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인구의 10%인 3천만명이 건강한 식사를 감당할 여력이 없고, 어린이 중 8.5%가 실제로 굶주리고 있으며, 20.1%는 굶주림의 위협에 처해 있는 나라."
"농부들은 농산물의 과잉생산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정부는 엄청난 양의 식량 재고를 해결하기 위해 해마다 3백만톤 이상의 곡물과 그 산물을 해외로 원조하는 나라."
제3세계와 제1세계의 서로 다른 두 나라 얘기가 아니다. 바로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현주소다.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처럼 미국 내 굶주림의 실태도 심각한 상황이다.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나라의 상당수가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푸드퍼스트(Food First)로 잘 알려진 식량과발전정책연구소에서 1998년에 펴낸 <굶주리는 세계>(허남혁 옮김, 창비 간)는 이 수수께끼를 차분한 어조로 냉철하게 해명하고 있다. 식량이 풍부하지 않거나, 자연 재해 때문에 또 인구가 많아서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린다는 논리는 거대한 신화에 불구하다는 것이다.
***식량이 충분하지 않다?**
저자들에 따르면 지난 35년간 인구 증가율보다 식량 생산률이 훨씬 더 높았다. 전세계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에 3천5백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을 만큼 곡물을 생산한다. 이는 거의 모든 사람을 비만하게 만들 정도의 양이다.
많은 국민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방글라데시, 인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도 예외가 아니다. 놀랍게도 이 나라들 상당수는 식량 수출국이다. 인도는 2억명의 국민들이 굶주리는 가운데도, 1995년에 주식인 밀·밀가루 6억 2천백만 달러어치, 쌀 13억 달러어치(5백만톤)를 수출했다.
***자연 재해가 기근을 발생시킨다?**
1974년 가을 10만명이 아사한 방글라데시 기근에 대해서 많은 전문가들은 수확을 망친 홍수 때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홍수에도 불구하고 방글라데시는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많은 농민들이 돈이 없어서 부유한 농민들의 창고에 쌓여 있는 식량을 구매하지 못하는 불평등한 현실이었다.
1980년대 초반 가뭄의 영향을 받은 31개 사하라 이남 국가들 중에서 모잠비크·수단·에티오피아 등 5개 국가만 기근을 겪었다. 자연 재해 때문이 아니라 전쟁 같은 외부 원인 때문에 기근이 발생한 것이다.
***미국 식량 원조 굶주림 해결에 도움 안돼**
저자는 이 밖에도 '녹색혁명이 해결책이다', '자유시장과 자유무역이 해답이다', '미국의 원조가 굶주림 해결에 도움이 된다' 등 식량에 관한 12가지 신화를 파헤치면서 그 모순과 허구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제 원조는 굶주림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저자들은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국의 경제 원조는 몇 개 국가에 집중되어 있고, 그 대부분은 제3세계에서 자국의 영향력 확대나 미국식 구조조정 정책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또 식량원조의 경우에도 빈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힘들다.
1996년 미국이 제공한 식량원조 3백만톤 가운데 4분의 1에 달하는 양은 제3세계 국가의 축산사료로 쓰이거나 도시 소비자들에게 공급되는 파스타·빵·식용유 등을 만드는 식량가공 기업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재판매되었다. 미국 정부가 카길 같은 곡물을 제공하는 거대 기업들의 주머니에 돈을 지불하고, 또 그 곡물은 제3세계 국가의 식량가공 기업가들의 배만 부르게 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미국의 원조 행태가, 수혜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지역에서 재배된 작물에서 빵과 파스타 같은 밀 생산물로 바꾸도록 돕는데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밀이 잘 자라는 지역이 거의 없는데도, 아프리카에 밀을 원조해 소비자들의 기호 변화를 유도해 장기적으로 식량 자급이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식이다.
***자유무역도 대안될 수 없어**
최근 대세가 된 자유무역도 결코 굶주림을 해결할 수 없다. 자유무역을 선도적으로 도입한 멕시코는 그 참담한 예다.
멕시코는 캐나다, 미국과 함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은 후, 미국에서 들어오는 값싼 수입 옥수수 때문에 전통 작물인 옥수수를 생산하는 소농들이 큰 타격을 입었다. 옥수수의 생산은 1년 안에 반으로 줄어들었고, 많은 농민들은 땅을 잃었다.
수백만의 농민들이 땅을 잃는 동안, 미국의 소수 농기업들은 기록적인 이윤을 남기게 되었고 오랜 역사를 지닌 중앙아메리카의 수백 종의 옥수수들도 사라져갔다. 서구적 기준으로 봤을 때,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굶주림을 몰랐던 멕시코 농민들은 이제 굶주림의 공포가 무엇인지를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미국-다국적 기업에 대항해 민주주의를 지켜야**
저자들은 굶주림이 단순히 "배가 고프다"는 느낌이 아니라 고통, 슬픔, 굴욕, 공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힘을 빼앗긴 데서 오는 무력함"이라고 정의한다.
저자들이 굶주림의 근본 원인을 식량과 토지의 부족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서 찾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저자들은 세계 식량 시장을 뒤흔드는 카길 같은 다국적 곡물 회사와 몬산토 등 농화학·생명공학 기업의 힘과 이를 뒷받침하는 미국 정부가 주도하는 WTO 체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굶주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침묵하지 말고 굶주림과의 싸움에 나서야"**
유엔 산하 세계식량계획(WFP)이 지난 16일 '세계 식량의 날'을 맞아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굶주림에 고통 받는 이들은 전세계 8억4천만명에 달한다. 이중 6백만명의 어린이가 5살이 되기 전 굶주림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
이렇게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 중에는 당장 연말이면 식량 사정 악화로 배급이 줄어들어 굶주림에 시달릴 68만명의 북한 동포들도 끼어 있고, 학교 급식으로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해 온 결식아동들도 포함돼 있다. 굶주림과 싸우는 것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져다준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우리의 무관심이 이런 비극을 계속 재생산해왔다.
최근 몇 년 사이 주목할 만한 환경 관련 책들을 소개해 온 역자 허남혁 씨는 이 책에 한국 상황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여 책의 완성도를 더욱 높였다. 허남혁 씨는 "이 책이 우리 농민들과 농업, 농촌을 살리고, 먹을거리에 대한 전세계적인 질서를 조금씩 민주적으로 바꾸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고 밝혔다.
<굶주리는 세계>는 초판이 나온 1986년부터 많은 사람들에게 굶주림과의 싸움에 나서게 하는 자극제 역할을 했다. 연구소 소장인 피터 로셋이 故이경해씨 추모사로 한국어판 서문을 대신한 이 책은, 더 많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굶주림과의 싸움에 우리가 나설 것을 촉구하고 있다.
"오늘 이경해씨는 영웅이며, 국제적으로 조직화된 농민운동의 순교자이다. 그의 정신은 굶주림을 종식시키려는 전세계의 투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우리는 이 한국어판 서문을 이 투쟁에 삼가 바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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