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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본 남원성 삼층탑과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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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본 남원성 삼층탑과 "나는 내 의무를 다했다"

[김유경의 문화산책] <40> 조선도공 14대 심수관과의 만남 ④마지막

도공들이 남원성을 떠난 이래 400년이 흘렀다. 1998년 서울에서는 ‘400년 만의 귀향-심수관가 도예전’이 열리고 도공 후손들의 땅 미야마에서는 계속 이어지는 도자기 가마에 남원을 근원으로 한 불을 당기는 작업과 그들 선조가 마지막 본 남원성의 삼층탑을 제막하는 행사가 벌어졌다.


"당길 조상님의 사발부터 사쓰마 도자기까지 400년간 지내온 일종의 보고서를 고향에 가져와 보이는 것이죠."

전시회는 한국인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여기 오기 전 일본에서의 전시회도 그랬고 사인하는데 팔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그가 먹을 갈아 써 내리는 한 줄의 시구 들이 좋았다. ‘도자기는 흙에 기도하고 불을 두려워한다’는 말은 도공 세계를 핵심적으로 나타낸 구절이기도 하다. ‘남원 옛 전장터를 생각하며’ ‘가을 태백산 맑은 빗방울 같은 내 고향 청송’ ‘오늘 밤 묵을 광주는 아직 멀고 산마루 높이 여름 달이 떴네’ ‘본시 한 뿌리이니 어찌 고향을 잊으리까(本始同根 不忘故山)’ ‘무심귀대도(無心歸大道)’ ‘운상존창천(雲上存蒼天)’ 등.

▲14대 심수관이 2019년 5월 도록에 쓴 휘호 ‘흙에 기도하고 불을 두려워한다’ ⓒ김유경
그 휘호들은 심수관이 지은 300여개의 시구들 중 매번 적당한 것들을 골라내 쓰는 것이라고 했다. 굳이 자신을 도공 14대라고 표기했다. ‘도예가’ 라는 단어는 의식적으로 쓰지 않았다. 청송 심씨의 도포 입은 한 노인이 ‘청송 심씨는 양반인데 굳이 도공이라고 쓰다니..’ 했다. 도공보다 좀 우아한 것 같은 ‘예술가’ 라로 과시하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사쓰마도자기의 근원과 역사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400년간 일군 사쓰마도자기의 광휘를 보여주고, 양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을 모집하고, 비행노선을 열도록 애쓰는 등 한일우호에 애쓴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이 주어지고 노태우대통령 때 대한민국 명예총영사 직함을 받았다. 그의 집은 한일 정치인들이 예술과 역사를 가운데 놓고 겉으론 부담없이 만나는 극적인 장소가 되어 일반인과 같이 김종필과 오부치 등 양국의 총리, 수상, 각료 등도 왔다. 한국에 와서 박정희 대통령과 술을 같이 마셨고 1999년 김대중 대통령과 만나서는 현대 한국도자기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했다.

“도자기는 모양을 만드는 기술만 가지고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도공의 윤택한 마음과 시대를 이해하는 마음이 들어있지 않으면 도자기로서의 가치가 없습니다. 일본을 포함하여 지금의 도자기는 기술은 좋으나 윤택한 마음으로 시대를 노래하는, 그러한 점이 부족합니다.”(김택근 지음 김대중 평전에서 인용).

2004년 노무현대통령은 미야마로 수관도원을 방문했다.

미야마에서는 14대 심수관과 실행위원회 모두가 간절히 바란 한국식 삼층석탑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그 연원은 남원을 떠나올 때 초토화돼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성안에 삼층석탑 하나가 온전히 있어 도공들이 마지막 본 고향의 최후 모습으로 잊지 못한데 있었다. KBS 등 한국이 재정지원을 하여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삼층탑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무형문화재 이재순 석장(石匠)이 포천 화강암 한국 돌을 써서, 1998년 11월 29일 미야마 마을 광장에 탑을 준공했다.

제막식 날 국악인 박윤초씨가 옥산신궁에서 불리던 조선인의 노래 ‘오날이 오날이라, (오늘이) 단군제일이로구나’ 하는 가사에 곡을 붙여 부르고 한국에서 간 방문객들이 탑돌이를 했다.

▲조선도공들이 남원을 떠날 때 마지막 본 삼층탑이 미야마 마을에 건축되었다. ⓒ이순희


남원에서 채화된 조선의 불을 공수해 오기로 했다. 이 일에 남원유림들이 “조선도공으로 붙들려 가 죽도록 고생한 동포들의 뜻은 갸륵하지만 조선에 쳐들어와 사람들을 숱하게 죽이고 잡아간 임진왜란 침략에 일본의 사과가 우선할 것”을 요구했다. 400주년 일본실행위원회 측에서 대표가 와서 그렇게 한 뒤에 비로소 불이 채화되었다. 배가 도공들이 떠나온 바닷길을 거쳐 구시키노 항구로 들어오고 미야마 마을 사쓰마 도자기가마에 불을 붙였다. 이 과정은 극도의 제한된 분위기에서 행해졌다. 시종일관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15대 심수관, 심일휘(오사코 가즈테루)가 말했다. “단군조상님이 도와 주셨어요” 14대 심수관이 그날 밤 한국 측 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삼층탑 준공기념 만찬 자리에서 말했다. “저는 선대가 물려주신 제 의무를 다했습니다. 아들 입에서 단군조상이란 말이 나왔어요.”

아마 14대 심수관은 이날 아들의 그 말을 듣기 위해 온 생애를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왔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의무를 다했다’는 그의 짧은 표현은 묵직한 울림을 준다. 그의 조상들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으로 한글 책을 지녀오고, 옥산궁을 받들고, 낯설고 험한 땅에서 대대로 초대 조상의 사발을 수백년 간 보존하고, 백세청풍 글자를 탁본하고, 안압지에서 나온 바닥전으로 전시장을 건축했다.

심수관 가는 14대에 와서 400년의 빈자리를 넘어서 한국과 일본을 잇는 도공의 맥락을 사회적·문화적으로 이어놓는 정치적 대 작업을 했다. 한일수교이후 시대를 산 14대 심수관, 심혜길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에서 사는 한국인들의 정신적 버팀대로서 그의 집안이 주는 의미는 크다. 고향이, 뿌리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진 것이기에 심수관 집안은 그토록 몸부림치듯 조국의 기억을 간직하려 애쓰는 것일까. 14대 심수관, 그는 생애를 통틀어 정말 많은 일을 해냈으며 그만큼 한국 도예사의 결은 더 섬세해졌다. 거의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한 셈이다.

▲수관도원 홈 페이지에 나온 심당길상. 15대가 2004년도에 빚었다. 수장고에 전시되어 있다.


15대 심수관은 2004년 초대 시조 심당길 상을 자기로 빚어냈다(규슈박물관에는 자기로 빚은 이삼평 상이 있다). 심수관가에 보존되어오는 망건을 쓰고, 한 손에 갓을 벗어들고, 흰 두루마기에는 옷고름 위로 가슴께에 술끈을 매어 늘어뜨린 점잖은 남자상이다. 눈매가 부리부리해 보이는 게 14대, 15대의 눈시울이랑 통하는 듯하다. 망건 위에 갓을 쓴다는 것, 허리가 아닌 가슴 위치에 정확하게 술을 두르고 두루마기도 무릎아래까지 길게 한 것 등, 15대가 이해하는 이 차림새의 개념과 미적 비례감각은 정확하다.

▲15대 심수관 블로그 ‘직심직전(마음에서 마음으로)’의 대문사진으로 나와 있는 옥산신사의 전면.

2019년 봄 14대 심수관 선생의 병세가 좋았다, 나빴다 하면서 김영림 선생이 ‘마지막 방문이 될듯하다’고 여행계획을 말했다. ‘우리는 호랑이다’의 화가 김소선 씨 등이 동행했다. 걸음 걷는 일이 힘들어진 14대 심수관은 서울에서 오는 오랜 지기를 만나게 되어 병석을 나와 기쁜 기색을 하고 앉아 있었다. “당신 사내아이 같은 딸은 잘 있소?” 하고 그가 전건축가에게 안부를 물었다.

나영원 여사가 시루팥떡을 가져왔다. 아침에 시루에서 쪄낸 떡은 그때까지 따끈했다. 손을 잡아당겨 떡에 대고 그 온기를 느끼게 했다. 1998년 삼층탑 준공행사에 쓸 시루팥떡을 처음 가져왔을 때 심수관이 ‘어서 맛보자’하고 접시에 담기도 전에 손바닥으로 떡을 받았었다. “이건 옛날엔 황실에서만 먹는 떡이었어”라고 그가 말했었다. 그런 일화가 있어 다시금 시루팥떡이 준비된 것이었다.

“조선은 음식도 맛있구.. 약식은 처음 먹어보는 건데 맛있구나. 약이 되는 거니? 조선의 5월은 어떠냐? 조선은 시골로 갈수록 경치가 아름답지..” 어느 해 그가 서울에 와서 몇이 같이 불고기 저녁을 먹는다 하니 철판석쇠 위에 수북이 쌓인 불고기를 떠올리고 손으로 수북하다는 원을 그리면서 즐거워하던 장면이 생각났다. 풍성한 것을 맘에 들어 하던 영락없는 조선사람이었다.

그에게 단군에 대해 물었다. 말이 나오자 곧바로 “저는 단군 그분을 대단히 존경합니다”고 했다. “옥산신사의 단군 신체(神體)바위는 특별한 사람 아니면 볼 수 없는데 만져서도 안 되고 사진도 안 됩니다.”

“젊어서 옥산신사를 정비하는 일에 선발되어 평생 딱 한번 단군의 신체바위를 정면에서 바로 보았어요. 평범한 돌이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면서 단군신체가 이렇게 생기셨구나 싶어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 했습니다. 그 때 단군바위를 본 사람은 지금 저 하나 생존해 남았습니다.”

통역을 맡아준 김영림 선생은 “93세 고령으로 대화하기가 힘든데 단군이야기가 나오니 선생의 얼굴이 희열로 환히 빛나는 것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겁니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6월 16일 14대 심수관 선생의 부고를 들었다. ‘무엇이든 말해주겠다’던 약속처럼, 마지막 순간의 답변을 들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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