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약 개발을 선도하고 있는 LG생명과학이 '선천성 면역결핍'이란 희귀 질환자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첨단 약물의 생산을 포기해, 가뜩이나 불치병에 고통받고 있는 환자들을 벼랑끝에 몰아넣고 있다.
***LG생명과학, "수익 없다" 약품 생산 중단**
LG생명과학은 지난 6일 서울대 병원에 공문을 보내 "감마 인터페론의 유효기간이 짧은 데다 판매량이 적어 그동안 적자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며 자사의 감마 인터페론 제품인 '인터맥스 감마'의 생산을 중단한다고 통보한 사실이 26일 뒤늦게 확인되었다.
이런 사실은 26일 '선천성 면역결핍증 환우회'(회장 정기경)가 인터넷 사이트(cgd.co.kr) 자유 게시판에 '긴급 안건'이란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환우회는 글에서 LG생명과학이 감마 인터페론 생산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윤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기업이 우리의 작은 희망을 꺾고 있다"면서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환자들 "생명 연장할 유일한 약물, 10배나 비싼 수입 약값 감당 못해"**
게시판에 글을 올린 정기경 회장은 27일 프레시안과의 통화에서 "이미 9월부터 병원에서 약이 안 나와, 약을 구하느라 고생했다"면서 "약 공급이 제대로 안 되는 경위를 확인하던 중, LG생명과학이 약품을 중단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정 회장은 "LG생명과학이 생산 중단을 하면 수입 약을 쓸 수밖에 없다"면서 "수입 약은 가격이 10배가량 높아져 약값으로 월 3백만원 정도를 추가 지출해야 한다"고 안타까운 처지를 하소연했다. 그는 "요즘 사회에서 얻은 이익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고 들었다"면서 "연간 1천8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이 이익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라도 생산을 재개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고 밝혔다.
선천성 면역결핍증은 인체에 침입한 세균이나 박테리아를 잡아먹는 대식세포에 결함이 있는 유전 질환으로, 우리나라에는 30여명의 환자(최고령 21살)가 있으며, 현재 서울대병원 면역클리닉에서 환자 5명이 입원치료중이다.
감마 인터페론은 환자들의 면역 기능을 높여주는 효과가 뛰어나, 20세를 넘기기 힘들다는 불치병인 선천성 면역결핍증 환자들의 생명을 연장해줄 수 있는 유일한 약물이다. 환자들은 현재 유전자 치료법이 연구되고 있는 만큼, LG생명과학측이 유전자 치료법이 개발될 때까지만이라도 이 약을 계속 생산해주기를 갈망하고 있다.
***LG생명과학, "현실적인 어려움 너무 많다. 내년 8월까지는 공급"**
하지만 LG생명과학측 얘기를 들어보면, 기업의 입장도 어려움이 적지 않아 보인다.
이번에 생산을 중단한 '인터맥스 감마'는 LG생명과학이 1990년 개발에 성공해 1991년 판매 허가를 받은 것으로, 국내에서 개발한 최초의 첨단 생명공학 의약품이다. 최근에는 판매량도 소폭이나마 지속적으로 늘어나, 2000년(3천7백바이알)부터 2002년(2만2백바이알)까지 5배 이상 판매량이 늘었고, 올해 들어서도 8월까지 9천5백바이알이 판매됐다. 바이알이란 1cc 주사약 한 병 만큼의 양을 가리키는 단위이다.
하지만 전세계적으로 이 약을 사용하는 환자 숫자가 적고, FDA(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승인도 받지 못한 상태여서 수출은 하지 못하고 국내 소비에만 의존해 생산하고 있는 단계다.
LG생명과학 관계자는 "최근 몇 년 동안의 인터맥스 감마 판매량 중에서 80% 이상은 아토피성 피부염 환자에게 사용된 것이고 선천성 면역 결핍증 환자에게 처방된 비율은 6%에 불과하다"면서 "판매량도 적고, 유효기간도 짧아서 생산후 3분의 2 이상이 폐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경영상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인터맥스 감마는 당초 류마토이드 관절염 환자용으로 생산됐으나 그후 이를 대체할 염가의 약품이 개발된 데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아토피성 피부염 치료제로는 판로가 불안정하다는 이유에서 불가피하게 생산중단을 결정하게 됐다는 게 LG측 설명이다.
LG측은 "이러다보니 1년에 1~2번 정도 소규모 생산을 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규격을 맞추기가 어려워 국가검정을 통과 못하기도 해 2001년부터 3개월 정도 '제조정지' 조치를 받는 일도 빈번했다"면서 "내부에서는 2001년부터 생산 중지 얘기가 나왔으나, 환자들 입장을 고려해 현재까지 계속 생산을 해 온 것"이라고 밝혔다.
LG생명과학 관계자는 "환자들에게 수입해 판매하는 것도 고려해 봤으나 수입 가격이 현재보다 10배나 높아 포기했다"면서 "일단 내년 8월 초까지 공급할 재고는 확보해 놓았다"고 밝혔다. 그는 "환자들의 입장을 고려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기업의 현실적 어려움도 고려해 달라"고 말했다.
***"제약업계 윤리기준 높여라", 세계적 흐름**
이처럼 인터맥스 감마의 생산중단을 둘러싼 환자나 기업의 사정은 모두가 딱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최근 제약업계의 사회윤리에 대한 국제적 기대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LG생명과학의 이번 조치가 너무 단시안적인 게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즉 LG생명과학이 진정으로 세계적 생명공학 업체를 지향한다면 국내외적인 '이미지 제고' 차원에서라도 인터맥스 감마의 지속적 생산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한 예로 25일(현지시간) 외신들에 따르면, 세계보건기구(WHO)는 10월중에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카피약을 승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WHO의 조치는 빈곤국 에이즈 환자들이 치료약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치는 국제제약회사연맹과 일부 제약회사들의 협조 때문에 가능해졌다. 그간 WHO와 에이즈 관련 단체들은 제약회사들에게 아프리카 등 저개발 지역에 거주하는 3백만명의 환자들이 약을 복용할 수 있도록 에이즈 약값을 낮추고, 카피약 승인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같은 요청에 대해 국제제약회사연맹은 지난 8월 나라 안에 제약회사가 없는 빈국들은 값싼 카피약을 구입할 수 있다는 WHO의 협상안을 수용했다. 또 카피약 제조회사 4곳은 카리브해 국가의 수백만명 환자에게 현재 가격의 3분의 1 수준인 1인당 연간 1백40달러에 에이즈 약을 공급하는 데 합의했다. 제약회사들이 이렇게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데에는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의 노력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제약업체들이 이같은 결정을 내린 더 큰 이유는 지난 2000년 하반기부터 유럽연합(EU)을 중심으로 연기금을 주식투자할 경우 '사회적 책무'를 성실히 하는 기업들에게 우선적으로 투자하기로 정한 뒤 이를 실천에 옮기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컨대 정부가 아프리카의 에이즈환자 등 누구보다 치료약을 절실히 필요로 하되 구매력이 없는 환자들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염가로 약을 공급하는 기업들에게 우선적으로 연기금을 투자, 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해줌으로써 기업의 수익성을 간접적으로 보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노대통령, "바이오산업을 세계 7위로 키우겠다"**
노무현 대통령은 27일 오전 충북 청원군 오송리에서 열린 오송 생명과학단지 기공식에 참석, 치사에서 "바이오산업을 집중 육성, 2012년까지 세계 7위권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세계시장 점유율도 현재 1.3%에서 12%까지 끌어올리겠다"면서 "오송단지에 대해 국책기관 이전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우리 정부도 말로만 21세기형 산업으로 생명공학 산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지 말고, 실질적으로 기업이 단기간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첨단사업에 투자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 지적이다. 이것이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있는 30여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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