성매매를 그만둘 수 있는 여성은 사실상 많지 않다. 다른 곳에서는 그 일(성매매)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대책이 없다."
'친정'에서 '직장'으로, 용산 여성들의 '행복한 국수집'
생계 문제도 시급했다. 성매매를 그만뒀다 할지라도, 이들이 새 직장을 찾고 자립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수집 개업은 막달레나공동체가 용산 집결지의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 때로는 가족이 되어 이들과 복닥거리며 생활해온 결실이었다.
사실 막달레나공동체가 이곳 여성들의 자립을 위한 프로그램을 고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국수집을 창업하기 이전에도, 1991년 참기름 장사에부터 시작해 아이스크림 장사, 반찬 가게, 천연 비누 판매, 밑반찬 가게까지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중장년 여성의 경우는 사회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새로 배워서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이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 쉼터에 있는 식구들이랑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러저러한 장사를 계속 했었는데, 당시만 해도 성매매 여성이 만든 음식을 누가 먹냐는 편견도 좀 있었다.
재개발 때문에 임대 아파트를 신청하면서, 주거 문제와 동시에 생계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탈성매매를 한다고 해서 다가 아니고, 그 이후의 생계와 자립 문제도 고민을 해야 한다.
마침 행사 때마다 국수 잔치를 많이 했었다. 매년 후원 미사가 있는데, 함께 음식을 마련해 손님들을 대접한다. 국수랑 반찬이 맛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고, 그 점에서 용기를 얻어 국수 장사를 해보자, 이런 얘기가 오갔다."
오랜 노력 끝에, 국수 전문점 '동고리'는 오는 4일 개업을 한다. 마침 이 국수집은 서울시로부터 서울형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지정돼, 용산 지역의 여성 10여 명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성매매라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새로운 미래를 준비하는 여성부터, 용산에 살면서 취업을 희망하던 저소득층 여성들까지 국수집의 새 주인이 됐다.
용산 집결지 안에 살면서 10년 전부터 막달레나공동체를 알아왔다는 신현자(가명·62) 씨는 "마음 편히 오고가며 힘든 사정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곳은 친정이나 다름없었다"며 "이제는 '새로운 직장'이라는 이름으로 인연을 이어갈 생각을 하니 설렌다"고 말했다.
용산의 '큰 언니'
막달레나공동체가 용산에 뿌리내린 것은 25년 전, 작고 초라한 단칸방에서 개원 미사를 드리면서부터다. 이옥정 대표는 미국인 문애현(요안나) 수녀와 함께 1985년 7월 22일 '막달레나의 집'을 열었다.
"예전엔 용산역이 완행 열차가 멈추던 곳이었다. 그 때 당시 용산역 광장은 지금이랑 다르게 넓은 공터였는데, 역을 지나다가 한 남자가 광장에 돗자리를 깔고 잠든 다섯 살 배기 여자 아이를 성추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아이의 엄마는 성매매 여성이었다. 그 아이는 엄마가 일하는 밤 동안 길거리에서 놀다 잠들기 일쑤였는데, 그런 일은 그 당시 그 지역에서 비일비재했다.
경찰에 그 남자를 신고했고, 증인으로 나갔다. 따지고 보면 그 아이 엄마에게 나는 은인이었지만, 오히려 원망을 들어야 했다. 당시 성매매 여성들은 경찰에 적발되면 기술원이라는 사실상 수용소와 다름없는 곳으로 재판도 없이 보내졌고, 그 가족의 생계가 끊기게 됐기 때문이다. 업주 역시 자기네 아가씨가 잡혀가면 난리가 나고….
경찰 역시 이 남자를 조사해 처벌하는 게 더 시급한 문제였지만, 왜 아이가 거기서 잤느냐, 엄마 직업이 뭐냐는 것에 수사의 초점을 뒀다. 그 일을 겪게 되면서 성매매 여성과 아이들을 지원하는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 이옥정 대표. ⓒ프레시안(최형락) |
그 일을 계기로, 보험 회사에 다니던 평범한 여성은 용산 지역 성매매 여성들의 '큰 언니'이자 용산의 터줏대감이 됐다. 25년 동안 성매매 여성들과 동고동락하면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나는 정말 정성을 다해 잘해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현장으로(성매매 업소)로 돌아간다던가, 어느 순간 자살을 한다던가…절망적인 순간이 많았다. 정부 지원이 없으니까 한계가 있었다. 직업 훈련도 없었고, 당시엔 파출부 같은 직업 알선이 전부였다. 그게 너무 막막한 거다. 돈이 없으니 살 길이 막막하고, 미래는 안보이고, 그러다 보니 다시 업소로 가게 되고….
그럴 때는 이 아이한테 성매매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최선인가, 라는 고민도 들었다. (성매매를) 안 하는 게 행복할 거라고 내 기준으로 생각했는데, 사람을 하나 죽일 뻔 했다는 자책감도 있었다. 그 때는 업소로 돌아간다는 아이가 있으면 다시는 오지 말고 전화도 하지 말라고 내쳤었다. 그 애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배신감도 느꼈다. 그런 식으로 단절을 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내 능력을 너무 과대 평가했던 것 같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면, 남은 문제는 당사자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을 바꿨다. 내 능력의 밖의 문제였다. 이제 잘 보내는 것에 대해 고민한다. 매몰차게 단절을 하면 그 애들은 다시 돌아오고 싶어도 연락을 못하지만, 편하게 보내면 언제든 고민이 있을 때 다시 찾아올 수 있다."
대표, 이사장, 원장…. 많은 '직함'들을 갖고 있지만 이옥정 대표는 막달레나공동체에서 '큰 언니'로 불린다. 스무살짜리 '손녀'뻘부터, 50~60대 여성들까지 모두 그를 그렇게 부른다. 그렇게 부를 때 "벽이 없어지는 느낌"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이곳 쉼터에서 함께 지내면서, 텔레비전 채널권을 가지고 싸우기도 하고, 결혼한 애들이 명절 때마다 아이를 데리고 찾아오기도 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 이옥정 대표가 막달레나공동체 사무실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프레시안(최형락) |
'상처받은' 이들의 풍경, 카메라에 담다
요즘 막달레나공동체 식구들은 생애사 연구와 사진 촬영에 한창이다. 용산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아온 삶의 현장과 그곳에 얽힌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보듬어볼 기회조차 없이 재개발로 뿔뿔이 흩어 져야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막달레나공동체 부설 '용감한여성연구소' 연구원들이 카메라와 녹음기를 내밀었다.
이옥정 대표는 "꺼내기 힘든 기억일지라도,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토해내고 정리한다면 이들이 좀 더 강해지지 않겠나. 이게 이곳 여성들에게 하나의 치유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먼저 용산을 떠난 사람들이 가끔 놀러 와서 괜히 이사를 했나보다고 하소연할 때가 있다. 이곳이 지긋지긋해서 갔는데, 외로운 거다. 이웃, 친구들이 생각나면서 가슴이 뻥 뚫린 것 같고, 언니들이 보고 싶어 울기도 하고…그럴 때는 늘 걷던 골목조차도 쓸쓸해진다. 용산에 대한 기억이 다 좋진 않아도, 나쁜 추억이라 할지라도, 이곳을 고향처럼 생각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생애사 연구를 시작했다."
지난해부터는 쉼터 식구 8명에게 카메라를 제공해 자신의 삶의 현장을 찍게 했다. 처음엔 카메라에 찍히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공동체 행사를 하고 나면, 자신이 찍힌 사진을 누군가 볼까봐 앨범에 있는 사진조차 가져갔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찍히는 것에도, 찍는 것에도 거부감이 없다.
한 달에 한 번씩 함께 모여 각자가 찍은 사진을 설명하는 시간도 갖는다. 이 대표는 "이 골목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게 나한테 어떤 의미였는지, 이런 사소한 것들을 얘기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정리하고 얘기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국수 한 그릇마다 희망을 담았다"
재개발은 누군가에겐 환희가, 누군가에겐 절망이 된다. 그러나 그 둘에겐 공통의 기억이 남는다. 길게는 수십 년 간 살아온 공간에 얽힌 '추억'과 함께 허물리는 기억이다. 새로 들어선 번듯한 고층 빌딩으로는 그 정서와 관계들이 '재개발'될 수 없는 법이다.
▲ 재개발은 누군가에겐 환희가, 누군가에겐 절망이 된다. 그러나 그 둘에겐 공통의 기억이 남는다. 길게는 수십 년간 살아온 공간에 얽힌 '추억'과 함께 허물리는 기억이다. ⓒ프레시안(최형락) |
막달레나공동체는 이제 동고리 국수집을 시작으로 새로운 추억과 관계 맺기를 기대하고 있다. '동고리'란 원래 혼사나 제사 등 큰 일이 있을 때 음식을 담는 동그란 바구니를 말하는데, 넉넉하게 인심을 담는 국수집이 되기를 바라며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탁자 8개만 들어가는 열평 남짓의 작은 규모지만, 국수 한 그릇 한 그릇마다 새로운 삶을 향한 희망이 담겼다. 강화에서 직접 재배한 배추로 김치를 담그고, 별미로 '고구마 묵'도 내놓을 예정이다. 배고픈 이들을 위해 공기밥은 공짜다.
"가정 폭력이든, 성매매든, 성폭력이든,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경험을 생채기로 갖고 있는 여성들에게 막달레나공동체는 지난 25년 동안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왔다고 생각한다. 동고리 국수집은 이들에게 '고기를 잡는 바다'나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잡은 고기를 썩혀 버릴 것인가, 아니면 맛있게 요리해 이웃과 함께할 것인가는 여기서 일할 여성들이 결정할 몫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곳 여성들이 국수집을 통해 얻은 고기를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모습을 격려하고 지지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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