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수관, 심혜길은 와세다 대학을 나와 정치인의 의전비서로 일했다. 이 기간 중에 '교육 없이 문화는 없다' 하여 가고시마 산골학교가 축소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집안에서는 대대로 교육을 중시해 한어훈몽(韓語訓蒙) 이라는 한글 책을 통해 '책을 잘 닐럿냐(읽었느냐)' 는 말로 책을 가까이 할 것을 가르쳐 왔다.
그가 도업 일을 부친에게서 익혔음에도 가업을 이으라는 말을 안 들으니까 13대의 임종자리에서 일본인 부인 나츠코(夏子) 여사가 보다 못해 '제가 이어 받겠습니다' 했다. 마침내 결심하고 38세의 늦깎기로 본격적인 14대 심수관이 되는 과정에, 그의 어머니는 매일 아침 아들이 작업하는 가마 옆에 일정하게 떨어진 곳까지만 나와 서서 아무 말 없이 보았다. '이 정도면 됐냐'는 눈빛으로 그릇을 들어 보이면 어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어 '아직'이라는 의사표시를 했다. 2년이 지나서야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여 비로소 그가 제대로 된 14대의 길에 들어섰음을 인정했다.
14대 심수관은 일본 도예가로만 머물지 않고 조상이 떠나온 한국의 사회로 깊숙이 뛰어 들어왔다. 시바료타로의 역사소설 '고향을 잊지 못합니다'를 통해 심수관 집안과 조선도공들 이야기가 알려졌다. 심수관이 한국 땅을 찾으면서 보이는 행적은 강제로 고향을 떠나 400년을 살아온 사람의 철학적, 역사적 관점이 얽힌 것들로 한국사와 맞닿아 있었다. 조선으로 가려고 몰래 작은 배를 띄우면 조류에 밀려 도로 해안으로 밀려나오곤 해서 망향의 비애만이 더하던 조상과 달리, 조상묘를 가보지 못해 산언덕에 올라 아득히 먼 저쪽을 바라보고 제사 올리는 것으로 산하가 감응해 주기만을 바라던 조상과 달리, 14대 심수관은 일본 국적의 여권을 들고 가쁜히 한국 땅으로 비행기를 타고 들어왔다.
그는 조상 당길이 마지막으로 떠나온 남원을 둘러보고 청송에 처음 성묘 가던 날의 기억을 말했다. 심씨 문중의 어른 뒤를 따라 선 그의 뒤로 줄줄이 이어져 오는 일족의 행렬을 보면서 그는 '늘 외롭던 감정이 가셨다'고 했다. 청송 심씨 족보에서 당길 시조의 휘(본명) 심찬(沈贊)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엔 눈물을 쏟았다고 했다. 대학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서 한일합방을 보는 시각, 단군을 받드는 옥산신사의 유래에 대한 강연도 했다. 그는 겨울로 들어서는 늦가을 한국 시골의 정취를 특히 사랑하고 더 오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일본 국적을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미야마의 심수관 댁은 수관도원이란 이름으로 다회를 위한 다실과 정원이 있고 가마와 수장고, 매장이 집과 같이 있다. 그는 심수관가의 역대 작품과 유물 등을 보존 전시하는 수장고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전시장 바닥을 안압지에서 나온 신라 보상화문 바닥전으로 건축할 생각이었다. 섬세한 꽃줄기무늬가 새겨진 안압지의 바닥전이 후손들에게 뿌리인 조선을 길이 각인시킬 것이란 의도였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김영림 만이 그 안압지 바닥전을 제작해낼 수 있었다. 1980년의 준공을 예정하고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처음엔 심수관이 우리말도 모른다고 '만들어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도공 14대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여성 전건축가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당신은 일제 36년의 고통을 못 잊지만 우리는 아예 일본으로 끌려가서 360년을 당하고 살았다. 우리는 현지에서 살 수 밖에 없어 이곳 문화 또한 존중하며 적응한다." 그 말은 14대가 1965년 한 대학의 초청강연에서 말했던 유명한 구절이기도 했다.
수장고의 현관과 전시장에 소나무의 그을음을 먹은 안압지 바닥전이 시공됐다. 회색 전돌 바닥전은 전체 건물이 일본식인 분위기 안에서 편안하고도 특별한 느낌이 난다. 일본식 거처와 생활태도를 두고 그는 "타국에 나가 사는 사람은 자기 본질에 대한 긍지를 갖고 타국인의 존경을 받으며 그들 문화와 제도를 이해하고 협력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요"라고 아예 글로 써서 보여주었다.
선조들의 무덤도 가까이 있었다. 후손들 가슴에 납덩이처럼 들어앉아 잊히지 않는 역사가 여기 내려앉아 있구나 느껴졌다.
1603년, 심당길과 김 해 도공 두 사람의 꿈에 동시에 조선쪽 하늘로부터 날아온 불덩어리가 떨어졌다. 이상히 여겨 그 자리에 가보니 지금 옥산신사가 있는 자리에 4미터가 넘는 큰 바위가 떨어져 있고 그것은 실제로 뜨거웠다고 한다. 이를 단군의 계시로 여기고 18개 성씨의 조선도공들이 혈서를 써 단합을 맹세하고 이곳에 단군을 받드는 사당, 옥산궁을 지었다(후일 일본식 옥산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본으로 끌려온 계기를 두고 반목이 없지 않았는데, 이를 불식시키기로 한 것이다. 1673년에 지은 그 건축은 처음엔 평양에 있는 단군묘 옥산궁을 본받아 지었다. 해마다 추석이면 조선식으로 제를 올리고 고려춤을 추고 고려떡을 먹고 기쁨을 나누며 스스로를 추스렸다.
심수관가에 보존되어오는 단군제의 「제문」은 '대한의 혼이여! 밝혀주소서.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떠돌이 원객이 되었습니까'로 시작한다. 무덤가에서 제문을 읽는 그들의 눈물이 보이는 것 같다. 그래도 '이곳을 개간해 살아야만 한다. 비애를 그치고, 모두 함께 즐기자. 조상이여 우리가 영귀해지도록 길이 수호하소서' 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옥산궁 유래기」는 단군을 받드는 사당, 옥산신사를 지으면서 근거를 기록해 놓은 문서이다. 그러나 명치유신 이후 일제 강점기에 들어 조선식 건축을 불허하는 방침 때문에 일본식으로 개축되고 단군을 제사하는 것도 어려워졌다.
심수관 집안은 13대 까지 조선인끼리 만의 결혼으로 자손을 이어갔다. 바닷가에 살면 조선으로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내륙 산골로 옮기게 하고, 조선인의 감각을 잃지 않게 하려고 결혼도 그렇게 한 것이다. 그 중에는 반녀니, 져나니, 두 여성의 헌신으로 오늘의 심수관가가 있게 한 역사도 있어 심수관 댁의 정원에는 두개의 비석이 금줄을 두른 채 서있다. 14대 심수관은 옥산궁 신사를 말하면서, 또 이들 두 묘비를 보여주면서도 울다 웃다하는 얼굴이었다.
심수관가의 모든 유물, 조상의 망건, 도깨비 가면, 책자와 사료, 역대 도자기 작품을 건사한 수장고에는 처음 일본에 올 때 가져온 조선의 마지막 흙과 유약, 조선기술을 써서 만든 사발 하나가 소중히 보관돼 온다. 오직 가마의 불만을 일본 것으로 만들었다하여 '히바카리'란 이름이 붙어 전하는 사발은 묵직한 몸집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된 형태와 황갈색 유약을 입은 것이 누가 봐도 낯익은 조선사발의 느낌을 담고 있다. 화려한 채색과 금칠로 번쩍이는 일본 국보 사쓰마 화병 옆에서, 그 작은 그릇은 어떤 광풍에도 흔들림없이 고요한 심정의 정화같이 보였다. 따뜻하고 한없이 겸허해 보이기도 하면서 의연한 것이, 세계적 명성의 화려한 작품 옆에서 전혀 기죽거나 하는 기색없이 오히려 당당해 보이는 것이었다. 꼭 이 그릇을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센리큐같은 다도가들이 조선의 사발을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찻사발로 지목한 배경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일본의 이런 다도를 따른 자들이 어떻게 그토록 난폭하고 잔인한 전쟁애호 패권자들인지 알 수 없다. '깜찍하구나 싶다'고 한 사람은 말했다.
봉건시대 번주의 통제 아래 이들이 구워내는 모든 도자기는 사쓰마 번주의 소유여서 11대 수관까지의 작품은 묘를 이장하며 수습한 부장품과 금이 가는 등 실패작들 일부만 남아있다. 초대 3대까지의 작품에선 낯익은 조선의 그릇 분위기가 난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개인 가마로 독립한 12대 심수관의 작품은 새롭게 창조된 사쓰마 도자기 현대 예술가의 것이다. 그는 금을 많이 쓰는 채금의 전문가였고 섬세한 투조기법의 사쓰마 도자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만든 예술가였다. 이들로 인해 축적된 번의 막대한 부는 막부를 타도하는 사쓰마(가고시마) 번의 정치자금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가고시마는 자고로 일본 내에서도 정치적 격랑의 진원지이기도 해서 '한국을 먹어야 한다'는 가당찮고 범죄적인 정한론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고 군국주의로 치달아간 명치유신의 주역들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조선도공 후손으로서의 삶이 이 기간 중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여러 인물을 통해 증명된다.
사쓰마는 화산지대라 자기 흙과 달리 힘이 약한 도기질 흙을 가지고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이지러뜨리지 않고 어떻게 그 정도로 큰 그릇과 섬세한 기법을 구사했는지 보통 사람의 솜씨가 아니다고 했다. 155센티 높이의 화려한 대화병 같은 대형 작품은 보통의 도자기기법으로는 불가능하고 한국의 큰 독이나 항아리처럼 쌓아올리는 기법을 써야만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도공의 전통을 핏줄과 글로 소중히 전승해 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고 그러한 정보가 축적된 가문 덕에 다른 일본인들이 넘보지 못하는 기술을 구사해 심수관 가의 전통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고 했다.
프랑스 외교관이 일본과의 수교기념으로 지녔던 12대 제작의 큰 화병은 14대 심수관이 거액을 들여 되사왔다. 번주 딸의 혼수로 보내졌다가 외국을 떠돌던 도자기도 있고 오스트랄리아 정부가 12대 수관에게 제작을 의뢰했던 작품도 있다. 의뢰 과정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12대는 무서운 사천왕이 백인을 발밑에 밟고 있는 형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바이어가 화가 나 구매를 취소해 작품이 남았는데, 일본정부가 잘됐다 하고 거액을 심수관가에 지불하고 작품은 일본에 남았다. 전시되지는 않고 있다.
14대 심수관의 작품은 내려오는 기법 외에 새로운 표현과 형식을 창안했다. 상감처럼 흙을 파내어 음영이 깃든 섬세한 무늬를 내는 부조기법을 처음 썼다. 그는 조선자기의 진사기법도 썼고 흑유 도자기도 내놓았다. 초대 심당길이 만든 히바카리와 똑같은 형태의 사발도 눈에 띄었다. 메밀국수를 찍어먹는 장국 사발이었다. "성공 여부는 염두에 없고 오직 조상들의 역대 걸작 명품에 어떻게 도전하고 극복하느냐가 문제" 라고 했다. 그는 도자기를 보석체계에 드는 것으로 정의했다.
그는 한국의 옹기를 강력한 힘을 가진 모든 도자기의 근본으로 보고 찬양해 마지않았다. '옹기에서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옹기는 힘이 세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현대문물에서 옹기가 점차 사라지는 것을 말할 수 없이 안타까워했다. 아들 15대 심수관 일휘(一輝) 씨는 이탈리아와 경기도 이천 옹기가마에서 수업을 했다.
산업화 되어 24시간 터널가마에서 구워져 나오는 아리타 자기와 달리 하나하나 손으로 빚어내는 도자기는 그 뒤에 인간이 떠오른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심수관가는 25명 직원의 한계를 엄격히 지키면서 그 규모 안에서만 생산한다. "우리 가마는 원료를 부수는 일에만 기계를 쓰고 모든 과정을 다 손으로 제작합니다"고 했다. 아래서 때는 불길이 경사면을 따라 위로 솟아오르게 설계된 오름가마 역시 고대의 조선인들이 일본에 전한 혁명적인 첨단설비였다. 아직도 조선도공들이 쓰던 용어 '바닥(구워낸 옹기를 놓는 장소)' '앉을 통(물레나 가마 앞에서 일할 때 앉는 걸상)' '돈' '그네' 같은 말이 그대로 전해진다.
12대 심수관이 종가로서 옥산신사(玉山神社)를 돌보며 단군제를 지원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며 단군을 받드는 것부터 도전을 받았다. 12대가 도자기를 배에 가득 싣고 도쿄로 가 힘들여 교섭해서 밤에만 지내는 제사로 간신히 단군존숭의 맥을 잇다가, 결정적으로 경성제대를 나온 한 사람이 '바위를 놓고 단군이라고 섬기는 것은 야만이니 반대한다'고 나서면서 후손들 사이에 의견이 갈라졌다. 그렇게 해서 단군제사가 폐지되었다. 1950년대 부터는 신사를 지키는 신관도 없어졌다.
1985년 국내에서 법학자 최태영 교수가 해외 한국인 사회에서 단군을 모시는 옥산신사를 주목해 이곳을 방문하고 문헌을 살펴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고려춤을 추며 부르던 노래, 신무가(神舞歌)는 한글로 불려지던 것이 세월이 흐르며 한글 발음도 어눌해 지고 그 뜻을 잊은 채 무언지 알 수 없이 전해지던 기록을 최 교수가 읽고 '오늘이 단군 제일(祭日)이로구나. 우리 아방 조신(祖神)을 잊지 않으리라. 모두 함께 노세' 하는 순 우리말 노래로 된 축가(祝歌)임을 확인했다.
"단군제를 지키려고 12대, 13대 선조께서 애를 많이 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고 14대는 말했었다. '14대 심수관은 이때의 사건에 말을 아꼈다'고 최 교수는 말했었다. 어떤 사안에는 적극적으로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14대 심수관이 최교수의 요청으로 1985년 11월 서울에 와서 '옥산신사의 유래'를 주제로 강연을 했다.
서울에 온 그는 사직동 사직공원 앞을 지날 때 '단군성전 300미터 앞'이라고 쓴 팻말을 보자 '아 단군성전이다!' 하고 마치 옥산신사의 모체를 본 듯 반색을 했었다. 하지만 14대 심수관이란 사람은 얼마나 명석한지 한국 국내에서 단군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대접을 받고 있는지 하는 것도 다 알고 있는 듯 했다. 1986년에 본 옥산신사는 한적하고 단군바위를 모신 건물은 문이 굳게 잠겨진 채 금줄로 부정타지 않게 보호되고 있었다. 심수관이 참배하는 모습을 밖에서만 보았었다. 그는 참으로 진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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