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당길 사발(히바카리)이래 심수관 집안에 나이테처럼 쌓여간 ‘조선의 기억’ 중에는 ‘백세청풍’ 글자로 된 병풍도 있다.
13대 심수관, 심정언(沈正彦)에 대한 일화가 많았다. 교토대학을 나온 그는 젊어서 조선 황해도를 여행했다. 해주에서 ‘백세청풍(百世淸風)’을 큰 글자로 새긴 돌비석을 보았는데 글자의 의미심장함과 활달함이 현란하기까지 한 서체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여행 중임에도 그는 일꾼과 함께 발판을 만들어 올라서서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같이 비석을 탁본하기에 이르렀다.
14대 심수관이 2003년 사쓰마 도업인들의 동호회지에 ‘청풍’으로 회지 제목이 정해진 유래를 설명하면서 이 탁본에 얽힌 글 ‘쇄락암 잡기’를 썼다. 쇄락암은 심수관 댁 다실이 있는 사랑채를 말한다.
일본 텔레비전에 심수관가가 소개된 프로그램이 있어 백세청풍 병풍이 쳐진 다실이 배경으로 나왔다. 방송이 나간 뒤 병풍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서 구했냐, 자기에게 팔아라’ 하는 무례한 말도 있었지만 이 병풍은 심수관가의 가보로 전해진다. 그런데 13대 심수관은 말수가 적은 사람이어서 이 병풍 글자의 내력 같은 것은 따로 말해 주지 않았다.
14대 심수관이 하루는 어느 노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그 병풍이 ‘황해도 해주에 있는 돌비석의 글자이며,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것’이라 했다. 그녀의 부친이 일제 강점기 해주에서 근무 했는데 자신은 그 비석아래서 놀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것.
‘고려의 젊은 왕자가 왕이 되어 왕도를 구하려는 생각으로, 중국 송나라 주자에게 사신을 보내 왕도를 밝혀 줄 글귀를 써달라고 했다. 사신들이 주자한테서 ‘백세청풍’ 네 글자를 받아 돌아오는 배를 탔는데, 폭풍이 심하게 일어 배가 침몰하게 됐다. 선장이 글자 중의 바람 풍(風)자를 바다에 버려야만 풍랑이 가라앉아 모두가 살 수 있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넉자 중 풍자를 떼어내 바다에 던졌더니 바로 폭풍이 멎고 사신들은 무사히 돌아왔다. 젊은 왕은 없어진 풍자를 애석히 여겨 최고의 서예가에게 풍자를 새로 써서 완성시켜달라고 했다. 서예가는 밤새 풍자를 써넣고 그만 기진하여 죽고 말았다. 왕은 글자를 돌에 새겨 넣었다.’
노부인은 그런 얘기를 전하면서 잘 간직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심수관은 그의 부친이 젊은 날이던 때 손수 탁본한 노고가 있는 추억으로 간직하던 병풍이던 것이 노부인의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내력을 알게 되니 “주자와 같은 대학자의 직필이 바로 자신에게 가까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감동이었다”고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탁본의 유래를 아들이 스스로 터득할 날을 태연하게 기다리던 13대 아버지의 풍격(風格), 더욱이 무엇이든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는 현대의 풍조, 왕도를 구했던 청년 임금, 책임을 완수하고 쓰러져 죽은 서예가, 어느 부분에도 높은 식견과 일편단심이던 삶의 방법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특히 바람(風)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늘에서 부는 바람이 아니고 가풍, 국풍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정신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 병풍은 심수관 댁에 있는 다실에 있었다. 이 방에서 한글로 쓴 ‘옥산궁 유래기’도 보고 최충전, 숙향전, 그 외 십 수권의 한글로 된 조선 책들을 보았다. 조상제사에 쓰는 제문과 함께 이런 책들을 대이어 간직할 수 있었다면, 그 집안은 지식인의 정신을 소중히 해온 계층일 것이다.
그의 집에 이런 정통의 일본식 다실이 있는 것은 심수관가에서 제작하는 도자기의 핵심을 다도에서 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도는 도자기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부인 나츠코 여사는 다도를 가르치는 가원(家元)이었다. 가원은 10년 간 10단계의 수련을 거쳐 이뤄지며 특히 도자기에 대한 미적 기준을 식별하는 안목을 지니는 능력 때문에 산업화된 도자기든 수제품 도자기든 다도선생인 가원의 미적 감식여부에 따라 흥망이 좌우된다고 한다. 나츠코여사의 생존시(1999년 작고) 그의 집에서는 수심년 동안 매달 마지막 일요일마다 사쓰마 스타일의 다회가 열렸는데 이 다회는 규슈에서 가장 큰 규모일 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서도 유례가 드문 것이어서 매번 3백 명의 손님들이 심수관가에 초대되어 왔다. 여기서는 세 가지 차를 쓰고 수관도원에서 만든 다기를 썼다.
심수관 선생의 안내로 가고시마의 어느 찻집에서 연두색 거품나는 말차를 마셔볼 기회가 있었다. ‘그릇의 가장 예쁜 면이 상대방에게 마주 보이도록 하고 또 어떻게 해서..’ 그 일은 어느 해 해인사 성철스님에게 일본의 최고 다도가가 차를 대접했을 때 스님이 조그만 찻잔을 우스워 하며 ‘난 이거 잔째 홀랑 다 마셔버릴 뻔 했어’했던 일화와 함께 내가 사랑스럽게 간직한 일화, 편안한 심수관의 한 면을 본 추억이 되었다.
14대 심수관은 한국사에도 능통한 듯 했다. 누가 성씨의 본관을 말하면 ‘거기는 가야’라고 알아 맞췄다. 막상 정씨 성의 후손은 알지도 못하는데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왔었다는 것도 먼저 말하고, 임진왜란에 조선에서 잡혀간 이들의 송환을 위해 세 번이나 조선의 사절단이 왔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막상 일본 측에 중요한 조선 인력들은 사절단이 못 찾아보는 곳에 숨겨두었다는 것까지 아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일행이 배를 타고 앵섬에 갔을 때 마침 화산이 폭발했다. 햇빛이 쨍쨍한 맑은 날씨였음에도 순식간에 온 섬이 어두워지고 검은 재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검은 용암만 보이는 섬에서 그는 13대,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철학자이셨죠. 어려서 나를 이 곳에 데려오셔서는 나무가 예사로 자라지 못하는 용암에 뿌리박고 자라기에 더욱 강한 소나무처럼 살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심란해질 때면 여기 와 용암을 바라보면서 마음을 가다듬곤 한답니다. 조선에서 붙잡혀와 어려운 환경에서 이곳에 정착한 조상들이 겪어낸 어려움을 생각할 때마다 힘을 얻습니다.”
섬에서 바다건너 보이는 가고시마 시를 보면서 그는 말했다. “난 남원도 청송도 도저히 잊을 수 없지만 여기 가고시마도 사랑해요. 우리 심씨네가 4백년 간 살아온 곳이기에.”
그날 일행은 ‘앵섬이 뻥!’ 하고 그날 놀랐던 화산폭발을 회상하며 건배를 하고 심수관 선생은 ‘목포의 눈물’을 휘파람으로 불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이 즐거웠다. “선생은 늘 그렇게 즐거우시냐”고 부인에게 물었더니 “오늘은 신이 복을 내려서 이렇게 즐거운 것이지요. 그가 우울해 할 땐 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기만 하지요.” 했다. 재빨리 오가는 대화에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도 언뜻 고개를 돌려 남이 눈치 못챌 만큼 빨리 눈물을 씻는 그의 모습과 함께 그 말은 그대로 오버랩 되었다.
일본 말도 모르고 여럿이 함께 있는 1986년의 자리에서 ‘어떻게 분위기를 망치지 않고 기사를 만들어내나’ 긴장되어 있던 내게 심수관 선생은 “무엇이든 다 물어보라. 대답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것은 일종의 대신뢰와 같은 것이었다. 이제 생각하니 선생이 그때 우리 일행을 앵섬으로 데려간 것은, 아주 깊은 가슴 속의 이야기를 해주려는 배려가 있어서 그랬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인간을 보고 사람을 사귄다”고 그는 말했다. “사람의 직업은 바람 부는 것 같아 언제든 변할 수 있지만, 사람들 누구에게나 있는 슬픔은 어떻게 나타내느냐에 따라 사람값이 매겨지지요. 서로 통하는 사람끼리는 그런 순간에 서로 인간의 크기를 알게 되는 것이죠.”
15대 심수관이 된 일휘(일본이름; 오사코 가즈테루) 씨는 ‘청풍’ 소식지에다가 할아버지 13대의 기억을 쓰기도 했다. “사람들이 너희 할아버지는 이 동네의 기상청 같은 사람이었다고 했다. 항상 올봄 비가 많을 것이다 든가 가물거야 등을 미리 말했다. 나는 그런 말 하는 것 흘려듣고 말았지만 동네 어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꽃이 피면 마른 장마가 온다’고 하고 ‘죽순이 짝 짜개지면서 껍질이 벗겨지면 장마가 길다” 고 했다고 그는 썼다.
사쓰마 도자기 연혁에 보면 초기서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도공사회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심수관가는 여러 대에 걸쳐 도공사회에서 활동이 컸는데, 이와 함께 박용이, 하정열, 김감병, 신용호, 김금익, 하삼청, 박용금, 김용남, 하삼관 등의 이름이 도공사회를 통솔해 가는 역할로 기록되어 있다. 박정백, 박정관 부자는 12대 심수관과 동시대에 파리 등 만국박람회에 작품을 내놓았다. 박씨 성의 도공 이름이 자주 보여 혹시 박평의의 후손은 아닌가 했는데 14대 심수관이 직접 그 사실을 확인해 준 적이 있다. 옥산신사 주변의 대나무 숲속에는 차씨 성을 기록한 조선도공 2대의 돌덩이 묘비도 쓸쓸히 남았다.
조선도공의 후손 중에 언급할 또 한 사람은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 한국이름 박무덕;朴茂德) 외무상이다. 그는 심당길과 같이 끌려온 박평의의 후손(박수승의 아들로 도쿄대학을 거쳐 외교관이 되면서 도공세계를 완전히 떠났다.)으로 소련 대사 등을 거쳐 두 번이나 외무상을 지내며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이를 군부 등에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패전 일본의 종전처리 등 전쟁과정에 깊숙이 관련됐다. 이후 전범으로 체포돼 감옥에서 옥사했다. 동료들이 ‘뛰어난 인품과 인격의 소유자였다’고 기억하는 도고 시게노리가 감옥에 있을 때 14대 심수관은 가고시마 과자를 가지고 손 위의 그를 찾아 아홉번 면회를 갔는데, 그때마다 그를 반겨 맞곤 했다고 한다.
그의 시조이자 조선 도공사회의 통솔자 중 한 사람이던 박평의의 무덤과 비석이 옥산신사 부근에 있다. 시게노리의 아버지 박수승은 옥산신사 개축 때에 많은 돈을 내었다. 성을 갈고 도고 시게노리가 되었지만 그는 미야마 사람 모두가 기리는 인물이기도 해서 기념관이 미야마 마을에 있다. 심수관 집안에 보존된 책자 중에는 박평의(朴平意) 관련 자료도 있고 14대 심수관은 시게노리를 추모하는 모임의 회장이기도 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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