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답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트럼프스럽다'고 해야 하는지?
1994년 제네바합의(Agreed Frame)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불이행한 것은 미국 측이었다. 핑계는 연방의회를 장악한 공화당이 이를 거부한 탓이라지만 속내는 소비에트 붕괴 이후 동유럽 국가들 대부분 투항하였듯이 시간을 끌면 북한 역시 스스로 붕괴하거나 항복할 것을 기대한 것이 솔직한 미국의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후 한반도 주변 당사국들이 참여한 6자회담을 통하여 3년여 간의 논란 끝에 어렵게 합의를 도출해낸 9.19 공동성명에 뱅코델타아시아(BDA)사건으로 재를 뿌린 것도 역시 미국이었다. 북한을 떠보기 위한 것인지, 중국이 주도한 6자회담의 성과가 미국이 추구하는 동아시아 정책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북한을 희생양을 삼고자 했던 것인지는 의도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상기 두 개 사건과 연관하여 미국인들은 북한에게 불량국가와 악의 축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고 반드시 굴복시켜 이후의 정권을 친미적으로 교체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자 하였으며, 정상국가로 상대하는 것을 금기시하였다. 그것이 이제까지 미국 주류정치의 기본 방향이었다.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은 허를 찌르는 신속한 핵개발이었고 2017년 말에는 급기야 ICBM과 핵무기 보유국가임을 세계에 선언하게 이르렀다. 북한다운 행보였다.
상기 흐름 속에 있던 과거의 미국 정치 및 행정부의 일반적 관행과 예측을 보기 좋게 깨부수고, 싱가포르-하노이-판문점으로 연결되는 일련의 북미 정상간의 회담으로, 북한을 협상의 파트너로 삼은 트럼프 대통령의 파격적인 행보는 냉전의 여전한 잔재 속에 남아있던 한반도 상황에 돌발적인 기회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물론 이를 뒤에서 추진 조율하고 연출해낸 문재인 대통령의 인내와 겸손과 지략에도 큰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트럼프 집권 초기 전쟁을 예고한 험악한 상황을 복기하고, 세 번에 걸친 정상회담 일련의 과정에서 보여준 롤러코스트적 위기와 반전은 한반도 평화에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과 더불어 심각한 불안정성을 동시에 노출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이제까지 성과에 방심하고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이후 전개 과정에서 독자적인 진검승부적 결기, 대담하고 치밀한 전략적 구상과 유연한 전술적 대응 등이 매우 필요한 시점에 서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합의, 이를 추진하는 과정의 경로와 이행 여부, 트럼프 주변 인물들에 대한 주의 등 몇 가지 주제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출구 전략으로서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합의에 이르는데 매우 심각한 두 개의 쟁점적 장애물이 존재한다. 하나는 비핵화에 대한 정의(定議)로 미국 측은 북한의 비핵화로 좁혀서 이야기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한반도 전역에 대한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때 비핵화는 단순히 핵을 제조 보유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운반, 반입, 저장 등 광범한 개념으로 확장한, 일본과 괌 등 미국 군사전략 요지를 포괄한 지역 내 전반적인 비핵화를 말한다.
두 번째의 쟁점은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갖는 비대칭적 성격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체제 유지를 위한 안전판이자 생존의 비상 수단인 까닭에, 비핵화의 일방적 진행은 평화에 대한 확실하고 지속적인 보장이 확인되지 않고는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주제이다. 또한 비핵화가 일단 추진되면 다시 핵무장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비가역적 성격을 지닌 반면에, 미국이 보장하는 평화체제는 언제든 약속을 깰 수 있는 취약점을 갖는다.
리비아와 이라크에 대한 일방적 군사적 침공, 파리 기후협약의 불이행, 이란 핵합의의 일방적 파기 등에서 보여 지듯이 미국은 정권의 성격과 국내 정치의 흐름 그리고 패권의 유지를 위하여 언제든 자신이 만든 약속과 합의를 파기할 위험을 지니고 있다. 미국이 한번도 국제사회에서 자신이 약속한 합의를 제대로 이행한 적이 없다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지적은 대체로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상기 배경의 고차원적인 함수를 풀고 실천이 가능한 합의에 이룰 지 전망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이제껏 미국의 일관된 입장은, 북한 등 적성국가들의 못된 행위에 대해서는 절대로 사전에 무엇인가를 보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고집이 가능한 배경에는 전세계의 어느 지역이라도 즉각적으로 보복공격을 가할 수 있는 압도적인 군사력과 여전한 경제력이 있다. 기축통화인 달러 발행국으로, 달러가 교역 교환과 결제 수단이라는 점을 활용한 세컨더리 제재를 통해 주요 국가들을 협박한다. 이 과정에서 UN WB IMF 등 국제적인 기구를 장악한 미국은 각종 제재의 시행에 대하여 가식적이나마 국제적인 명분을 제공받고 있다.
앞의 항목들과 관련하여 북한은 당연히 핵동결(Freezing), 핵능력감축(roll-back) 그리고 최종 비핵화(FFVD)의 단계적 동시적 진행에 대하여 상대방인 미국에게 응당한 조치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예컨대 워싱턴과 평양에 연락사무소 설치와 외교관의 상주, 핵개발과 직접 관련된 교역을 제외한 모든 제재의 해제, 북미간 수교와 평화협약의 비준 및 국제적 단위에서의 안전보장 등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과연 트럼프 대통령 임기 안에 미국이 이러한 단계적 접근과 시행에 합의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결국은 북한에게 안전보장과 생존의 자구책(MAD, Massive Assured Destruction))으로 최소 조건으로 핵보유를 당분간 묵인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트럼프를 포함하여 그를 둘러싼 주요 인사들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우월자'로서 미치광이 게임을 즐기는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의 평화 구축과 비핵화를 미 행정부의 공식적인 동아시아 전략의 핵심으로 삼는다는 것보다 자신의 정치적 과시와 재선의 성과로 활용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북한과의 협상 과정이 자신에게 정치적 흠결이 되거나 불리한 경우에는 언제든 입장이 돌변할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하노이 회담에서 보여준 돌발상황 등을 감안하면 문재인 대통령과 측근들이 그동안 보여준 인내적 노력과 유연함을 높이 평가할 만 하다.
2002년 켈리 특사의 평양 방문 후 북한을 상종할 수 없는 상대로 평가하고 국무부 차관보로서 미국의 대북제재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이후 2006년 북의 1차 핵실험 시 유엔대사로 재직하면서 이를 국제적인 제재로 확장시킨 존 볼튼이라는 존재가 여전히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남아 있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는 요원한 이야기이다. 그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편집적 전쟁광으로 이란과는 전면전을 불사하고 북한의 숨통을 틀어쥐어서 항복을 받아 내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이자 목표인 인물이다.
다행히 최근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볼튼은 이란의 공습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명령하달 한 시간 전에 폭스 뉴스의 터커 칼슨 기자의 조언에 따라 트럼프 대통령이 중지시켰다고 한다. 이후 6.12 판문점의 조우적 회담도 반대하여 개인적으로 '왕따'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존 볼튼의 경질 여부가 앞으로 전개될 한반도 전망의 척도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또 하나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 할 인물들은 군부세력이다. 지금은 주한 미국대사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지만 이전의 미태평양 사령관 출신으로 일본 아베와 각별하고 그의 복심으로 통하는 해리 해리스는 사령관 당시에도 그랬지만 현재의 주한대사로서 마치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처럼 다루는 인물이다. 한국 부임 후 공식적으로 처음 만난 외부 인사가 아버지와 인연을 핑계를 앞세운 백선엽이라는 친일파 군인이라는 것이 그의 성격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이 마구잡이로 매국적 발언을 떠들어 대는 뒷줄 배경에는 아베와 해리 해리스라는 극우적 인물들의 조합이 있음이 분명하다. 현재의 로버트 에이브람스 주한 미군사령관은 미 군부의 전설적인 명문가 출신이다.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자존심이 강한 강골의 군인으로 호전적 성향을 감출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유의하고 조심해야 할 인물은 폼페이오 국무장관이다. 미육사를 최우등으로 졸업할 때부터 네오콘과 군산복합체 기업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대위로 예편하자 곧바로 군 관련 기업체의 책임자로 발탁되었고 이후 하버드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로 지냈다. 세 번 임기의 하원의원을 거쳐 CIA 국장으로 전격 발탁된 배경에는 네오콘과 군산복합체 기업집단뿐 아니라 공화당의 최대 전주(錢主)로 알려진 코크 형제가 실제적인 후견인으로 힘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재선이 급한 트럼프 자신도 함부로 다루기 어려운 상대로 추정된다.
CIA 국장시절 '김정은 암살작전' 기획을 직접 지휘하였고 한국군에게도 이에 동참하길 강요한 악질적 전력을 지니고 있으며, 하노이 회담을 결렬시킨 배경에도 존 볼튼의 손을 들어준 폼페이오가 주범이라는 후문이 있다. 상황에 따라 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 속성을 지닌 듯 하다. 유럽 나토 회의 참석과 중동 방문 시에는 매우 호전적인 협박성 발언을 쏟아내다가 중국과 인도 앞에서는 능란한 외교관으로 변신하고, 한반도에 대해서는 트럼프의 지시를 따르는 실무형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실제 속내는 알 수 없는 인물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트럼프 이후 공화당 대선 후보라는 야심을 키우고 있다는 점이다. 호주 대사로 내정되었던 해리 해리스를 급히 주한대사로 급조하여 임명한 사람도 바로 폼페이오 자신이다.
이제 문재인 정부와 한국 정치권 인사들은 단순히 현재의 트럼프와 측근들이 벌이는 예측불허 게임의 뒷수습만 할 것이 아니라 주권적 외교활동을 제대로 펼쳐야 할 것이다. 민관 합동으로 민주당 주요 인사를 포함한 미국 정계를 설득하고 조야에 접근하여 미국 내에 광범하게 펴져있는 혐북(嫌北)적 조류를 씻어내야 하는 것이다. 당연하게 북한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하도록 설득하는 노력과 함께 북미간에 국교를 정상화하고 평화협상을 맺고 연방의회가 이를 비준하도록 주선하면서 북미간의 관계 개선과 협력이 국제적 흐름으로 정착되도록 최선을 다해 줄 것을 기대한다.
무엇보다 전시작전권을 가능한 빨리 되찾아 오고, 국제사회를 향해 6.12 판문점 회담이 실제적 '종전선언'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자연스럽게 '유엔사의 해체'를 추진해야 할 것이다.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 정착은 결국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반도의 향후 백년을 예약하는 밝은 미래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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