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는 16세기에 지리적 명칭으로 처음 도입되었다. 널리 쓰이는 '동아시아'란 말이 사용된 것은 그보다도 한참 뒤인 1943년부터다.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연합군은 동남아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 스리랑카에 동남아시아사령부(South-east Asia Command)를 설치했고, 이 때부터 '동아시아'란 말이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동아'라는 말이 있기는 했다. 최근까지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동아'는 사실 1930년대 이후 일본이 내세웠던 '대동아공영권'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중심 국가' 구상이나 한-중-일 경제 블록, 동북아 공동체 등의 논의 속에서 자주 회자되는 '동아시아'나 '동아'가 20세기 초 '제국주의'와 '전쟁'과 함께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역설은 동북아 공동체가 논의되는 한 편에서 불협화음을 연출하는 현 동북아 상황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인접국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우경화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며 중국의 경제·군사적 강국 지향 움직임이 향후 동북아 정세에 미칠 영향도 여전히 미지수다. 한반도의 긴장 상태도 여전히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며, 전후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쳐온 미국 패권주의의 '폭주'는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어떤" 동아시아를 지향할 것인가?**
위기와 가능성이 혼재해 있는 지금 우리는 "어떤" 동아시아를 지향할 것인가? 창작과비평사가 창비로 이름을 바꾼 후, 처음으로 내놓은 1년6개월에 걸친 기획물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전6권, 창비 간)은 이 질문에 의미 있는 답을 내놓고 있다. 미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면서도, 상호 파멸을 조장하는 갈등을 넘어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
백영서(연세대), 이연숙(일본 히또쯔바시대), 이욱연(서강대), 임성모(연세대) 교수 등이 기획하고 15명의 동아시아 전문가들이 번역과 대담에 참가해 만든 6권의 책들에는 동아시아 비판적 지성들의 고민이 녹아들어 있다.
백영서 교수는 출간 후 가진 대담에서 이 책의 기획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식인들의 글을 소개해서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소통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취지이다." 비판적 지식인들의 연구 업적을 토대로 동아시아의 지향점에 대한 논의의 물꼬를 터보겠다는 창비의 기획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런 기획 의도는 어느 정도 달성된 듯하다. 우선 중요한 지식인들이 지역에 편중되지 않고 골고루 소개되었다. 타이완 쪽 천광싱 칭화대 교수가 참여해 <제국의 눈>을, 중국 쪽 쑨거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과 추이 즈이완 미국 MIT 교수, 왕후이 중국 칭화대 교수가 참여해 각각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중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를 내놓았다. 또 일본 쪽에서는 사카이 나오키 미국 코넬대 교수와 야마무로 신이치 교토대 교수가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를 선보였다.
***전후 세대 아시아 지식인들의 고민 담아내**
더 눈에 띄는 것은 이번에 소개된 미국, 일본, 중국, 타이완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6명의 학자들이 모두 다 1945년 이후에 출생한 전후 세대라는 점이다. 기획에 참여한 이욱연 교수는 이렇게 1945년 이후에 출생한 전후 세대 지식인을 주목한 이유에 대해서 "2차대전 이후, 미국이라는 규정력이 강하게 작동하는 냉전체제와 동아시아 질서가 긴밀하게 연결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세대라는 점이 고려되었다"고 밝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고민을 심화시킨 이들 세대들이 "일본, 중국, 타이완 등 자국의 현실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면서 동아시아와 전지구적인 질서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이 쏟아내는 고민들도 다양하다. 미국 주도의 패권에 반대하는 '탈제국'(천광싱), 민족주의의 폐해(사카이 나오키), 국민국가를 강조하거나 부정하는 양 극단에서 균형을 모색하려는 시도(쑨거), 중국의 무분별한 자본주의 도입을 비판하면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주장(추이 즈이완)까지 서로 만나고 대립하면서 지식인들은 동아시아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나름의 견해를 내놓고 있다.
특히 이들 지식인들이 계속 자신의 고민을 심화시키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학자라는 점과 이들의 견해가 특정 학문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학문 분야를 넘나들면서도 현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전개될 동아시아 논의의 상을 그려보는 기회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1년6개월에 걸친 공들인 기획은 책의 구성에서도 빛을 발한다. 지적 편력에 대한 자전적 기록, 사상의 정수를 보여줄 만한 글들의 모음, 한국 지식인과의 대담 세 부분으로 구성된 각각의 책들은 독자들이 서구 지식인들보다 오히려 낯선 아시아 지식인들의 이론적 성과와 그 배경을 조망하는 데 손색이 없다.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아시아에 대한 고민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예의주시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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