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풍년인데 실제 수확된 것은 없다. 한미연합 연습은 계획대로 실시되었고 이를 핑계로 판문점 회동 이후에만 북한이 4차례 미사일과 방사포를 쏘아 올렸다. 북미 간 대화가 재개되고 남북관계가 속도를 낼 것 같았던 기대감이 피로감으로 바뀌면서 또 한 번 희망고문이 되어가고 있다. 북미 실무회담이 언제 열리고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이지 예상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언젠가는 열리겠지만 판문점 회동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미국 대통령이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는 상징성만 남는 역사적 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미래핵, 현재핵 그리고 과거핵
북한이 지난 2017년 11월 29일 화성 15형을 발사한 이후 핵무력 완성을 선언했지만 실제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핵무기 생산과 관련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미사일에 실어 충분한 거리를 날릴 수 있는 보다 더 작고 가볍고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핵탄두를 만들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핵실험도 필요하다. 특히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이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대기권 재진입 능력에 대해서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추가적인 미사일 발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핵무력의 기술적 향상이 '미래핵'이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유예, 그리고 이와 관련된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관련 시설을 폐기하는 것이 바로 '미래핵'의 제거이고 핵무력의 질적 향상을 차단하는 것이다. 북한의 미래핵은 이미 상당부분 제거되고 차단되었다. 9월 평양선언을 통해 동창리 시설 폐기도 합의했다.
반면 동결은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를 중단하는 유예와는 차원이 다르다. '미래핵'이 아닌 '현재핵' 제거의 시작점이자 실질적 비핵화 행동의 입구이다. '현재핵'은 현재 작동 중인 모든 핵 프로그램 관련 시설로 핵무력의 양적인 증가를 의미한다. '현재핵'의 활동을 중단시키지 않는 한 '과거핵'은 지금 이 시간에도 증가하고 있다. '과거핵'은 현재 보유하고 있는 핵물질과 핵탄두, 그리고 탄도미사일이과 같은 완성된 핵무력이다. '현재핵'은 '과거핵'의 역사책이자 지문과도 같다. '현재핵'의 사찰과 검증을 통해 얼마나 핵물질을 보유하고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영변에 있는 5MWe 원자로의 경우 연료봉 8000개를 3~4년 가동 후 재처리하면 플루토늄을 약 20~25kg까지 추출할 수 있다. 연간 1개 이상의 핵탄두가 늘어나는 셈이다. 아직 소재 및 규모는 불분명하지만 우라늄 농축시설인 원심분리기도 2000대를 운영한다고 가정했을 때 연간 핵탄두 2개를 추가로 만들 수 있는 30~40kg의 고농축우라늄 생산이 가능하다. '과거핵'의 증가는 북한이 상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보복을 할 수 있는 '2격 능력'(the second strike capability)으로 충분한 핵무기의 수를 가지게 된다.
핵무기를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실질적인 억지력이 있는 2격 능력을 가진다고 정확하기 말하기는 어렵다. 지난 6월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미국과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등 세계 9개 핵보유 국가들의 전체 핵탄두 보유 수를 1만 3865기로 추정하면서 북한은 20~30개로 예상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의 북한 핵문제 전문 분석 웹사이트인 '38노스'(38 North)는 "2020년까지 최대 100개까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나타내기도 했다.
'동결'이라는 이름의 입구 혹은 장애물
북한이 인도, 파키스탄과 같이 100기 이상의 핵탄두를 가지거나 이를 넘어 영국, 프랑스, 중국처럼 200개 이상의 핵탄두를 보유하게 된다면 한반도 비핵화 게임의 양상은 지금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일단 더 이상 핵탄두 수가 증가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동결은 중요하다. 동결조차 합의하지 않고 북한이 핵시설을 가동하고 핵물질 생산을 계속하고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동결이 입구이자 시작점이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판문점 회동 직후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북·미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의 대량살상무기(WMD)의 완전한 동결을 원한다"고 언급했다. 미 국무부 역시 동결이 입구라고 밝혔다. 미국이 동결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북한과의 협상에서 유연해진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셈법이 바뀌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비건 대표가 북한이 비핵화 할 때까지 대북 제재를 유지하는 대신 인도적 지원이나 연락사무소 개설 등을 언급했지만 동결에 따른 상응조치인지 불명확하고 오히려 "완전한 비핵화라는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한미연합연습이 종료되고 북미 간 실무회담이 재개된다고 해도 장밋빛만은 아니다. 미국이 이야기한 동결이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협상을 위한 전제조건일 수도 있다. 동결이 조건이 아닌 협상의제라고 하더라도 미국은 단순히 영변 핵시설의 동결이나 모든 핵 프로그램의 동결이 아니라 WMD의 동결을 이야기하고 있다.
협상 중에 플루토늄 재처리, 우라늄 고농축 등 핵물질 생산뿐 아니라 미사일과 화생무기 생산을 중단하고 모든 관련 시설을 폐쇄 봉인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조건이다. 더욱이 동결을 확인하고 감시하기 위한 사찰단이 상주하는 문제와 동결 시설 목록을 신고하는 문제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미국의 셈법은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아니 오히려 협상 시작 전부터 또 다시 허들을 만들고 골대를 옮기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기까지 하다. 싱가포르 이후 종전선언과 신고라는 예상치 못했던 장애물이 길을 막았다. 동결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미국이 말하는 '일괄타결 후 동시병행'이든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 동시행동'이든 범위를 결정하고 순서를 정하기 더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이번에는 동결이 입구가 아니라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모든 핵프로그램의 동결과 영변의 폐기, 그리고 합리적인 상응조치
미국이 더 이상 선 비핵화 후 체제보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전체에 대한 일괄타결을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다. 비핵화 최종상태에 폐기 및 반출해야할 '과거핵'의 일괄타결 범위도 핵물질과 핵탄두, ICBM뿐만 아니라 탄도미사일 전체와 화생무기, 그리고 관련 기술 인력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해야 할 상응조치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일괄타결이나 빅딜(Big Deal)이 아니라 일괄 압박, 빅 프레셔(Big pressure)이다.
미국은 강자가 가지는 굴복의 유혹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일단은 비핵화의 최종단계를 보다 구체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든 핵 프로그램 동결을 약속하고 우선적으로 확인된 영변 핵시설 폐기가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가 있어야 한다. 미국의 일괄타결과 북한의 단계적 이행을 절충한 포괄적 합의 방식의 적용이 요구된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도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를 다시 언급하며 북한과 미국 모두 반걸음씩 양보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이 요구하는 '+α'는 없지만 검증을 포함하는 영변 핵시설 폐기를 보다 구체화하고 영변 폐기 시작과 동시에 미국의 상응조치로 싱가포르 정신에 따라 연락사무소 개설 문제나 평화체제 문제와 연결시켜 나가는 방식이다.
연락사무소는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북미 상호간 보다 원활한 비핵화와 상응조치 이행 차원에서 설치하는 것이다.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시작하는 문제는 시진핑 주석이 방북 기간 중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적극적 역할을 하겠다고 한 이상 복잡해 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제재는 동결과 영변 폐기 시작과 동시가 아니라 어느 정도 진전된 중간 불능화 지점에 우리의 개성공단 재개 등 남북 경제협력을 우선 예외적으로 적용 실시하고, 추후 국제사회도 유엔 안보리 제재의 부분적 또는 단계적 완화를 모색하는 방안이 가능할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북미관계, 그리고 잡은 손 놓지 않을 용기
판문점 만남 이후 한반도 정세는 더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향후 열릴 북미실무회담 결과에 따라 한반도 비핵평화의 길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북미실무회담이 열린다고 당장이라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0월 1일 중국 건국 70주년과 10월 6일 북중 수교 70주년을 계기로 김정은 위원장이 방중 해 북중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높다. 그 이전 9월 유엔총회가 열리고 김정은 위원장이 연설을 하지 말란 법도 없다. 지난해 9월 평양선언에 합의한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답방도 열려있다. 시진핑 주석이 방북한 이상 서울 방문 가능성도 있다. 가능성은 높지 않으나 북한을 향한 일본의 움직임도 지켜봐야 한다. 11월에 교황이 일본을 방문하는 만큼 북한 방문 가능성도 열어둔다.
11월 미 대선을 1년 남겨둔 시점까지 북미 정상회담, 남북 정상회담이 유엔총회, 북중 정상회담, 한중 정상회담 등과 어떤 순서로 진행되어야할지 설계해 볼 필요가 있다. 11월 미 대선을 1년 앞두고 북미관계가 지금보다는 진전된 최소한 역진 불가한 수준까지는 도달해야 할 것이다. 11월 이후 북미관계는 1년 6개월 이상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면 후퇴하지 않고 합의사항이 이행 유지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결과 영변 폐기 그리고 합리적 상응조치를 입구로 한 현실적인 접근법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판문점 회동으로 북미간 대화의 채널이 열렸다고 남북관계까지 정상화되었다거나 우리의 중재자 역할이 복원되었다는 당위론은 우리의 희망일 뿐이다. 북한의 북미대화 채널이 리용호 외무상을 중심으로 한 외교라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냉정히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중재자 역할에 대한 미련과 집요함보다 냉정하고 신중하게 되돌릴 수 없는 남북관계를 만들 담대함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다.
일단 우리가 진짜 할 수 있는 것과 하고자 희망하는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자칫 과도한 기대는 오히려 희망 고문이 될 수도 있다. 중재자 역할에 필요한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남북이 당사자로서 한 번 잡은 손 놓지 않을 용기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지금도 금강산을 다시 가지 못하는 것은 상상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용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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