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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영화인이 연대하는 문화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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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영화인이 연대하는 문화적 가치

〈김봉준의 붓그림편지 8〉

들판을 지나고 산골짜기 길 따라 화실로 갔습니다. 아직 여기는 추운 산골의 겨울입니다. 논에는 흰 눈이 얼어 있고 바람은 세찹니다. 들판에는 한해살이 풀들이 어지러이 죽은 채 누워 있습니다. 겨울은 죽은 식물들의 시체들과 잠자는 나무들이 침묵하는 계절입니다. 봄이 오기를 참으며 침묵으로 기다리는 계절 2월입니다.

이따금 세차게 불어오는 골바람에 잔가지가 떨고 있습니다. 싸늘한 시골길을 가끔 농부들이 걷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 농부들은 추운 겨울에도 걷기운동을 합니다. 올봄 농사도 체력이 받쳐줘야 지을 수 있다며 60이 넘는 아줌마들도 체력 관리에 땀을 냅니다. 농부들이 마지막 믿을 것은 제 몸뿐입니다. 늙은 농부들이 몸 관리를 잘 못해 한번 쓰러지면 그다음부터는 농사꾼에서 퇴출됩니다.

늙은 농부들밖에 안사는 농촌의 겨울은 유난히 쓸쓸합니다. 농부들도 농사로 먹고살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몸으로 알고 있습니다. 농산물 자유무역협상(FTA)으로 쌀이 완전 수입개방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오래 전부터 농촌사람들은 정든 고향을 떠났고 학교 간 젊은이들은 농촌에 대해 배운 것이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모진 가난이 몸으로 뼈저린데도 빈들을 놀릴 수 없다고 농부들은 올 농사를 다시 시작하려고 합니다. 자식 다음으로 아끼는 농토를 차마 놀리지 못합니다. 벼, 고추, 옥수수, 감자, 들깨, 콩, 배추로 조금씩 다랭이 농사를 할 겁니다.

영화인들도 FTA로 인해 스크린쿼터가 절반이 축소되어 걱정이 많다지요. 열심히 일 하면 그럭저럭 먹고 사는 게 보장되는 시대는 지났나 봅니다. 농부나 영화인이나 시장개방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협상테이블에 농산물과 영화가 우선협상안으로 나와서 그렇지 2차 산업의 경쟁력 있는 것 빼고는 1차 농업과 3차 서비스산업은 대부분 협상대상이 될 것입니다. 교육, 의료, 금융, 법률, 대중문화예술, 지식산업, 모든 서비스산업이 폭풍을 맞을 것입니다.

농부들과 영화인이 17일 광화문에서 함께 FTA저지 촛불시위를 한다고 하니 우연히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무역협상이 끝나면 시장개방으로 초국적 자본의 표적에 다 노출됩니다. 협상에 임하더라도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는 집단 당사자들이 분명한 입장들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자기 밥그릇을 외부 행정가들의 밀실협상에 송두리 채 맡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 동안 농촌이 피폐해지는 근대화 40년을 지켜보았을 겁니다. 도시발전의 희생양으로 농촌을 택했었지만 이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도시 서비스산업의 큰 변화를 요구합니다. 우리 산업은 겨우 IMF 환란을 빠져나와 건강을 채 회복하지 못한 환자 몸 같은데 계속 희생양을 요구하는 살벌한 세계경제전쟁입니다.

유엔이 작년에 문화종 다양성협약을 내놓고 지구촌 모든 나라에 권고하고 있습니다. 문화종 다양성을 중시하고 보존하는 당사국의 정책과 국제적 지원책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문화종 다양성의 모태는 그 종족의, 오랜 자연과의 생활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 지역 자연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과관계에 있습니다.

'한국영화 살려서 세계에 태극기를 휘날리겠습니다'라고 외치던 어느 1인시위 영화인의 외침처럼 한국영화가 정체성을 살리려면 한국의 자연과 농촌으로부터 다시 배워야 할지 모릅니다. 자연과 인간이 오랜 동안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 온 우리 농촌문화는 영화인들이 애정을 가지고 찾아야 할 한국적 영화예술의 모태문화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영화, 대중음악, 미술, 무대예술, 게임산업 등 문화예술산업은 콘텐츠를 어디로부터 얻을지 가만 생각해볼 때입니다. 우리문화의 가치를 받쳐주는 정신적, 물질적 토대로서 자연과 농촌, 숲과 마을이 어울려 이루어 온 동아시아의 자연문화를 영화인이 잊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술공부 하려면 의례 도시의 세련된 문화, 서구근대문화에서 배워야 한다고 떠났었지만 그것은 기술을 배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영화는 지금부터 나로 돌아가서 세계로 향하는 진짜 시작입니다. 한국미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인들이 이번 농부들과 연대해서 싸우는 FTA 저지투쟁이 한국영화의 정신적 근원을 다시 찾는 계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소정의 권익도 챙기시고 자연과 농부로부터 예술정신을 다시 배운다는 자세로 연대투쟁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한 예술인으로 동참합니다.

1993년 저도 앞이 막막했던 미학부재의 시대에 방황을 끝내고 '숲과 마을'로 들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기를 잘했습니다. 여기서 싱그러운 자연의 미, 자연과 인간의 영혼이 하나였음을 배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문화의 종 - 정체성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싸움 중에서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힘들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한국예술의 중흥은 기술산업의 발전이 우선 필요한 것이 아니고 문화가치, 콘텐츠의 정립이 먼저 중요합니다. 그래야 가장 한국적인 것이 아시아적이며 세계적인 영화가 될 것입니다.

저 들판의 나무들도 겨울 내내 죽은 듯 참고 기다렸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것을 서로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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